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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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의자 하나를 번쩍 들고 와서는 이한율과 한 주임 사이에 뻔뻔하게 엉덩이를 들이밀어 앉았다.
오크 잔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놋쇠로 만든 술잔에 쪼르르 붉은 빛을 내는 투명한 액체가 따라졌다. 희미한 단내가 풍겨오자 호기심 어린 이목이 쏠렸다.
어느새 다른 의자를 가져오며 하랑이 은근슬쩍 끼어들어 작당 모의라도 하는 악당처럼 음산하게 웃었다.
“기온이 낮은 탓에 포도 수확량이 많지 않으니 수도원에서 봉밀주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던 게 이제는 북부 특산물이 됐죠. 아주 독하니 물이나 우유에 타서 조금씩 마셔 보세요.”
그가 품속에서 덥힌 양젖이 담긴 병을 꺼내며 재잘거리자 한 주임은 다른 테이블에도 같은 모양의 술병들이 즐비한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술판의 시작이었다.
이곳은 깨끗한 식수가 모자라 과실주나 에일을 물처럼 마셔대는 세계였고 그만큼 어딜 가나 크고 작은 양조공장들이 꼭 있었다.
사원들은 부족한 운영비를 포도주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충당하고 있었기에 사제들이 예배보다 술을 만들어 파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한 주임은 이미 저쪽에서 엎어져 있는 운영팀 사람들을 보다가 놋쇠에 담긴 영롱한 밀주를 쭉 들이켰다.
밀주는 달콤한 향과는 반대로 맛은 그다지 달지 않았고 목이 화끈거릴 만큼 독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스트레이트로 즐겼던 그녀와는 달리 물에 희석해서 마시던 사람들도 하나둘 녹다운을 시작했다.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한 테이블에 모여 기어이 결판을 내고 있던 참이었다.
야닉, 스캄, 이한율, 한 주임, 무명의 수습기사 한 명.
살아남은 최후의 5인이 잔 하나를 돌려 가며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기사단 내에서도 술 잘 마시기로 이름난 기사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웅얼거렸다.
“황자니므은 마시는 척하면서 몰래 버린 거 아임까…? 왜 혼자 멀쩡한 검미까…?”
기사가 제 차례로 온 술잔을 힘겹게 들이켜며 야닉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글쎄. 타고나서?”
그가 술잔을 채워 가볍게 비워 내고는 스캄에게 무심히 타자를 넘겼다.
‘타고난 것 좋아하네. 대장은 마력으로 술기운을 모두 날려 버리고 있다고. 이건 반칙이지.’
스캄이 두툼한 손을 부들거리며 술잔을 얼굴에 반이 넘게 쏟아 간신히 삼켰다.
분한 마음을 담아 죄 없는 이한율이 마실 잔에 넘칠 때까지 한가득 담아주자 목까지 새빨개진 그가 움찔거렸다.
“주임님은… 괜찮으세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려고 옆자리에 앉은 한 주임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녀는 로브 단추를 하나 풀며 배시시 웃었다.
“조금 더운 것 말고는 괜찮은 것 같은데….”
하얀 얼굴 위로 광대 부근에 홍조가 피었다.
가느다란 목선 아래 쇄골이 슬쩍 비치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기사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그녀를 기웃거렸다.
그가 이한율더러 어서 마시라 하면서 집요한 눈길을 거두지 않을 때쯤, 야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일어나지. 스캄, 호아킨 경을 숙소로 모셔라.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승부가 아직인데 왜…….”
스캄이 야닉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기사의 눈이 닿아 있는 곳을 보더니 술이 확 깬 듯 벌떡 일어나 기사의 팔을 거칠게 끌어올렸다.
“가자고, 귀족 양반.”
질질 끌려가는 기사를 보던 야닉은 이번엔 이한율에게 명령했다.
“그대는 저기 쓰러진 동료들을 챙겨. 한 주임은 나와 함께 일어나지.”
이한율이 발끈해서 따라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바닥에 쿠당탕 엎어졌다.
꽤 큰 소리에 잠들었던 이들이 몇 명 움찔거리자, 놀란 한 주임이 넘어진 이한율을 일으키려다 멈칫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쳐다봤다. 야닉은 넘어진 이한율 따위는 조금도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어서 제 손을 잡으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어차피 혼자선 이한율을 부축하긴 어려울 것도 같고….
한 주임은 빠르게 합리화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뜨끈한 온기에 술기운이 갑자기 오르는지 얼굴에 열감이 퍼진다.
그녀는 야닉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와 찬 공기에 상쾌함을 느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흐읍, 하아!”
“왜 바지를 안 입었지?”
야닉이 대뜸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걸을 때마다 로브 사이로 힐끗힐끗 드러나는 그녀의 맨다리를 모른 척하려다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이 겨울에 로브 한 장만 두르고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곳에서 살랑살랑 돌아다니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일 년 내내 더운 나라가 아니고서야 제국에서 여인이 몸을 드러내고 다닌다는 건 자신이 거리의 여인이라는 걸 홍보하는 꼴이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이 같은 인식은 교단에서 긴 시간에 걸쳐 널리 퍼뜨려 정착됐다. 과년한 여성이 속살을 드러내면 돈이 필요하단 표시고, 결혼한 여성이 머리카락을 드러내면 문란하다는 방증이니 돌을 던지라 했다.
후자는 시대가 바뀌면서 옛 문화가 되었지만, 전자는 아직도 만연한 풍조였다.
물론 궁에서만 지낸 이방인이니 그런 문화를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야닉이 의아한 것은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한 주임이라는데 있었다.
‘다른 이방인이면 몰라도, 그녀가 저러면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공 대리를 피해 중정으로 도망치고 식당 안에서 기사들의 시선이 쏠리자 새파랗게 질려서 파르르 떨던 사람이었다.
바지를 입지 않은 이유가 다른 이방인들처럼 ‘그냥’이라거나 ‘내 마음’일 리가 없다.
“아. 옷을 전부 세탁 맡겨서요.”
그러면 그렇지. 야닉은 돌아오는 답변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동시에 이번 기회에 소환당한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려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밀려들었다.
본인이 뚝 떨어진 곳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마물보다는 미개한 남자들을 더 조심해야 한다. 마을에 오자마자 경계심이 풀어진 게 분명했다.
기사를 제외한 모두가 쓰러졌으면 한 주임은 어쩌면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야닉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가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대고 매혹적인 눈빛을 보내며 노골적으로 물었다.
“그럼 이제… 내 방으로 갈까?”
그랑드콜에서 이 시간에 여관엘 간다면 아무리 무디다 해도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말로 조심하라고 하는 것보다도 확실한 방법이 있기에 그는 주저 없이 한 주임을 안으로 이끌었다.
“여자 직원들을 데리고 식당에 있는 숙녀들을 방으로 모셔라. 문 앞마다 경비도 세워 놔. 3층 근처에 남자는 얼씬도 못 하게 하도록 하고.”
입구에 대기하던 여관 사병에게 은화 한 개를 건네며 그가 엄중히 지시했다.
듬직한 체구의 사병이 절도 있게 대답하고 사라지자 야닉이 빠른 걸음으로 층계를 올랐다.
한 주임은 그를 따라 계단을 오르다가, 곳곳에서 들려오는 투숙객들의 목소리에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몸을 굳혔다.
알딸딸하게 올라왔던 술기운이 단번에 휘발되어 날아갔다.
“잠깐, 잠깐만요. 야닉 님, 야닉!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그녀는 말을 고를 새도 없이 튀어나오는 대로 내뱉으며 야닉의 팔을 동아줄처럼 붙잡았다.
그런데 정작 야닉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저 멀리 어슴푸레한 복도에서 한 쌍의 남녀가 벽에 기대 뱀처럼 얽혀 있는 것을 보고 한 주임은 3층으로 냅다 뛰어 올라갔다.
야닉은 느긋한 걸음으로 따라 올라오며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어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랑드콜은 거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외지인과 용병들이 머무는 곳이지. 고된 여행을 마치고 쉴 수 있는 곳에 도착한 남자들이 밤에는 과연 무얼 할까.”
그가 얼어 있는 한 주임에게 바싹 다가와 귓가에 위험하게 속삭였다.
“그대같이 아름다운 여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먹힐걸.”
물론 내가 머무는 곳까지 감히 쳐들어와 사고를 칠 간 큰 놈은 없겠지만 궁에서 따라온 얼뜨기들은 또 모르지.
그는 이한율 말고도 난잡한 시선으로 한 주임을 보던 기사들 몇 명의 얼굴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그녀가 분신처럼 허리춤에 두른 검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댔지만, 목소리에 자신감은 실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야닉은 퉁명스레 그녀를 지나쳐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 주임은 홀로 복도에 남겨져 불안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다가 얼른 방으로 돌아가 문에 달린 걸쇠를 요란하게 잠갔다.
다행인 것은 야닉의 방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점이었으나, 그것 말고 안심할 건덕지는 하나도 없었다.
가방에서 칫솔을 꺼내 거칠게 이를 문지르며 그녀는 혹시 몰라 창문이 꼼꼼하게 닫혀 있는지 확인하고 출입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불안함이 끝도 없이 치솟았다.
천천히 걸어가 한 손으로 손잡이를 앞뒤로 흔들자 걸쇠가 덜그럭거리며 마구 흔들렸다.
고리 형으로 달린 쇠붙이에 단순하게 꽂혀 있는 막대기는 누군가 마음먹고 문틈으로 꼬챙이를 넣으면 손쉽게 위로 빠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런 고생도 필요 없이 세게 걷어차기만 해도 떨어져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협탁 위에 있는 물병을 들어 입 안을 헹구고 로브를 벗어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편히 눕지도 못하고 품에 있는 롱소드를 목숨처럼 껴안았다. 겁 없던 성격은 밖에서 들려오는 술 취한 남자들의 걸걸한 목소리와 발자국이 가까워질 때마다 꺼져 가는 불씨처럼 사그라들었다.
저벅… 저벅….
무게감이 실린 발소리가 문 앞에 뚝 멈춰 섰다.
그녀는 온몸의 피가 증발한 듯 질린 얼굴로 손마디가 하얗게 되는 줄도 모르고 검을 꽉 움켜쥐었다.
문 틈새로 새어 들어온 빛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그녀는 아까 야닉이 사병에게 경비를 서라고 한 것도 그만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림자는 언제라도 문을 부수고 쳐들어올 것처럼 앞을 서성거렸다.
이윽고 호기심 어린 하얀 눈동자가 문틈으로 드러나자 한 주임은 그만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야, 야닉…. 야닉!”
다음 상황을 그녀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어디선가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났고 동시에 방 안을 기웃거리던 눈동자가 사라지면서 퍽! 하는 묵직한 타격음에 바닥이 크게 울렸다.
불안하게 덜컹거리던 문은 남자의 어깻짓 한 번에 맥없이 활짝 열렸다. 걸쇠는 벌써 저만치 날아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