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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33화 (33/155)

33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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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자존심 때문에 섣부른 판단으로 기사를 둘이나 낙오시키다니, 거스 경이 장갑 낀 손이 아프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야닉은 손을 들어 다가온 하랑에게 한 주임의 말을 데려오라 명하고는 감정 없이 지시를 내렸다.

“입산 전에 말한 대로 낙오자는 찾지 않아. 운이 좋다면 살아 나와 요새로 오겠지. 우리는 즉시 귀환한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체력을 충분히 회복한 말 위로 올라탔다.

말이 있는 한 주임과 이한율을 제외한 운영팀은 트라야누스 용병단이 각각 한 명씩 제 말에 태워 달리기 시작했다.

귀환대는 쏟아지는 달빛으로 반짝거리는 언 땅을 달려 나갔다.

그때 스캄이 멀리 손가락을 가리키며 제 말에 태운 박 차장에게 소리쳤다.

“이보슈, 박 부인! 저어기 산 너머에 삐죽 솟은 성이 보이오?”

말 머리에 매달려 정신없이 흔들리던 박 차장이 퉁퉁 부은 눈을 힘겹게 떴다.

요새 반대편 멀찌감치에 그의 말대로 낮은 산봉우리 위로 툭 튀어나온 낡은 성 같은 게 보이긴 했다.

“저기가 바로 댁들의 스승인 포라킨 단장의 고향, 델피온 왕국이지! 그리고 우리 대장의 처가이기도 하고 말이야!”

스캄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모든 사람이 성을 쳐다봤다.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옆 나라의 본성은 생각보다 아크만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고, 미세먼지라고는 없는 깨끗한 공기 덕에 높게 솟은 성탑은 선명하기까지 했다.

‘야닉 부인의 나라.’

한 주임은 왠지 그 말이 콕 날아들어 명치에 따끔하게 박히는 기분이었다.

꼭 임자 있는 남자를 유혹한 몹쓸 여자가 된 것만 같았다. 애당초 연인행세를 가장한 것은 야닉이었건만, 죄책감은 왜 제 몫인지.

‘황실 기사들이 돌아가면 이 우스운 연극도 다 때려치우고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검술도 더 배우고, 다른 일도 찾아서 하고.’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퀴버를 더욱 힘차게 몰아 달렸다. 갑자기 기운이 솟아났는지 엉덩이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뒤따라오던 포라킨이 남아도는 마력을 써서 원격으로 회복마법을 걸어 주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20층짜리 빌딩만큼 높이 솟아 있는 두꺼운 회백색 방벽 중간중간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그 틈으로 귀환대를 발견한 감시병이 상아로 만든 커다란 올리판트를 부우우! 있는 힘껏 불었다.

“황자님이 돌아오셨다! 도개교를 내려라!”

방벽을 둘러싼 해자 위로 쇠사슬이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거대한 철문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선두를 달리던 야닉이 성문이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훌쩍 뛰어올라 안으로 들어서자 뒤를 이어 트라야누스 용병단이 우르르 진입했다.

그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잔뜩 흥분해서 앞다리를 들어 올리는 군마들을 달래며 관문 앞에 멈추어 섰다.

“대장님! 왜 이렇게 빨리 오셨습니까? 미네는, 아, 저기 오네요.”

느닷없이 야밤에 들이닥친 귀환대에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초소 숙소에서 뛰쳐나온 이는 선임 용병 브레고 엘다였다.

그는 양모 맨틀 아래로 털이 부숭부숭한 맨다리를 달달 떨며 아연한 얼굴로 물었다.

무장하고 있지 않았다고 대장에게 호되게 깨질 예정인지라 절로 이가 부딪혔다. 하지만 야닉은 그런 것 따윈 관심 없다는 듯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위병에게 고삐를 넘겨주고는 브레고 앞에 섰다.

그의 대장은 어딘가 멍청이 같은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브레고, 취발론을 하루도 안 걸려서 넘어왔다고 하면 믿어지나?”

“예? 농담도 말이 되는 걸로 하셔야죠, 대장님이 모조리 태우면서 일직선으로 넘어왔다 쳐도 그 산을 어떻게 하루 만에….”

브레고가 힐끗 황실기사단을 보며 말끝을 흐리자 야닉이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한 듯 짧게 웃었다.

“자세한 건 식사 후에 얘기하기로 하고, 본성으로 가지. 오늘은 위병들에게 경계를 맡기도록 해.”

말을 마친 야닉이 다시 헤바투스에 오르자 혼나기는커녕 제 차례였던 외벽 경계근무까지 면제받은 브레고가 바지를 입는 것도 까먹고 신나서는 마구간이 있는 사육장으로 달려 나갔다.

야닉은 귀환대가 모두 관문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뒤 여유 있게 말을 몰았다. 외방벽 관문에 밀집된 경비초소를 지나 드넓은 농경지 사이를 다시 긴 행렬이 지나갔다.

곳곳에 위치한 축사와 오두막들을 빠르게 둘러보며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서 달리다 보니 어느새 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내벽 앞이었다.

앞서 올리판트 소리를 들었던 위병이 문루에서 종을 울리자 굳게 닫혀 있던 아치형의 철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내벽의 안쪽은 마을이었다. 아니, 그보단 도시에 가깝다고 거스 경은 생각했다.

‘수도보다 화려한 줄은 몰랐는데.’

그는 저녁 시간이 훌쩍 넘었음에도 대낮처럼 밝은 거리와 수많은 인파에 체면도 잊고 멍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생전 처음 보는 외형의 석조 건물들 사이로 연등이 줄줄이 매달려 환하게 비추고 있는 풍경은, 그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봤던 어떤 도시들보다 이국적이고 활기가 넘쳤다.

귀환대를 향해 다가오는 영지민들 가운데엔 검은 머리의 이방인들이 섞여 있었다. 필시 그들이 만들어 낸 도시이리라, 거스 경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영지민들은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일찍 도착한 귀환대를 보고 놀란 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며칠이나 산속에서 노숙을 했을 법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말끔하게 도착한 것에 수군거리는 분위기였다가, 이내 도열 끝에 있는 용병단을 향해 여기저기 반가운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무리오! 수도에서 신붓감을 데려온다더니 그 운 나쁜 아가씨는 어딨는 거야?”

“티보 아저씨! 이번에는 어떤 마물을 잡았어요?”

영지민들 대다수가 용병단과 안면이 있는 것도 모자라 친근하게 말을 걸며 몰려들자 그들과 대화를 섞느라 이동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때 검은 머리의 남녀가 운영팀에게 과격하게 손을 흔들며 저기요! 저기요! 소리쳤다.

별세계에 온 것처럼 도시를 둘러보던 운영팀의 눈이 그들에게 몰렸다.

“저희는 4년 전에 인천에서 왔어요!”

그들은 겨울에 소환되었는지 누가 봐도 한국인다운 롱패딩을 입고 자리에서 방방 뛰어오르며 말을 걸고 있었다.

“지웅 님, 상아 님, 나중에요!”

하랑이 말리며 본성을 향해 손가락질하자 커플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자신들 이후로 처음 보는 소환자에 반짝거리는 시선을 끝까지 거두지 않았다.

그들 뒤로 호위로 보이는 병사 두 명이 가벼운 무장을 한 채 야닉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한 주임은 드라마나 영화로만 봤었던 근대의 경성과도 비슷해 보이는 건축물들 사이를 지나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는 비탈길로 퀴버를 천천히 몰아 올라갔다.

도시와는 다르게 커다란 횃불이 가로등처럼 이어진 오르막길은 편편한 포석이 끝도 없이 깔려 있었다.

포치 한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좁은 폭으로 굽이친 산길은 적들의 공세를 막기에 최적화된 방어시설처럼 보였다. 국경 지역의 요새답게 바위산에 지어진 오래된 고성이 방증하는 것이었다.

포장된 도로를 오르면 오를수록 아래로 도시의 광활한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늘 위로 끝없이 솟아 있는 뾰족한 첨탑들 아래 휘황찬란한 타운과 내성 밖으로 펼쳐진 엄청난 규모의 농경지, 그리고 이 모든 성채 전체를 아우르는 높고 견고한 외방벽까지.

거대한 원형을 그리는 내성벽과 외방벽 사이에는 두 장벽을 잇는 다리가 다섯 갈래로 뻗어 있었다. 성벽 위 통로는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을 만큼이나 넓었고 다리가 만나는 지점마다 위병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토록 견고한 아크만 요새는 운영팀뿐만 아니라 황실기사단까지도 압도해 버렸다.

나름 정예구성원으로 꾸려진 기사들은 대다수가 20대였고 전원이 귀족이었으며, 기사의 명예를 그저 훈장처럼 여기는 속물들이었다.

그들은 전부 자신들의 가문을 위해 자의적, 타의적으로 입단한 도련님들이었기에 적당히 몇 년 경력을 쌓다가 은퇴해 편안한 생활을 즐길 예정이었다.

남부 휴양지는 가 봤어도, 북쪽으로 이렇게 멀리 나와 본 적은 당연하게도 처음이었다.

아마도 다음 이방인들이 소환되는 시점에는 자택이나 황실에서 놀고먹을 예정일 것이다. 4년 전에 이곳에 왔던 기사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의 기사단은 관광이라도 온 양 한껏 들떠 있었다.

한편, 기별도 없이 느닷없이 돌아온 주인 때문에 본성의 사용인들은 갑작스러운 손님맞이로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우왕좌왕하던 그들에게 노련한 집사장 루이자가 손뼉을 세 번 크게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식사 준비, 손님방 준비를 제외한 인원들은 모두 안뜰로 나가세요! 지금 당장!”

그녀의 노도와도 같은 호령에 백여 명의 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던 제빵사가 벌떡 일어나 밀가루 포대를 옮기고, 손님방으로 달려간 하녀들은 벽난로에 장작을 넣어 불씨를 지핀 뒤 부단하게 풀무를 밟아 댔다.

커다란 화구 위에 길게 늘어선 솥단지 위로 수도를 열자 바위산 계곡의 맑은 물이 콸콸 쏟아졌다.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용수로와 이를 성까지 연결하는 수도관은 몇 해 전 이방인들이 설치한 구조물이었다.

목욕물이 데워지는 동안 마구간지기와 조수들은 서둘러 여물통에 건초더미를 깔고 수통을 채웠고, 문루의 종소리를 들은 사제와 부제들이 늙은 신관을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지팡이까지 뺏긴 노신관은 그들에게 발이 거의 들리다시피 매달려 앓는 소리를 냈다.

귀환대가 성 입구의 마지막 흉벽을 지나 본성 안뜰까지 당도했을 땐 그곳은 이미 마중 나온 사람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완벽한 주인 맞이였다.

인파의 맨 앞에 서 있던 고위 신관 알리온이 지팡이를 짚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늙은이를 이 밤에 불러내다니 아주 고약하십니다.”

“주교님.”

야닉이 얼른 말에서 내려 다가가 허리를 숙이자 알리온은 오른손 엄지로 그의 이마와 가슴에 가볍게 성호를 긋고는 따스하게 웃어 주었다.

주교라는 호칭에 독실한 기사 몇 명이 말에서 뛰어내려 깍듯하게 예를 갖추는 동안, 집사장 루이자가 야닉에게 성큼 다가왔다.

“이틀 전에 그랑드콜에서 출발하신다는 전서구를 받았습니다만.”

“취발론의 파수꾼이 산을 안내했어. 나도 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녀는 제가 모르는 사이 5일이나 훌쩍 지나 버린 건가 하고 심각한 얼굴을 했다가, 모시는 분이 허풍 따위나 늘어놓는 성정은 아니었기에 그런 운 좋은 일이, 하는 표정으로 귀환대를 둘러보았다.

그때 두리번거리던 거스 경이 의아한 얼굴로 루이자에게 물었다.

“아크만의 영주, 로기아 후작께선 어디에 계시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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