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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25화 (25/155)

25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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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 부장이 만들어 준 간이 빨래건조대 위에 옷을 널고 바람을 쐬어 주며 말리고 있을 때, 정찰을 나갔던 기사들이 어디선가 팔뚝만 한 생선들을 냄비에 담아 가지고 돌아왔다.

“폭포 아래쪽에 다녀왔는데, 송어들이 거의 익어서 죽어 있던데요?”

기사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저 운이 좋았다는 듯이 해맑게 스튜를 끓일 준비를 했다.

스캄과 포라킨, 하랑만이 알겠다는 표정으로 일제히 야닉을 봤다. 그는 도리어 뻔뻔한 얼굴로 ‘오, 맛있겠군.’ 하며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기운을 차린 김유정이 두 손을 걷어붙이고 수습기사를 밀어내고 불 가에 앉았다.

“향신료 있는 대로 다 가져와 보세요.”

그녀는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듯 기사가 가져온 꾸러미들을 빼앗듯이 가로채서는 바닥에 모두 풀어 예리하게 살폈다. 예상보다 쓸 만한 게 있는지 그녀가 눈을 빛내며 재료들을 골라냈다.

흑후추와 생강, 마늘, 병아리콩, 간을 맞추기 위해 짜디짠 육포 몇 조각, 기사들이 근처에서 뽑아온 순무를 눈대중으로 계량해서 넣고는 깨끗한 계곡물을 콸콸 부어 장작을 더 가져오라며 단호하게 명령하자 기사가 얼떨결에 뛰어나갔다.

다시 돌아온 수습기사의 손에는 작은 나뭇가지들과 처음 보는 풀뿌리가 들려 있었다.

“이게 뭐예요?”

“리크(leek)인데요. 혹시 몰라서요.”

김유정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대충 흙을 털어 내고 풀의 끝부분을 조금 씹었다.

그러고는 얼른 물가로 가져가서는 벅벅 닦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씻은 리크는 손으로 뚝뚝 뜯어서 솥에 모조리 넣었다.

그녀는 생강과 마늘을 아낌없이 넣어가며 익숙한 향이 올라올 때까지 연신 무언가를 넣고 또 넣고를 반복했다. 이윽고 냄새에 이끌려 모인 기사들에게 자신만만한 얼굴로 한 그릇씩 손수 담아주었다.

기사들은 확 풍겨오는 향에 인상을 쓰며 조심스럽게 그릇째 들고 후루룩거렸다.

어죽에 가까운 스튜는 그들 입맛에 맞지는 않았지만 김유정이 남은 재료를 다 때려 넣은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아크만에서 온 야닉 일행은 마늘 향이 익숙한 듯 무리 없이 먹었고, 운영팀은 하나같이 눈만 끔뻑거렸다.

그들은 거진 한 달 만에 맡는 한식 비스무리한 냄새에 누구도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고 그리웠던 향기만 맡고 있었다.

한 주임이 침묵을 깨고 먼저 한 스푼 떠서 맛을 보고 ‘맛있어요.’ 하자 그제야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텅 빈 나무 그릇을 바닥에 툭 떨어뜨리던 염 부장이 억눌린 목소리로 뜨거워진 눈시울을 벅벅 문질렀다.

“에이 XX, 술 끊은 지 10년 됐는데 소주 한잔만 했으면 소원이 없겠네.”

소주. 한 주임은 그 쌉싸름하고도 달금한 맛을 떠올렸다.

박 차장이 염 부장의 등을 토닥거리며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 * *

4인용 천막에서 7명이 자기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다섯 명이 일렬로 나란히 눕고 남은 두 명이 다섯 명의 머리와 다리 맡을 가로질러 눕자, 네모난 천막 하나가 꽉 들어찼다.

귀족 기사들은 처음 겪어 보는 고된 행군에 어느새 불만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래도 사람이 많아서 춥지는 않군.”

“내 옆에 누워 있는 게 향기 나는 여인들이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말이야.”

“결혼도 한 사람이 막말을 하는구만. 수도로 돌아가면 소남작 부인께 일러바쳐야겠어.”

“나만 결혼했나? 황자도 그 반반한 이방인을 데리고 막사로 들어가는 것을 다들 봤잖은가.”

“빌어먹을, 혼자 휴양이라도 온 것 같더군.”

비좁은 공간에서 투덜대던 황실의 정예기사들은 자연스럽게 비난의 화살을 야닉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몸집이 커서 불편한 듯 이리저리 뒤척이던 기사 하나가 토로하듯 툭 던졌다.

“거스 경도 답답할걸세. 이방인들의 호위 수장을 맡았는데 황자의 같잖은 명령에 내내 휘둘려야 하는 신세라니.”

“뛰어난 검사라던 소문도 전부 과장이었던 것 같고 말이야. 쓸 만한 야만족 무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제 공인 척하고 있던 게지.”

“로기아 변경백께서 일구어 놓은 아크만 요새도 가로채려는 비열한 자야. 폐하께서 기사서임을 내리지 않으신 것이 천만다행이 아닌가.”

“아크만의 명성은 엄밀히 말하자면 이방인들이 쌓아 올린 것이지! 아까 자네도 봤잖은가, 한율 님이라고 불리던 자의 마법을!”

그들은 모두 이한율이 고블린들의 머리를 날리던 장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한 상급 마법사와는 비교도 안 될 화력에 지친 기색 하나 없던 모습은 과연 현자 급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다.

개중 한 사람이 입맛을 쯥 다시며 사내가 입는 흰 블리오를 걸친 채 비누 향을 폴폴 풍기며 돌아다니던 한 주임을 떠올렸다.

“이방인들의 마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던데… 막사로 따라 들어간 계집에겐 그게 전혀 없다지?”

그가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며 눈을 음험하게 번득거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기사 하나가 근엄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말이 심하네, 렉스 경. ‘계집’이라니. 소양에 맞게 ‘창부’라고 해야지!”

듣고 있던 6명이 동시에 큰 웃음을 터뜨리며 이번에는 다른 여성들을 한 명씩 조목조목 희롱하기 시작했다.

음담패설로 이어지던 기사들의 대화는 얼음장 같은 찬물이 천막 안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강제로 종료되고 말았다.

“아이쿠, 죄송합니다. 나리들! 제가 옷을 빨다가 그만 물을 반대로 버리고 말았네요?”

별안간 맞은 물벼락에 옴팡 젖은 기사들이 벌떡 일어났다.

누가 봐도 일부러 끼얹은 하랑을 향해 눈을 부라렸지만, 그의 뒤에 서 있는 거한의 야인들을 보고는 욕설을 삼키며 젖은 천막을 걷어 내고 튜닉에 튄 물을 털어 냈다.

하랑은 돌아서서 실없이 짓고 있던 미소를 지우고 냉랭한 얼굴로 커다란 솥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밖에서 무슨 소란이 나는 것 같긴 한데, 한 주임은 고개를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손끝에 매만져지는 오돌토돌하게 짜인 태피스트리가 꺼끌꺼끌한 모포와는 비교도 안 되게 포근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막사 내부는 간이침상 하나와 등잔이 올라간 나무 궤까지 다른 천막에 비해 무척이나 넓고 호화로웠다.

처음 야닉을 따라 들어왔을 땐 애써 태연한 척하려 감촉이 좋네 무늬가 예쁘네 따위를 조잘거렸는데, 그러다 보니까 진짜로 졸음이 밀려와서 몽롱한 눈을 끔뻑거리는 중이었다.

꼭두새벽부터 행군을 시작하고 오후 내내 다리를 혹사한 탓에 마음만 먹으면 10초 안에도 잠들 수도 있었다.

야닉은 맨틀이라고 부르는 긴 케이프를 벗어 한쪽에 걸어 두고는 침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한 주임은 자신 때문에 막사 주인이 불편하게 자는 것이 무안해서 최대한 구석으로 몸을 붙였다. 침대와 천막 사이로 찬 공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몸을 동그랗게 말아 벽을 보고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야닉이 한 손을 뒷머리에 이고 삐죽 솟은 천장을 바라보다가 옆에서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 주임이 잠이 든 것 같아 불을 끄고 나지막한 숨을 뱉으며 막사 내부 공기를 덥히고 있는데, 훈기가 돌기 시작하자 그녀의 몸이 이쪽으로 스르르 돌아간다. 아마도 잠결에 벽에서 스미는 한기를 피해 뒤척거리는 것 같았다.

아직 춥나 싶어서 제 몸을 가까이 뉘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꾸물거리며 따뜻한 곳으로 달라 붙어왔다.

“…이런.”

그는 곧바로 후회했다.

한 주임은 야닉의 어깻죽지부터 손가락 끝까지 왼팔 전체를 죽부인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무슨 여자가 이리 조심성이 없지.’

전에도 그의 침대로 숨어들던 여자들은 몇 명 있었지만 한 주임은 그런 뻔뻔한 타입은 못되었다.

남자를 유혹하려는 여자가 입까지 벌리고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잠들어 있을 리가 없다.

야닉은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을 보며 조금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팔을 위로 빼냈다. 제대로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다리까지 감아오며 제 팔을 끌어안고 있는 여체의 형태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탓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그녀가 노골적으로 유혹을 해 오는 요부였다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주었을지도 모른다.

금욕생활은 너무나도 길었고 눈앞의 여인은 조금 말랐어도 몹시도 제 취향이었으며, 연인 행세까지 하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니었던가.

그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등을 기대고 앉아서 자신이 아직 이성이 앞선 인간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내가 어지간히 초조하긴 한가 보군.’

아크만으로 따라오겠다며 울먹이던 이든의 얼굴이 순간 눈앞에 둥실거렸다.

안타깝게도 이든까지 오게 되면 요새의 기밀이 황실에 노출될 우려가 커진다. 그의 시중들은 모두 황태자비 모건 뤼시크의 수중에 있는 자들이고, 그녀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황자, 황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즉각적으로 보고된다.

시즈의 사람인 하녀장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마력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도 애저녁에 들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즈에게 이든의 안위를 맡겨 두었으니 당분간은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고, 거짓말에 능숙지 못한 이복동생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그 아이가 존재감을 드러낼수록 죽음과 한 발자국씩 가까워진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든은 아직 순수한 소년이었고 당분간은 무해한 아이로 남아 주어야 했다.

그래. 시즈가 반역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누워 억지로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느긋하게 자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황궁보다 마물이 넘치는 숲속이 차라리 마음 편했다.

* * *

한 주임은 아까부터 코가 간질거리는 느낌에 잠결에 손을 올리다가 스치듯 닿은 살갗의 감촉에 천천히 눈을 떴다.

까맣고 보드라운 머리칼이 턱 끝에서 살랑거렸고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규칙적인 숨결이 가슴께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순간 온몸이 빳빳하게 굳는 기분으로 자세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기다란 쿠션을 끌어안고 자던 평소의 습관이 도졌는지, 쿠션 대신 야닉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고 한쪽 다리를 그의 허리에 뱀처럼 감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올라탄 모양새였다.

사실은 똑바로 누워 자던 도중에 돌연 머리를 끌어안긴 그가 뒤척이다가 그녀의 허리를 감아올려 제 위에 올렸다는 걸 한 주임이 알 리가 없었다.

아래에 깔린 그는 무겁지도 않은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한 주임은 아주 느릿한 움직임으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탄탄한 팔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황자의 허리에 올라가 있던 무례하기 짝이 없는 다리도 슬그머니 내리고 마지막으로 상체를 뒤로 빼고 있는데, 순간 떨어져 나갔던 팔이 휙 허리를 끌어당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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