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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24화 (24/155)

24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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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다이어울프의 영역이라 건너오지 못할 거야.”

야닉이 차가운 물에 흠뻑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한 주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낮게 읊조렸다.

그녀는 그에게서 흘러들어오는 마력의 온기에 온전히 몸을 기댔다. 따뜻해서라기보다는 서 있을 힘이 없었다.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랜 오우거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건너편에 잔뜩 있는 먹이들을 보다가 멀리서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포기하고 돌아섰다.

먹다 흘린 형체를 알 수 없는 잔해더미엔 고블린 수십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앞다투어 들러붙었다. 자리에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핏물만 남긴 채 그들이 모두 사라졌을 땐, 날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비는 이제 그쳐서 젖은 수풀을 스치던 바람이 칼날처럼 얼굴을 갈라 들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던 로브와 서코트 자락 끄트머리가 얼어붙고 있었다. 귀환대는 강어귀를 따라 상류로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내내 누구도 말이 없었다. 그들은 몹시도 지쳐 있었다.

‘늑대의 샘’이라고 불리는 폭포에 도착한 이들은 너절한 로브를 벗어던지고 야영할 땅의 자갈과 돌부리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다른 쪽에서는 커다란 솥에 계곡물을 퍼 담아 장작불 위로 바쁘게 올렸다.

남자들은 갑옷과 튜닉을 모두 벗어 던지고 냄비에 덜어온 데운 물에 찬물을 섞어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그들은 단검으로 조각낸 비누를 나누어 몸에 벅벅 문질러 댔다. 몇 시간 동안이나 두르고 있던 고블린의 악취는 물만으로는 지워지지 않았다.

하랑이 멀쩡한 천막 한 포를 가져와서 옆으로 뻗어 있는 기다란 나무줄기에 넓게 걸쳐서 가림막을 만들어 주었다.

여자들로만 구성된 마법사들과 한 주임 일행은 크고 작은 그릇에 물을 떠 천막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 주임이 가죽 보호대와 튜닉을 벗고 마지막으로 셔츠 소매를 걷기 시작했을 때 바깥에서 망을 보던 하랑이 그녀를 불렀다.

“한 주임님, 주인님이 부르세요!”

그녀는 영문을 모른 채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무거운 양모 로브를 두르고 하랑을 따라나섰다.

하랑은 야영지에서 멀지 않은 커다란 바위를 지나쳐서 폭포수가 쏟아지는 곳으로 그녀를 데려간 뒤 물줄기 안으로 들어가라는 턱짓을 하고는 휙 사라져 버렸다.

폭포는 그다지 높지 않은 대신 옆으로 폭이 넓어 커튼처럼 새하얀 장막을 쏟아 내고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이를 꽉 물고 엉덩이까지 차오르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신기하게도 물줄기에 가까워질수록 수온이 점점 올라갔다.

“야닉… 님?”

장막 안쪽에는 매끈한 등을 드러내며 모로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어깨 뒤로 느슨하게 묶여 있던 머리가 풀린 채로 남은 비눗물이 흐르는 물줄기에 씻겨 내려갔다.

허리춤에 아슬하게 묶인 옷가지 위로 군살 하나 없는 날렵한 복근과 근육이 잡힌 두툼한 광배근이 물에 젖어 반짝거렸다. 넓은 가슴은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릴 때마다 볼록하게 위로 솟아올랐다.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겨 드러난 남자의 실루엣은 물줄기 사이 스며든 달빛을 오롯이 받아 내고 있었다.

선명하고 곧은 눈썹 아래 곡선을 그리는 콧대와 콧날, 기막힌 각도로 반듯한 입매와 그다지 두껍지 않은 입술이 자리 잡은 얼굴은 남자치곤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렸고, 여자라기엔 강인한 턱선이 다부졌다.

한 주임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올 법한 남자에게서 얼어붙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찰방, 그녀가 앞으로 발을 딛자 야닉이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시선을 맞춰 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그의 아득하리만치 깊고 진한 황금색 홍채가 자신을 관찰하듯 훑을 때면 그녀는 어딘가 발가벗고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불안인지 긴장인지 모를 맥박이 쿵쿵쿵… 온몸을 세차게 때렸다.

꼭 손가락 끝까지 심장이 매달려 있는 것 같다.

“그대는 편하게 씻으라고.”

야닉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자 수면 위로 포슬포슬한 수증기가 올라왔다.

그가 화기를 내보내고 있었다. 온천 같은 물속에서 한 주임은 싸늘한 상반신을 급하게 아래로 주저앉히며 언 몸을 녹였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한겨울 야외에서 이런 호사라니.

“그… 저쪽을 보고 앉아 주겠어?”

약간 난감한 어투로 말하는 야닉에 그녀는 얼굴 바로 앞에 있는 남자의 하반신을 보고 솟구치듯 위로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귀까지 얼얼하게 타올랐다.

“아. 죄송… 일부러 그런 게… 아!”

당황해서 멀어지려고 내디딘 발이 미끄러운 자갈을 밟고 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순발력 있게 그녀의 어깨를 잡은 커다란 손이 단단하게 몸을 바로 세웠다.

“조심해야지.”

지금 당장 여기서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창피했지만, 다리를 감싸오는 부드러운 온수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창피함을 무릅쓸 만큼 몸이 녹아내리는 따끈따끈한 물에 그녀는 차라리 뻔뻔해지기로 했다.

야닉은 그녀가 걸치고 있던 물 먹은 로브를 벗겨내다가 그 아래 하얀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 한 주임이 서둘러 로브 자락을 움켜쥐었다.

“제가… 할게요.”

“…뒤돌아 있을 테니 편하게 씻어. 비누는 벽 위에 있으니 쓰고, 옷은 내가 빨아 줄 테니 이쪽으로 줘.”

그는 최대한 담백한 말투로 돌아섰다.

잠시 망설이던 한 주임은 킁킁거리며 로브와 몸에서 나는 흐릿한 악취에 코를 찡그렸다. 창피고 뭐고, 이런 냄새를 두르고 잘 순 없었다.

그녀는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로브를 야닉에게 내밀고 뒤이어 셔츠와 바지까지 모두 벗어 건넸다. 단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순식간에 속옷만 입고 서 있는 꼴이 되어 버렸다.

잠시 후 등 뒤로 옷에 비누칠하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남의 옷을 빨아 주는 황자라니…. 미약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별수 있나, 몸을 씻자니 옷이 떠내려갈 테고 옷만 세탁하자니 몸도 닦고 싶은 것을.

자꾸만 합리화를 하면서 뻔뻔해지는 걸 보면 그래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싶었다.

그가 보고 있지 않더라도 차마 전부 벗지 못하고 한 주임은 그냥 씻기로 했다. 대강 문지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그녀는 슬쩍 뒤를 돌아 비누를 찾았다.

약간 튀어나와 있는 돌 위에 색이 다른 비누 두 개가 보였다. 황궁에 있을 때 색깔 별로 용도를 기억하고 있어서 머리를 먼저 감은 뒤 물속에 잠수해서 잽싸게 헹구어 내고, 몸을 일으켜 비누로 전신을 마구 문질렀다.

타월 없이 맨손으로 문지르려니 거품도 많이 나지 않고 아쉬운 느낌이 계속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야닉을 살폈다.

그는 로브를 꼼꼼하게 세탁한 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이번에는 바지를 손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시간상으로 여유가 있는 것 같아 보여 용기가 슬금슬금 솟아올랐다.

어차피 하체는 하얀 물보라가 치는 물속이니까 괜찮겠지. 그녀는 아래 속옷을 벗고 커다란 해방감을 느끼며 그것을 타월 삼아 몸을 닦았다.

물 온도는 그와 가까워지면 뜨거워졌다가 조금 멀어지면 서늘해졌다가 하면서 절묘한 쾌감마저 일었다.

“다 씻었어? 옷 입을래?”

물만 첨벙대는 소리에 그가 질문하자 한 주임은 다시금 뻣뻣하게 네, 네 하며 손을 내밀었다.

“…….”

그에게서 비누 향이 은은하게 나는 셔츠를 건네받아 입은 뒤 허전한 아래를 입으려는데 손에 아무것도 없다.

‘팬티가 어디 갔지?’

불순한 예감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

설마 아까 셔츠를 받으면서….

아연한 얼굴로 천천히 돌아본 뒷모습에는 유려하게 잘 짜인 등 근육이 고민에 빠진 듯 꼼짝없이 굳어 있었다.

그는 엉겁결에 건네받은 속옷을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서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잘못 드린 거예요! 돌아보지 마세요!”

한 주임이 곧바로 손을 뻗어 그의 손에서 잽싸게 가로챈 것을 요란하게 첨벙거리면서 주워 입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쳤어, 미쳤어!’

“…그대가 이렇게 대담한 성격이었나 했어.”

그가 웃음을 참으려는 듯 성마른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나머지 옷들을 하나씩 돌려주었다.

한 주임은 물 밖에서도 불타는 얼굴로 꾸물거리며 축축한 로브까지 전부 꽉꽉 껴입었다.

야닉이 물기를 꽉 짜긴 했지만 입으면서 튄 물 때문에 몸이 휘청거릴 만큼 무거웠다. 그는 뒤뚱거리는 그녀를 번쩍 안아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 주임은 자아가 없는 사람처럼 그에게 들려서 물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온 그는 서둘러 열기를 담은 뜨거운 바람을 옷에 쐬어 주며 빠른 속도로 물기를 날렸다.

살이 닿는 부분은 조심해서 온도를 낮춘 뒤 셔츠 부분을 먼저 말리고 로브를 벗겨 그녀를 뽀송뽀송하게 만들어 주었다. 로브는 따로 들고 강하게 열을 쐬어 주자 수증기가 폴폴 피어올랐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어색하게 서서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한 주임을 보고 있자니 야닉은 어딘가 좀 재밌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어 본 적이 처음이라 그런가.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칼 사이에 바람을 솔솔 불어 주며 야닉이 말했다.

“로브로 만들어 쓰는 바람에 천막이 부족할 거야. 오늘은 내 막사에서 자도록 해.”

“마차에서 자면 돼요. 괜히 신경 써 주실 필요는….”

“마차를 채우고도 부족하다는 뜻이야. 말들도 씌운 탓에 천막을 절반 넘게 썼거든.”

그녀는 기분 좋은 바람과 부드러운 그의 손길을 느끼며 급격하게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 올렸다.

누군가 머리를 매만지면 졸린 것은 왜 그런 걸까?

한 주임은 노곤한 기분으로 물었다.

“그럼 야닉 님은 어디서 자요?”

“내 막사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당연히 같이 자야지.”

“아.”

물론 그가 이상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닌 것은 알지만 그녀는 어른스럽게, 유연하게 받아칠 경험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갑자기 잠이 저만치 달아날 만큼 당황해서는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다가 결국 포기하고 흐름에 맡겼다. 오늘은 무언가를 더 깊이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고된 하루였고 약간은 자포자기한 심정도 어느 정도 있었다.

무거운 의복을 입고 오래 걸은 탓에 허벅지 안쪽과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그가 막사까지 안고 가려는 걸 극구 사양해서 겨우 제 발로 일행에게 돌아오니 아니나 다를까, 운영팀 사람들이 히죽거리며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었다.

“야닉 님이 머리를 말려 주셔서….”

“어유, 재인 씨 누가 뭐래? 애쓰지 마. 우리가 무슨 애들도 아니고. 이런 거로 안 놀려.”

박 차장의 말에 실컷 놀리려고 어깨까지 들썩이던 공 대리가 입을 꾸욱 다물었다.

한 주임은 빨래를 하고 있던 운영팀을 도와 열심히 옷에 비누를 문질러 댔다.

다이어울프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워둔 덕에 야영지는 밝고 훈훈해서 잠시나마 그들은 안온한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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