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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34화 (34/155)

34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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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님께선 오늘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으셔서 아성에서 쉬고 계십니다.”

루이자가 본성의 서쪽 끄트머리에 암벽과 닿을 듯 붙어 있는 낡은 성을 가리키며 답변하자 거스 경이 티 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토록 눈부신 영지의 수장인 로기아 변경백이 머무는 곳이 고작 본성의 삼 분의 이도 안 되는 크기의 구석에 처박힌 아성(牙城)이라니. 그야말로 주객전도가 아닐 수 없었다.

3황자가 아무리 높은 신분이라고는 하나 어찌 됐든 간에 그는 변경백에 심신을 의탁하고 있는 손님이 아니던가.

떡하니 본성을 차지하고 있는 황자는 그야말로 뻔뻔스럽기 이를 데 없는 염치없는 자가 틀림없었다. 길지 않은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한 줌 쌓였던 신뢰감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루이자가 모를 리 없었으나 그녀는 가면 같은 얼굴로 공손히 희끄무레한 석재건물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본성 집사장인 루이자 호프만입니다. 제국의 수호자분들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어 있으니 게일의 안내를 받으시고 필요한 것은 언제든 그에게 요청하십시오.”

소개와 동시에 젊은 집사가 총알같이 튀어나와 깍듯하게 인사를 하더니 그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루이자는 황실기사단이 안뜰을 전부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에서 내린 운영팀에게 걸음을 옮겼다.

“사자님들은 본성의 손님방으로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1년간 머물면서 정착을 위한 교육과 훈련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자, 이쪽으로.”

그녀는 머릿속에 입력된 명령어를 수행하는 기계처럼 딱딱하고 단조로운 어조로 설명하고 있었다.

어딘가 포라킨과 비슷한 말투인 것 같으면서도 그보다도 훨씬 더 깐깐한 목소리에 연륜까지 얹혀 있어 주눅마저 들 정도였다.

운영팀은 처음 소환되었을 당시처럼 잔뜩 움츠러든 채 눈치만 살폈다.

“방에 가서 짐 풀고 쉬고 있어. 식사가 준비되면 하인들이 부를 테니.”

야닉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집사장과 대조되어 유난히 상냥하게 느껴졌다.

용병들은 어느새 자신들의 숙소를 향해 말을 몰며 저만치 사라지고 있었다. 부대에 남아 있던 동료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한 보따리인지라 체력이 남아도는 그들은 한껏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곧이어 야닉과 브레고도 그들을 따라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걷어찼다. 자리를 비운 사이 보고 받아야 할 영지 업무가 아마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었다.

장원의 안뜰을 지나 본성 계단을 오른 운영팀은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문에 놀란 것도 잠시, 황제의 궁 못지않게 화려한 본성 내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은실 자수가 새겨진 푸른 융단이 메인 홀을 가로질러 중앙 계단까지 장황하게 깔려 있었고, 족히 100평은 되어 보이는 바닥 전체에 깔린 대리석은 곳곳에 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 빛을 반사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벽에는 희고 파란 휘장들이 교차로 기다랗게 걸려 있었는데 아크만의 문장인 다섯 개의 첨탑과 트라야누스의 상징인 설원 늑대 문장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휘장 사이사이 수백 개의 밀랍 초들이 홀을 한가득 밝혔다.

홀 안에는 밖에 나와 있던 사용인 수만큼 많은 사람이 나란히 서서 신의 사자들에게 동시에 허리를 굽혀왔다.

여인들은 모두 흰 베일로 머리와 목을 감싼 채 단정하고 깍듯했으며,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들이 고르게 뒤섞여 있었다. 가장무도회 같은 복장의 황궁 사용인들과는 영 딴판이었던 것이다.

루이자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같이 꾸벅거리고 있는 운영팀을 중앙 계단 위로 안내했다.

“1층은 연회장과 휴게실, 응접실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가장 큰 문이 연회장인데, 로엘 왕국과 델피온 왕국에서 사절단이 오면 저곳에서 성대한 연회를 엽니다. 두 나라와 아크만은 인접해 있어서 최근 몇 년간 교류가 잦았지요. 안타깝게도 자국의 귀족들이 이곳까지 온 경우는 제가 이곳에 온 20년 동안 다섯 번이 채 안 됩니다. 아시겠지만 귀한 분들이 자주 방문해 주실 만큼 안전한 길은 아니니까요.”

그녀의 말에 운영팀은 온갖 괴물들을 마주쳤던 여정을 떠올리며 격하게 공감했다. 연회 한번 참석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여행길에 오르는 귀족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예전엔 동북부 지방의 제후들이 전령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만, 취발론 산을 넘다가 실종되는 일들이 많아 이제는 거의 모든 용건은 전서구를 통해서만 주고받고 있습니다.”

“완전히 고립된 곳이나 다름없었네요?”

박 차장이 툭 뱉은 말에 루이자가 긍정하며 계속 층계를 올라갔다.

“실제로 20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고대의 낡은 유적지에 불과했답니다. 오웬 1세께서 이방인 소환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이끌어 버려져 있던 아크만을 다시 복구하기 시작한 것이죠. 가신이었던 로기아 가문에 후작위를 하사하시고 이곳을 봉토로 내리신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한 주임은 이한율이 마탑에서 브리핑했던 내용을 반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크만은 오웬 1세의 유물 복원정책 과정에서 되살아난 영지였던 것이다.

루이자는 2층에 다다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호두나무 목재로 유려하게 조각된 문이 커다란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는 외빈들을 위한 방들이었으나, 남쪽의 순례자 숙소를 귀빈용으로 보수해서 지금은 사자님들의 임시거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당분간 머무실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위층에는 뭐가 있나요? 밖에서 보니 다른 성들보다 훨씬 높던데!”

김유정이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을 반짝이며 묻자 루이자는 조금 단호한 어조로 주의를 주었다.

“3층은 황자님의 침실과 집무실, 세레나 공주님의 규방이 있습니다. 허락 없이 올라가시는 건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위로는 도서관이 있는데 이곳 역시 출입을 금합니다. 반드시 명심해 주세요.”

운영팀은 도서관보다 그 앞에 들린 ‘세레나 공주님’이라는 말에 집중도를 끌어 올렸다.

김유정이 참지 않고 공주님이요? 하고 콕 집어 반문하자 루이자는 담담히 답했다.

“황자님의 부인을 공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국혼 전에는 델피온의 왕녀셨고요.”

* * *

한 주임은 황궁에서 지냈던 곳보다 두 배는 더 큰 방을 둘러보며 생각보다 방 안이 따뜻하다는 느낌에 두리번거렸다.

벽난로가 있긴 했어도 공간 전체를 데우는 데는 무리가 있어 보였는데, 침실에 의외의 장치가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라디에이터?”

그녀는 아주 어릴 적에 본 적이 있던 모양의 난방 기구를 발견한 뒤 그것이 기다란 관을 통해 벽난로와 이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기존의 벽난로를 보일러 역할로 이용한 아주 영리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오래된 석성은 벽이 두껍고 무거워서 창문이 없거나 아주 조그만 것이 일반적인데, 그녀의 방에 달린 창문은 승용차 앞 유리만큼이나 커다랬고 게다가 아주 조금이지만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열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유리창은 궁의 것보다 투명했고 모서리가 빈틈없이 벽에 맞물려 찬바람이 스며들지도 않았다. 드레스룸의 거울도 어둡거나 일그러지지 않고 무척이나 깨끗하고 선명했다.

‘오… 이방인들이 많아서 그런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가방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주임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조금 뒤에 한 번 더 똑똑 울렸다. 그제야 깜짝 놀라 네! 하고 소리쳤다.

별궁에선 하녀들이 대충 노크하고 함부로 들어와서 그런지 출입에 허락을 구하는 모양새에 그녀는 아주 잠깐 야닉인 줄 착각했다.

열린 문 사이로는 야닉이 아닌 앳된 얼굴의 하녀가 들어왔다. 어두운 의복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명랑한 아가씨였다.

“사자님의 시중을 담당할 미엘라라고 합니다! 목욕 준비를 도와드려도 될까요?”

“아… 저는.”

또다시 목욕만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말하려던 찰나, 미엘라가 먼저 산뜻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데운 물과 갈아입으실 옷만 가져다드리고 나가겠습니다. 찬물은 세면대 옆에 있는 펌프를 끌어 올리면 언제든 이용하실 수 있답니다.”

그녀는 한 주임에게 손수 펌프질을 하는 법까지 알려 주고는 욕조에 적당한 양의 물을 받은 뒤 빠르게 방을 나갔다. 뭐가 지나간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 주임은 시험 삼아 길어 올린 물로 손을 닦고 욕실이 달린 방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본성은 전통적인 외관과는 달리, 내부 이곳저곳에 이방인의 손길이 닿아 있는 모양이었다.

가방에서 세면도구를 꺼내 욕실로 가져다 놓고 조금 기다리자 한가득 김이 올라오는 물동이들을 들고 미엘라와 다른 하녀가 나란히 들어와 욕조에 부어 주었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 종을 울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모두 나가자 넓은 방에는 한 주임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녀는 가림판을 두르고 두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욕조에 앉아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설렘 속에서 물장구를 쳤다.

‘이제 여기서 사는 거야. 잘할 수 있을 거야. 잘할 수 있어.’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는 곳. 어찌 보면 세 번째 인생.

비록 마력을 받아 가며 근근이 연명해야 하는 삶일지라도 늘 어딘가 불안에 떨었던 한국과는 다르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했다.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을 만큼.

차라리 그렇게 되어서 우리 팀 사람들만이라도 그리운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되면 좋으련만.

“…가족.”

한집에서 함께 사는 것이 가족이라면 보육원 사람들이 내 가족이 되는 걸까? 그녀는 곧 머리를 흔들며 부정했다.

‘한국에서 날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어.’

그러다 문득 한 주임은 집사장이 언급했던 야닉의 부인이 생각났다.

* * *

“세레나 공주님이요? 실종되신 지 벌써… 4년이 넘었네요. 곧 5년인가?”

연수를 헤아리면서 미엘라가 선뜻 내뱉은 말에 한 주임이 물을 마시다가 캑캑거렸다.

“어머, 괜찮으세요? 놀라운 일이기는 하죠?”

목욕 후 옷을 가져다준 미엘라에게 넌지시 물어본 것인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 발언이 날아오는 바람에 한 주임이 더 당황했다.

미엘라는 벌써부터 가물거리는 먼 과거를 이야기하듯 눈을 한껏 위로 치켜떴다.

“그러니까, 5년 전쯤에 직조실 도제였던 제가 하녀로 진급하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결혼하셨을 거예요. 친선을 위한 국혼인데도 너무 조촐했어서 아직도 기억이 나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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