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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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엘라는 일부러 화제를 피하는 한 주임을 향해 입을 한 보따리 내밀다가 포기하고 썰렁한 드레스룸에서 밋밋한 블리오를 꺼내와 내밀었다.
다른 이방인들은 세레나의 드레스들이 얼추 맞았기 때문에 공주의 옷들을 골고루 나눠 주어서 입을 게 많을 테지만, 한 주임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담한 세레나의 옷들은 그녀에게는 너무 작았다. 기장이 짧은 건 둘째치고 어깨부터가 안 들어갔다.
세레나는 늘 목과 어깨를 전부 가리고 소맷부리가 넓은 고전적인 형태의 드레스를 즐겨 입었는데, 임신 후 배가 나오는 것도 고려하지 않고 달마다 재단사를 불러 소재만 다른 비슷한 디자인으로 수십 벌씩 맞춰 댔다.
당연하게도 나중에 입으려고 꺼내면 불러 온 배 때문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때마다 그녀는 신경질을 부리면서 다시 재단사를 불렀다.
재단사가 왔을 때 지금 당장 입을 것만 맞추거나 아니면 배가 나와도 입을 수 있는 디자인으로 주문을 하면 될 법인데 세레나는 다음 달에 입을 옷까지 지금 치수로 미리 주문하곤 했다.
약삭빠른 재단사는 돈을 벌기 위해 기꺼이 그 멍청한 짓에 동참했고 거의 일 년 가까이 성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덕분에 성에는 세레나가 사들이고 입지 않은 드레스와 장신구들이 방 몇 개를 채울 정도로 넘쳐났다.
그녀가 실종된 지금은 야닉의 명에 따라 대부분 이방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중에 한 주임에게 맞는 옷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재단사가 허리띠 장식을 보여 주기 위해 샘플로 가져온 기본 형태의 심심한 블리오 몇 벌 정도, 그걸로 땡이다.
한 주임은 목둘레와 소맷부리에 봉제선만 나 있는 단출한 모직 블리오를 입고 허리에 검대를 둘렀다.
미엘라는 박 차장과 김유정에게 지급된 풍성하고 아름다운 총천연색 드레스들과 제 주인의 하얗고 밋밋한 기본 드레스를 비교했다.
넓은 드레스룸이 무안할 정도로 내부는 넉넉하다 못해 썰렁하기까지 했다.
황궁에서도 옷을 맞추지 않았는지 기본 형태의 튜닉 몇 벌과 바지들, 남성용 블리오가 어젯밤 미엘라가 정리했던 여장의 전부였다. 세레나의 드레스를 입지 못하니 처참할 정도로 옷이 없었다.
한 주임은 그런 미엘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울 앞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검대를 풀었다. 옷이 안 예뻐서 거울 앞을 서성인 게 아니라 검을 들고 나갈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던 것이다.
미엘라는 검대를 푸는 주인에게 대신 보석들이 박힌 허리띠라도 매자고 열을 올렸지만 한 주임은 무겁고 거추장스럽다며 거절했다.
제가 보기엔 검이 매달린 벨트가 훨씬 더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는데, 얼마 뒤에 있을 용병단 입단시험을 준비한다는 말에 미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아리따운 제 주인이 야닉 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미엘라는 음험하게 웃으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자고로 싸움 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남녀상열지사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그녀는 구경보다는 적극적으로 참견하는 타입이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가는데, 왠지 한 주임을 마주친 사용인들의 얼굴이 어딘가 오묘했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한 주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쑥덕거리고 있었다.
“미엘라가 그러는데 저분이 야닉 님의 교제 신청을 거절했대.”
“내가 듣기론 야닉 님이 무릎까지 꿇고 빌었다던데?”
“좀 아깝다. 우리한테 인사도 해 주시고 좋은 분 같던데 말이야.”
“두 분이 잘돼야 야닉 님이 공주님을 잊을 텐데.”
사용인들은 각자가 겪었던 세레나의 횡포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하루가 더 지난 다음엔 본성 너머 다른 구역까지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갈 것이라고는 지금의 한 주임으로선 까마득하게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곧 주방에서 나오고 있는 김유정과 맞닥뜨렸다.
“유정 씨, 벌써 다녀왔어?”
“주임님 굿모닝이요! 설레서 꼭두새벽부터 눈떴다니깐요. 일찌감치 주방 체크도 끝내 놨죠.”
그녀는 사용인들에게 부탁해 주방을 샅샅이 둘러보고는 절망감을 느꼈다며 성토를 해 댔다.
“우리가 옛날도 너무 옛날로 온 것 같아요. 없는 채소가 너무 많아요. 감자, 고구마, 옥수수, 토마토… 뭐 하나 있는 게 없어요!”
한 주임은 상세한 역사까지는 잘 몰라도 영상매체에서 접했던 외국 시대극을 보면 육류 위주의 식단이 대부분이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들에게 있어서 식탁에 고기가 빠져서는 식사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축 늘어진 김유정과 함께 들어선 식당에는 포라킨과 마법사들이 먼저 와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아 따끈한 흰 빵에 포도잼을 곁들인 간단한 식사를 즐겼다.
말린 허브를 우려낸 향긋한 차를 마시니 기분 좋은 포만감이 밀려들 때였다.
큰 소리를 내며 열린 문으로 밝은 갈색 머리의 쇼트커트를 한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야닉 보신 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하는 탓에 식당 안에 있던 모두의 이목을 끌었으나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몸짓으로 두리번거리다 훌쩍 나가 버렸다.
“루예요. 이방인 아버지와 이곳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끔찍한 말괄량이죠. 될 수 있으면 그녀 앞에선 황자님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
포라킨이 고개를 내저으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 * *
같은 날 오후, 자리를 비운 사이 영지에 도착한 서신들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손깍지를 낀 야닉이 가신들을 둘러보았다.
“로엘이 우리가 앞마당을 청소해 주니까 점점 기어오르는군. 수출 관세를 재논의하자, 라.”
“새로 즉위한 수아르 5세가 이제 겨우 스물다섯이랍니다. 정치 기반이 약하니 자금이라도 끌어모으겠다는 계획이겠죠.”
회의용 긴 테이블에 앉아 있던 영지 재무관이 뻔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무역 상인들이 쉽게 통행하라고 그 험한 길을 토벌하고 도로를 깔아 줬더니 유세는 본인들이 다 부리고 있잖습니까. 당장 항의 서신을 보내야 합니다.”
아크만 정예부대의 기사단장 로하겔 경이 이를 짓씹으며 분통을 터뜨렸으나, 재무관은 불가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로엘에서 들여오는 식료품이 한둘이 아니잖습니까. 당장에 거래가 끊기면 사실상 손해는 우리가 보게 됩니다. 아크만에 괴혈병이 사라진 지 십 년도 안 됐는데 먹을 수 있는 종류가 줄어들면 아직 공포를 기억하고 있는 영지민들이 아예 떠나려 할 수도 있어요.”
야닉은 잠시 생각하다 중년의 이방인 남성에게 물었다.
“농작물들은 좀 어때. 자네가 작년부터 시험해 보겠다는 것도 있었고 말이야.”
“역청을 먹인 모직을 밭 전체에 둘러서 온도를 높여 봤는데 땅이 얼어서 대부분 발아도 못 했네요. 과일 종류는 거의 실패고 곡물들만 그나마 좀 자랍니다. 여기 날씨가 농사짓기 좋은 환경은 아니잖아요.”
농부 출신인 이방인 남성은 안타깝다는 듯 토로했다.
수로를 끌어와서 물도 주고 비닐하우스 비슷하게도 만들어 봤지만, 남부의 비옥한 땅에 비하면 아크만의 흙은 너무나도 거칠고 단단했다.
여러 종류의 모종을 심고 나름대로 비료도 만들어서 뿌려도 영지민 전체가 먹을 수 있는 양을 수확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스캄이 엉뚱한 제안을 던져왔다.
“상인들 통행길에 마물을 옴팡 끌고 와서 몇 번 뒤집어 놓으면 세금이고 뭐고 쏙 들어가지 않겠수? 우리가 다시 토벌해 줄 테니 입 닥치라고 하고.”
“그 방법도 벌써 세 번인가 써먹었어. 그때마다 망가진 도로 복구에 큰돈을 썼고. 자네 벌써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그러게 술 좀 작작 마시라니까.”
스캄과 절친한 로하겔 경이 잔소리를 시작하자 야닉이 자리에서 일어나 루이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로엘에는 겨울 지나고 다시 얘기하자고 답신을 보내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모이지. 다들 간식이라도 먹고 와.”
그의 말에 집무실 안에 있던 각각의 영지 관리인들이 모두 나가자 집사장 루이자가 양피지에 회의내용을 정리하며 빠르게 손을 놀렸다.
야닉은 기다란 가죽 소파에 드러누워 손에 들린 다른 서신에 눈을 고정한 채 습관처럼 질문을 던졌다.
“로기아 후작은 뭐 하고 있지?”
“매일 비슷하십니다.”
“정신병은 치유마법으로도 고칠 수가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야.”
“자식을 잃어 본 적이 없어서 그분의 아픔에는 공감을 못 하겠습니다만, 영주님은 유독 심약하십니다. 본인의 위치를 좀 더 자각하실 필요가 있어요.”
야닉은 골치 아픈 내용이 한가득 적힌 양피지를 그대로 얼굴 위로 덮어 버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때 답신을 적어 내려가던 루이자가 문득 떠오른 듯 가볍게 물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뭐가?”
“황자님께서 어젯밤에 한 주임님이라고 하는 이방인분께 무릎 꿇고 청혼했다가 뺨까지 얻어맞았다는 소문이요.”
얼굴에서 서신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주울 생각도 않고 돌연 하하하 하고 소리까지 내가며 웃는다.
루이자가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흘겨봤다.
“무슨 무모한 짓을 벌이시는진 모르겠지만 저희가 아직까지 델피온에 매달 배상금을 주고 있다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영내에 드나드는 델피온 상인들이 소문을 듣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루이자는 이방인들이 시대를 앞서 발명한 안경을 끌어 올리며 쯧, 혀를 찼다.
좀 전까지 황자의 얼굴을 덮고 있던 두꺼운 양피지에도 관련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델피온에서 수색대를 꾸려 세레나 공주님을 직접 찾겠다고 그 비용을 전적으로 저희더러 대랍니다. 실종 배상금이 끊길까 봐 돌아가셨다는 공표도 안 하고 있는 뻔뻔한 왕족들인데, 황자님께 연인이 생겼다는 걸 알면 아마 난리가 날 겁니다. 델피온은 중혼이 금지된 나라니, 필요하다면 신성 재판까지 열어서 어마어마한 위자료를 청구할 테죠.”
“……세레나가 정말 죽었을까?”
“델피온에서 공주님을 감춰 놓고 실종 행세를 하는 거라면 또 모를까, 영지 밖에서 귀부인 혼자 4년이나 생존할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5년은 지나야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를 할 수 있으니 당분간은 자제 좀 부탁드립니다. 봄까지 몇 달 남지도 않았잖습니까.”
루이자의 불평에도 야닉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깜빡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른 듯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트라야누스 입단시험이 언제랬지? 그녀에게 방어구를 맞춰 줄 참인데.”
‘그녀’가 누굴 지칭하는지 뒤늦게 알아들은 루이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 뭘 들으신 겁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