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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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듣는 것뿐인데 괜히 긴장이 된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게 물인지 침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그때는 야닉 님이 정말 필사적으로 근방 토벌을 하셨거든요? 신부를 데리고 오는 길에 마물 습격이라도 받으면 제국의 체면이 말이 아닐 테니까요. 토벌하랴 성 보수하랴 난리도 아니었어요. 게다가 델피온에서 보낸 지참금은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대요. 어쩔 수 없이 결혼식도 우리 사원에서 단출하게 올렸더랬죠. 황실에서도 2황자님 한 분만 달랑 오셨고요.”
그녀는 별거 아닌 내용인 것처럼 재잘댔으나 한 주임은 귀를 쫑긋 세우며 경청했다.
그의 결혼 스토리가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운이 좋았다. 미엘라는 수다 떠는 것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세레나 공주님이 곧바로 아기님을 가지셨는데 산달이 얼마 안 남았을 때 야닉 님이 황궁으로 불려 가셨어요. 이방, 아니 사자님들을 모시러 가셨거든요. 그런데 야닉 님이 안 계신 사이에 공주님이 갑자기 사라지신 거예요. 정말 말 그대로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뿅! 하고 말이에요.”
한 주임이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미엘라를 계속 쳐다보자 그녀는 어깨를 한번 추켜올렸다.
“그게 끝이에요. 우리 황자님처럼 지고지순하신 분도 없을걸요? 그러니까 다른 결혼도 하지 않고 공주님이 쓰던 규방까지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시는 거죠. 지금도 가끔 혼자 그 방에 들어갔다 나오시는 걸 못 본 하녀가 없을 정도라니까요. 아직도 공주님을 못 잊으시나 봐요.”
“…….”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연인행세를 할 때면 한없이 가벼워 보였던 그는, 사라진 부인을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있는 무척이나 불쌍한 남자였다.
동시에 그런 사랑을 받는 세레나 공주가 궁금했다. 아이까지 가진 공주가 갑자기 왜, 어디로 사라졌을까?
“공주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지극히 사심이 담긴 질문에 미엘라가 약간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굴리다가 ‘상관없나.’ 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술술 불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마디부터가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그분이 여기 와서 쓴 돈만 해도 작은 나라를 세울 정도였을 거예요.”
그녀는 떠올리기만 해도 넌더리가 난다는 듯 치를 떨었다.
“그분을 모셨던 하녀가 제 순서가 오기까지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몇 명이나 갈아치워졌는지 아시면 경악하실걸요? 자세히는 몰라도 위로금이랑 퇴직금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썼을 거예요. 공주님은 목숨이라도 살려 줬으면 고마워해야지, 무슨 돈까지 쥐여 주냐 난리셨고요.”
미엘라의 말속에는 ‘이참에 당신도 잘 알고 있어라.’ 하는 의중이 은근슬쩍 담겨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본격적으로 전 주인을 탈탈 털었다.
“배가 불러 올수록 변덕이 심해져서는 멀쩡한 바닥을 다 갈아엎어서 값비싼 푸른색 대리석으로 바꾸라 하질 않나, 융단이 싸구려라 속이 안 좋다고 하질 않나, 제가 장담하건대 가난한 델피온에서는 구경도 못 해 봤을 품질이었을걸요?”
이번에는 어깨를 움츠리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거기다가 야닉 님이 영지 시찰을 나갔다 오시는 날에는 3층에 아무도 발을 못 들일 정도로 소란을 피우셨답니다. 밖에서 애인을 만나고 온 거 아니냐고 패악을 부리시면서요. 야닉 님은 지금 그런 분을 기다리고 계신 거예요.”
충격 발언의 연속이라 한 주임은 뭐라 입을 열지도 못하고 멍한 얼굴로 미엘라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야닉이 불쌍해서 눈앞에 있으면 등이라도 토닥여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얼마나 사랑을 하면 그런 것까지 포용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가 연극을 떠나서도 다정한 성격인 것은 어림짐작할 수 있었지만, 호구도 이런 호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마도 헌신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야닉이 나보다 더한 호구였다니.’
그녀는 김유정이 언젠가 자신에게 한참 철 지난 스마트폰을 백만 원이나 주고 샀냐며 호갱이 여기 있었네! 하고 분통을 터뜨렸던 때를 기점으로 스스로 호구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엘라는 이제 잔뜩 흥이 올라서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늘어놓고 있었다.
“아름다우시기라도 했으면 아, 우리 황자님은 얼굴에 약하시구나! 했을 텐데, 공주님은 누가 봐도.”
“아, 잠깐 그건.”
한 주임이 말릴 틈도 없이 미엘라는 품평을 했다.
“시대의 미인상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한마디로 박색이었단 말이에요.”
“이제 그만 밥 먹으러 가요, 미엘라. 말해 줘서 고마워요.”
불편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맹세코 그런 것까지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형편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미엘라도 괜히 내가 부추겨서 안 해도 될 말까지 말실수를 한 것이리라, 가슴 언저리가 죄책감으로 따끔거렸다.
미엘라도 본인이 조금 심했다 싶었는지 무안하게 인중을 긁다가 따라 일어났다.
“내 정신 좀 봐! 다들 기다리고 계시겠어요. 식당으로 모실게요!”
* * *
“가급적이면 이른 시일 내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실종된 렉토 경과 아레스 경이 구조를 요청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거스 경이 테이블 맨 끝에서 교양 없이 식사 중인 용병단을 보다가 스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야닉은 잠시 생각하는 듯 포도주를 든 손을 멈추었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넘어오지 못했으니 길잡이가 필요하겠군. 취발론을 넘을 때까지만 하랑을 붙여 주지.”
“예? 저요?”
용병단 옆에서 닭 다리를 뜯던 하랑이 울상을 지으며 벌떡 일어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스캄이 킬킬거렸다.
“네놈이라면 드래곤 둥지 한가운데 떨어뜨려 놔도 멀쩡히 살아 나올 테니 말이야.”
“암만 저 녀석이래도 드래곤이면 팔다리 중에 하나쯤은 버리고 나와야 할걸요?”
야인들이 쌤통이라는 표정으로 시시덕거렸지만 몇 칸 떨어져서 식사 중이던 기사들은 한껏 불쾌한 낯짝들이었다.
여행할 때야 상황이 그래서 겸상을 했다지만, 요새에 와서도 같은 자리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귀족인 그들에게 있어선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평민도 아니고 야생에서 살아가던 야만족들이 아니던가. 멀지도 않은 조부 세대였으면 이 자리에서 당장에 칼을 뽑아 들고 토벌을 해야 하는 족속들이었던 것이다.
“이봐. 조용히 밥이나 처먹지.”
기사 중 한 명이 사납게 노려보며 기어이 시비를 걸어오자 야인 중 한 명이 체! 하고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우리 아니었으면 오우거의 뱃속에서 굴러다녔을 놈들이 대가리가 영 빳빳하구만.”
“뭐야!”
기사가 곧바로 일어나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대자 그리즐리베어만 한 덩치들이 우르르 의자를 넘어뜨리며 따라 일어섰다.
“해보자는 거요, 도련님?”
티보가 커다란 손으로 테이블을 쾅! 치자 다른 기사들도 발끈해서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야닉과 거스, 스캄, 하랑. 네 사람만이 의자에 고요히 앉아 있었다.
“소란 피우지 말고 다들 앉으시게!”
거스 경이 매섭게 명령하는데도 두 무리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듯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결투를 신청하게 해 주십시오, 거스 경. 기사의 명예를 걸고 저 잡종의 목을 날려 버리겠습니다!”
“명예는 개뿔. 날아가는 건 비실비실한 네놈 모가지가 될 거다.”
맨 처음 시비를 걸었던 기사가 빠드득 이를 갈며 요청하자 기다렸다는 듯 야인이 응수했다.
“황자님, 사병단을 물려 주시죠. 그럼 저희도 그만하겠습니다.”
거스 경이 화를 억누르며 최대한 공손히 말했으나 야닉은 별일 아니라는 듯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하랑을 고른 건 저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야. 더 안전하게 넘어가려면 그대들이 노려보는 놈들을 데려가야 할걸.”
그러더니 싸늘하게 내려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다들 앉지, 좋은 말로 할 때. 곧 이방인들이 내려올 텐데 형편없는 모습을 보일 건가? 응? 티보. 말해 봐.”
“쳇…….”
저 감미로운 목소리의 경고를 무시했다간 지옥 같은 훈련이 기다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용병단이 재빨리 넘어진 의자들을 세우며 자리에 앉았다.
스캄 혼자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귀까지 새빨갛게 열이 오른 기사가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고는 털썩 앉았다.
하랑이 두 무리를 한심하다는 듯 번갈아 보다가 중얼거렸다.
“저는 산을 빠져나갈 수 있을 때까지만 동행할 거고요, 행여나 실종된 두 분을 수색하시려거든 제가 돌아간 다음에 해 주십쇼. 아직 결혼도 못 했는데 이 나이에 단명하긴 싫거든요.”
“아 참, 이번에 수도로 간다는 이방인은 몇 명이우?”
불쑥 튀어나온 스캄의 물음에 야닉은 4년의 임기를 채운 이방인들 가운데 사전에 손을 들었던 이들을 떠올렸다.
안전한 수도에서 가정을 꾸릴 계획이라던 젊은 남녀 한 쌍이었다.
“지웅 님과 상아 님 두 분이세요. 두 분 다 상급 마법을 쓸 줄 아시니까 도움이 되실 거예요. 전투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지만 실전 경험도 어느 정도 있으시고요.”
하랑은 아까운 전력이 빠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닭 다리를 문 채로 웅얼거렸다.
잘 구슬려서 아크만에 데리고 있으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야닉이 항상 미련 없이 이방인들을 수도로 보내는 것이 그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도 따위보다 우리 영지가 훨씬 더 발전했는데 말이다. 물론 수도보다야 살짝 더 춥고 영지 밖은 마물이 우글우글하지만….
“다들 벌써 식사하고 계셨네요?”
박 차장이 반갑게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뒤를 이어 운영팀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환기된 분위기에 하랑이 실실 웃었다. 운영팀은 온갖 음식들로 가득 찬 테이블을 보며 얼른 빈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야닉이 돌아보며 한 명이 비는 것을 보고 물었다.
“한 주임은?”
“가만 보니 주임님이 유난히 오래 씻으시더라고요. 금방 오겠죠, 뭐.”
김유정이 얼른 대꾸하고 제 접시에 잘게 저민 돼지고기를 덜어 와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조금 뒤 미엘라와 함께 한 주임이 들어오자 스캄이 제 옆에서 우걱거리던 야인을 바닥으로 가차 없이 밀쳐내고 주인 잃은 의자를 쿵쿵 쳐 댔다.
“신입! 이놈들이 다 처먹기 전에 빨리 와!”
“사람 차별합니까? 부대장!”
얼떨결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야인이 울상을 지으며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한 주임이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앉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식사는 또 다른 전쟁이라고. 용병들 사이에서 얼빠져 있으면 굶어 죽어.”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