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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29화 (29/155)

29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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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닉은 침대 위에서 달달 떨고 있는 한 주임을 보고는 방 안에 다른 자가 없는지 확인한 뒤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경비를 서랬지, 누가 훔쳐보랬나?”

“죄, 죄송….”

옆구리를 걷어차인 남자가 금이 간 것 같은 갈비뼈를 움켜쥐며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돌연 큰 소리가 나자 아래층에서 롬이 후다닥 뛰어 올라왔다.

“야닉 님, 이게 무슨…….”

그가 망연한 얼굴로 두리번거리자 야닉이 조그맣게 욕설을 내뱉으며 한 주임의 방문을 닫았다.

“내가 없던 사이에 투숙객의 방을 들여다보는 사병을 들였군, 롬.”

시리도록 서늘한 음성에 롬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고 방을 지키고 있던 다른 사병들에게 빨리 데리고 내려가라는 손짓을 했다.

힐끔대던 이들이 쓰러진 동료를 부축해 아래로 내려가자 롬이 곧바로 비굴한 얼굴을 하며 자비를 구했다.

“내일 당장 모든 문을 수리하고 사병들을 교체하겠습니다. 이 녀석들이 이방인분들을 처음 봐서 그런지 그만 호기심이 든 모양….”

타오르는 불꽃 같은 눈동자에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는 허리만 굽실거렸다.

위압감만으로도 온몸이 잿더미가 되는 기분이었다. 아니, 눈앞의 남자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사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살의를 거두는 대신 비수 같은 협박을 읊었다.

“몰튼 백작이 이만한 규모의 여관을 보면 세금을 얼마나 매길지 궁금해지는데, 그대는 안 그런가? 언제든 말만 해. 백작령의 재무관들이 한달음에 달려올 테니.”

“그, 그것만은 제발 참아 주십쇼….”

롬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백작의 저택이 있는 영지에서 나고 자란 그가 뼛속까지 착취당하던 농노 부모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야닉은 화를 억누르며 가 보라고 대강 손짓한 뒤 조심스레 방문에 대고 노크했다. 조급한 마음에 멋대로 문을 열지 않도록 그는 숨을 고르며 인내해야 했다.

“나야. 들어가도 돼?”

“…….”

안쪽에선 대답이 없었다. 그는 이번엔 달래는 어투로 불렀다.

“제인.”

처음으로 부르는 그녀의 이름에 조금 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멍한 얼굴의 한 주임이 롱소드를 품에 안고 서 있었다.

“문고리가… 부서졌어요.”

“내가 그랬어. 누가 들어갔을까 봐.”

“아…….”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가 보였다.

아까 열린 틈으로 자신을 봤을 텐데 그것조차도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야닉은 짧게 숨을 뱉고는 그녀에게서 검을 가져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검집에 도로 넣었다.

“이리 와.”

그가 손을 내밀자 한 주임은 제자리에 멀거니 서 있다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상한 사람이면 제압하려고 했는데 야닉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아, 차장님이랑 유정 씨는 괜찮은가….”

그녀가 횡설수설하며 두리번거렸다.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 야닉이 힘주어 잡으며 제 방으로 데려갔다.

“괜찮아, 아무도 못 오게 했어. 진정해. 그대 아직 술이 덜 깼어.”

문을 닫고 침대에 앉혀 물을 건네자 얌전히 받아 마시는 모습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검을 들고 다른 이들을 걱정하는 모습이라니. 정말이지, 이런 여자는 본 적이 없다.

잠시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그녀를 눕히고 방 안에 마력을 약간 흘려 온도를 높였다. 혼자 있을 때야 추울 일이 없으니 장작도 안 때고 있던 방 안에 금세 훈기가 돌았다.

그는 열기가 오르는 몸에서 블리오를 벗어 대충 던져 놓고 그녀의 옆에 누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잘못했어.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이만 자.”

그 말이 주문처럼 한 주임의 머릿속에 울렸다.

이 남자가 아무 짓도 안 한다고 하면 정말 그럴 것 같은 안도감이 든다. 목소리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처럼 신기하게 차분해지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처음 같이 자는 것도 아니고 그는 결혼도 했다고 했으니…….

‘맞아, 부인이 있었지.’

그녀는 잠식되어 가는 의식 속에서도 희미한 죄책감을 느끼며 까무룩 눈을 감았다.

* * *

‘왜 자꾸 이렇게 되는 걸까.’

한 주임은 잠에서 깨자마자 손바닥에 느껴지는 탄탄한 가슴팍에 차마 눈도 못 뜨고 주먹만 불끈 쥐었다.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올라탄 것이 아니라 그의 팔을 베고 있다는 점 정도?

다행히도 떡하니 걸친 팔다리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동안 야닉은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머리를 들어 올려 겨우 침대에 걸터앉았다. 협탁에 손을 뻗어 물을 마신 뒤 잠든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불현듯 어젯밤 일이 떠올라 애꿎은 머리카락만 잡아 뜯었다.

민망함과 자괴감이 사이좋게 몰려들었다.

‘지금까지 혼자서 잘해 왔잖아. 갑자기 왜 겁쟁이가 된 거야?’

모르는 사이에 그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진 게 분명했다.

누가 방을 엿보고 있었다고 냅다 그의 이름을 불러 댄 것만 봐도 그랬고, 따라오랬다고 넙죽 방까지 와서 늘어지게 잔 것만 해도 그랬다.

지금도 그렇다. 방이 춥다고 생각하자마자 옆에 누워 손을 잡을까 하는 얍삽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내 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껴입고 벽난로에 불을 지피면 될 일이다. 적어도 지금은 누군가에게 연인처럼 보일 필요는 없을 테니까….

‘황자님, 그리고 부인분. 죄송합니다.’

그녀는 먹먹한 눈으로 괜히 야닉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츠를 신고 밖으로 나가려다 얇은 옷차림이 신경 쓰여 바닥에 있던 그의 커다란 블리오를 툭툭 털어 뒤집어쓰듯 입었다.

‘…옷 입고 와서 돌려드릴게요.’

문 앞에 서서 걸쇠를 푸는 작업은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조심히 위로 올리다가 조그맣게 달각, 하는 소리가 났지만 무시하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문고리가 부서진 문을 밀고 들어가 짐을 챙겨 나와서는 박 차장의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숙취로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에게 대강 사정을 설명한 뒤 옷을 갈아입고 야닉의 옷을 돌려주려고 나갔는데 그의 방으로 사용인들이 줄줄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목욕물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보니 그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모르는 이들에게 그의 옷을 맡기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한 주임은 잠시 고민하다 걸음을 돌렸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김유정까지 포함해서 오늘 하루 주어진 자유 시간을 어떻게 쓸까 즐거운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결론적으로는 싱겁게도 운영팀 남자들을 데리고 시내 구경을 나가기로 했다.

“저는 용병단 분들이랑 있을게요.”

한 주임이 세탁을 마친 튜닉과 블리오를 겹쳐 입으며 말하자 김유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임님 관광 안 좋아하세요? 기회가 있을 때 둘러봐야죠. 저희가 여기에 언제 또 와 보겠어요!”

“승마를 배워 두고 싶어서.”

“그거야 아크만에 가서 실컷 배우면 되는걸….”

김유정이 아쉽다는 말투로 말렸지만 한 주임은 남은 일정 동안 마차가 멀쩡하게 있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오우거같이 커다란 마물이 또 나오지 말란 법도 없었고 마차가 또 망가지면 걷거나 남의 말을 얻어 타야 하는데, 꼭 야닉이 아니더라도 그런 폐는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제 몫까지 재밌게 구경하고 오세요. 사진을 못 찍어서 아쉽겠지만.”

그녀는 짐짓 장난스럽게 웃으며 허리에 파우치 벨트를 차고 로브를 입었다.

여관 앞에서 들떠있는 일행들을 배웅한 뒤에 한 주임은 스캄이나 하랑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 두 사람이 그나마 안면을 튼 상태니 말 타는 법을 부탁해 볼 심산이었다.

문득 콥스의 식당이 생각나서 들어갔더니 용병단 몇 명이 아침부터 에일을 들이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자 제법 마른 체격의 야인이 입을 크게 벌렸다.

“오, 신입 아니신가! 아침부터 술 한잔하러 왔나?”

그가 일어서자 한 주임의 시선이 절로 올라갔다. 야인들은 살집이 있든 없든 간에 평균적으로 모두 2m가 훌쩍 넘는 거한들이었다.

그녀는 위축되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스캄 님은 어디 계신가요? 잠깐 뵀으면 해서요.”

“부대장? 그 양반은 대장이랑 같이 대장간에 갔을걸. 불러다 줄까?”

한 주임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저기 혹시… 시간 있으시면 오늘 저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말 타는 법을 배웠으면 해서요. 마차가 또 망가질까 봐…….”

자신감 없이 흐려지는 뒷말에 그녀는 긴장된 숨을 들이켰다.

야인이 휘둥그레 눈을 뜨다가 회색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려운 부탁은 아닌데… 부대장 허락을 받아야 하나?”

“어차피 입단하면 배울 텐데 미리 배우는 건 괜찮지 않나?”

잠자코 듣고 있던 호두껍데기 같은 머리카락 색의 야인이 의문조로 동조하자 한 주임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부추겼다.

“미리 예습한다고 하면 더 좋아하실걸요?”

야인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얘습…?’ 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까짓거 괜찮겠지 뭐. 후드려 패기야 하겠어.”

그들은 한 주임과 함께 식당에서 나와 여관 마구간으로 향했다.

호리호리하고 얼굴이 길쭉한 잿빛 머리의 야인은 ‘티보’라고 했고 호두색 긴 머리를 틀어 올린 야인은 ‘고르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 주임은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며 이들의 이름을 외웠다.

마구간지기가 한쪽에서 수통을 벅벅 닦다가 달려와 말을 찾으러 오셨냐 묻자 티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방인 아가씨가 말 타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데 여관 말을 좀 빌릴 수 있겠소?”

이방인이라는 말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굽혔다.

“물론입니다! 이쪽에서 마음에 드는 놈을 골라 보시지요.”

안내를 받은 곳에는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듯한 여러 품종의 말들이 칸마다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르칸이 신중하게 둘러보며 한 주임의 체격과 말의 크기를 비교했다.

“키가 큰 편이라 딱히 암말이 아니어도 되겠는데?”

그가 암갈색의 윤기 나는 말을 가리키며 이놈이 어떻겠냐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요놈이 북부의 대표적인 말인데 다리가 굵고 털이 달려서 눈밭을 달리는 덴 제격이지. 힘도 좋고 말도 잘 듣거든.”

그녀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옆 칸의 날씬한 회색 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설명해 달라는 듯 고르칸을 쳐다보자 그는 여기 있는 말 전부를 설명해야 한다는 불길한 예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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