21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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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두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자 행렬 양쪽에서 따라오던 트라야누스 용병단이 비아냥거렸다.
“고작 검은 등 쥐 몇 마리 따위에 행군을 멈추다니, 쯧!”
“저놈들 칼은 마물 기름을 먹어 본 적이 없어서 벌써 이빨이 나갔나 본데!”
스캄이 마차의 속도에 맞추어 가까이 와서는 입에 들어간 수염을 퉤퉤 뱉으며 한 주임에게 소리쳤다.
“어이, 신입! 입단을 했으면 나와 싸워야지, 그 안에 쥐새끼처럼 숨어서 뭘 하는 거야?”
“말 타는 법을 몰라요!”
“형편없구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차 안에서 검을 뽑아 들고 있는 모양새가 기특해서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멀어졌다.
이윽고 작은 개울이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그들은 완전히 멈추었다.
코치 (다인승 대형마차)가 들어갈 정도로 넓지는 않아서 그들은 모두 마차에서 내려 커다란 나무 기둥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먼저 들어와 있던 기사들은 모두 개울 하류에서 지친 말들에게 물을 먹이고 본인들도 수통에 물을 담아 마시고 있었다.
야인 용병들도 뒤를 이어 말을 끌고 들어와 물속에 얼굴을 박고 꿀꺽꿀꺽 들이켜자 한 주임도 갑자기 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긴장이 풀리자 바로 어제 야닉에게 받은 마력이 줄줄 새어나가는 기분이었다. 운영팀 모두가 다리가 풀린 듯 비틀거리며 개울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염 부장을 부축하던 하랑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저희 마차 유리가 깨질 뻔한 거 보셨어요?”
하랑은 즐거운 경험담을 이야기하듯 신이 나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한 주임이 손으로 물을 떠먹다가 입을 닦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싸우지 못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정말로 깨고 들어왔으면 제가 바로 배에 검을 찔러 넣었을 텐데. 부대장님이 가로채는 바람에 아쉽게 됐지 뭐예요!”
“하랑, 유리 파편이 튀지 않도록 창문에 천을 덧대어 놔. 헤르미네는 마물이 나타나면 바로 마차에 실드부터 치고.”
야닉이 어느새 다가와서 질책하듯 지시를 내리자 포라킨이 뚱한 얼굴로 핑계를 댔다.
“정예기사들이 이 정도는 막아 줄 줄 알았죠. 설마 검에 바람 속성을 걸지도 않고 한 마리씩 베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포라킨의 말에 하랑이 입을 비죽거리며 덧붙였다.
“이 상태로 취발론을 무사히 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보니까 검들도 부러지기 딱 좋게들 생겼고요.”
거스 경은 근엄한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검에 묻은 마물의 피를 깨끗하게 닦지 않으면 부식된다는 누구나 아는 상식 따위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어서 몇 종류의 마물을 상대해 본 경험을 가지고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검은 등 쥐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을 땐 정예기사들은 마지못해 경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야닉은 그 모습을 못 미덥게 보다가 스캄을 불러 마차 주위로 열 명씩 붙으라 명령하고는 한 주임의 손을 잡고 상류 쪽으로 데려갔다.
“마력이 모자란 것 같진 않은데, 많이 놀랐나?”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더욱 희멀게진 그녀는 버티고 있던 긴장이 풀렸는지 바닥에 무너지듯 흘러내렸다.
그녀가 엉덩방아를 찧지 않도록 두 팔을 잡아 올리던 야닉이 두르고 있던 망토를 한 손으로 끌러 바닥에 대강 겹쳐 깔아 주었다.
“쪼그리지 말고 여기 앉아, 눕지는 말고. 금방 다시 출발해야 해.”
“괜찮….”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눌러 앉히는 바람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는 다시 일어설 힘도 없어서 그대로 무릎을 끌어올려 안았다.
고맙다고 하려고 입술을 들썩이는데, 멀리서 누가 황자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야닉은 쉬고 있으라고 말하더니 곧장 멀어져 갔다.
한 주임은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계곡물에 손을 집어넣었다.
빠른 유속이 살갗을 간지럽힘과 동시에 모든 감각이 선명해졌다.
‘진짜 현실이구나.’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징그럽게 생긴 괴물들이 목숨을 위협하고 살기 위해 검을 들어야 하는 세상은 정말로 꿈이나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사무실에 앉아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손바닥은 벌써 굳은살이 올라오기 시작해 까슬까슬했다.
몸에 익숙지 않아 아직도 불편한 의복들, 머리를 조아리며 시중들 들어주는 낯선 사람들, 그리고 하루가 멀다고 황자의 손을 잡아야만 살 수 있는 기이한 처지.
이렇게까지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박 차장이 있는 옆방에서 이따금 숨죽이듯 토해 내는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동정심이 들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속 깊이 공감이 가진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운 가족 같은 건 처음부터 갖고 있지도 않았다. 박 차장의 타들어 가는 마음 같은 건 모른다.
차장님의 가족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시간이 멈춘 상태로 사진처럼 박혀 있을까? 아니면 실종된 딸과 아내를 애타게 찾고 있을까?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물음이었음에도 한 주임은 자신을 박 차장에 이입해 가며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감정 없이 태엽으로 돌아가는 인형이라도 된 듯한 씁쓸함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한 주임이 덩그러니 물가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본 이한율이 달려와 수선스럽게 살피고는 천천히 부축해 일으켰다.
“아, 이거 돌려줘야 하는데.”
한 주임이 상념에서 깨어나 흙이 묻은 망토를 들어 올리자 이한율이 가로채듯 가져가며 대충 털어 냈다.
“제가 갖다 드릴게요.”
* * *
마차는 다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폭이 넓지 않은 길이라 행렬이 더욱 길게 늘어나 천천히 이동하는 틈에 그들은 마차 안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꿀에 적신 밀 빵 한 덩어리와 짭짤한 소시지 하나씩이 그들이 배급받은 전부였으나 운영팀은 조금 전 거대하고 징그러운 쥐들을 본 터라 식욕이 전혀 돌지가 않았다.
한 주임은 눅눅해진 빵을 조금 뜯어 먹다가 그만두고 기름을 먹인 마포에 돌돌 말아 가방에 넣었다.
김유정은 아예 푸르지도 않은 채 마차 안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창문을 열고 파이어 볼트를 날렸어야 했는데…….”
누구보다 자신만만했으나 막상 코앞에서 누런 송곳니를 드러내며 끈적한 침을 흘리던 마물의 형상이 어지간히도 끔찍했는지 그녀는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박 차장이 동의하며 넋두리를 했다.
“난 심지어 좀비 영화 마니아거든. 그래서 하나도 안 징그러울 줄 알았는데 화면에서 보는 거랑 눈앞에서 타는 냄새까지 맡는 거랑은 영 딴판인 거야.”
“겨우 쥐 떼에 이 정돈데 더 무서운 게 나타나면 어떡하죠, 우리…….”
김유정이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지만, 다행히도 해가 지고 야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괴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귀환대는 사방이 트인 들판에 다다라 행군을 멈추고 짐을 풀었다.
수습기사들이 말 엉덩이에 매단 군장에서 커다란 타포린 (방수천)을 끌어내려 바닥에 말뚝을 박고 여기저기 천막을 쳤다. 기사들은 개울에서 담아온 물을 말들에게 먹이고 있었다.
야닉이 종자들을 데려가면 귀환대의 규모가 두 배가 넘어간다며 최소한의 인원만 구성하는 바람에 귀족 출신 기사들은 손수 무거운 갑옷을 벗고 본인의 말을 직접 돌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들은 군량이나 물품을 책임지는 수습기사들에게까지 온갖 잔심부름을 시켜 댔고, 결과적으로 정예기사들이나 수습기사들이나 뒤에서 불평을 늘어놓는 이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네 명이 함께 들어가 잘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천막들이 여기저기 세워지자 주변 정찰을 나선 기사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하나둘 고단한 몸을 뉘었다.
한 주임의 천막 안에는 김유정과 박 차장, 포라킨이 자리를 잡았다.
수습기사들이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그녀들이 서로 열심히 안마를 해 주며 몸을 풀어 주고 있을 때, 밖에서 큼큼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하랑이었다.
“내일 일정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으니 다들 나와 보세요!”
커다랗게 피워 놓은 모닥불 근처에서 야닉과 스캄, 거스 경과 운영팀 남자 셋이 빙 둘러앉아 무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닉이 한 주임을 보고 비어 있는 제 옆자리를 툭툭 치자 돌연 박 차장이 냉큼 달려가 앉았다.
그는 잠깐 멈칫했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내일 우리가 지나는 곳은 숲고블린과 오우거의 서식지야. 고블린들은 우리 같은 대규모 행렬은 아마 건들지 않을 거야. 문제는 오우거지. 오우거는 숲을 배회하면서 인간들이나 산짐승, 먹을 게 없으면 검은 등 쥐 같은 작은 마물까지 잡아먹거든.”
그의 말에 거스 경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저희는 오우거만 주의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놈들은 지능이 낮아서 무리생활도 하지 않고 한 놈씩 어슬렁거리면서 다니니까요.”
“차라리 고블린 떼를 상대하는 게 나아, 귀족 양반.”
스캄이 엉킨 수염을 손가락으로 긁어내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귀족 양반’이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거스 경이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야닉이 곧바로 보충했다.
“지금은 먹을 게 없는 계절이라 대량의 인간 냄새를 맡은 오우거들이 몰려들 거야. 운이 나쁘면 다섯 정도? 골치 아픈 건 고블린들이 오우거를 따라다니면서 놈들이 먹다 남긴 사체를 줍거나 가로채고 있다는 점이야. 오우거 한 마리당 고블린이 적어도 스무 마리 정도는 붙어 있다고 봐야 해.”
그의 말에 거스 경이 곧바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오우거가 다섯 마리 나타나면 고블린은 백 이상이 몰려들 거란 말이군요. 놈들 무리에 다수의 오우거까지 상대하려면 골치가 아프긴 하겠습니다.”
30대의 상급기사인 그는 고블린 열 몇 마리 정도는 근방 토벌에서 상대해 본 적이 있으나, 인간의 배 이상 덩치를 가지고 어마어마한 힘을 휘두른다는 오우거와 맞서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노련해 보이기 위해 짐짓 차분한 어투로 소견을 냈고, 포라킨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황실 기사들이 어디 가서 정예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 황자님이 이방인까지 부르신 거겠지.’
“이방인들을 모이라고 한 이유가 이거야. 그대들을 보호할 수 있는 인원이 모자랄 수도 있어.”
포라킨의 예상대로 야닉이 이한율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하자 그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저희도 싸워야겠네요.”
포라킨이 이번에는 드러내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마차 한 대 정도는 전체 실드를 치고 수습기사들에게 호위를 맡길 수 있어요. 한율 님을 제외한 이방인분들은 일단 마차에 계시고, 정 안되면 염 부장님만 나와 주세요. 우리 편한테만 공격하지 않으면 부장님도 전력에 도움은 되니까요.”
“나, 나 말이야? 이 사원이 있는데 나까지 굳이….”
염 부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굴리자 잠자코 있던 한 주임이 결연히 손을 들었다.
“저도 나가서 싸울게요.”
“그대는 안 돼.”
“주임님은 안 돼요.”
야닉과 이한율이 동시에 말하자 모두의 낯빛이 오묘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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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