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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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 아가씨들! 아크만 특산 시나몬과 생강, 아니스를 듬뿍 넣은 전통 포도주를 맛보세요! 물론 시식은 공짭니다!”
두 방벽 사이를 잇는 교량을 따라 길게 늘어선 좌판을 지나고 있을 때 한 상인이 운영팀을 향해 손을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기다란 터번을 머리와 목에 감싸고 치렁치렁한 블리오를 몇 겹이나 껴입은 상인은 점토 항아리에 담긴 기다란 놋쇠 국자를 휘휘 저어 납작한 접시 위에 따르며 손을 내밀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시음을 권하자 가까이 서 있던 한 주임이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고개를 슬쩍 돌려 운영팀과 동행하고 있던 위병 둘을 쳐다봤더니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고는 마셔도 괜찮다는 고갯짓을 한다.
씰룩거리는 입매가 좀 미심쩍었지만 한 주임은 접시에 입술을 대고 검붉은 액체를 아주 살짝 마셨다.
적은 양이었는데도 포도주는 굉장히 맵고 쓴 맛이 났다. 코가 뻥 뚫리는 알싸함이 확 퍼진 다음에는 끝맛으로 미미한 단내가 올라오는 것이었다.
한 주임은 상인이 무안할까 봐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김유정에게 접시를 넘겼다.
“이거 약간….”
언질을 주려는 찰나 김유정이 꿀꺽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들이켰다.
“푸학!”
김유정이 입 안에 남아 있던 포도주를 스프링클러처럼 내뿜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듯 흩어졌다.
그 모습에 상인과 위병들만 배를 잡고 웃고 있는 것이었다.
“이방인 신고식 한번 제대로 하는군! 으하하!”
다른 상인들도 고대했던 장면이라도 본 것처럼 폭소하며 즐거워하자 순진하게 속은 운영팀도 이내 서로 손가락질을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밝은 얼굴로 영지를 거닐며 절인 생선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가 에일에 끓인 구스베리, 비둘기 파이 같은 생소한 메뉴판이 달린 식당 앞도 지나갔다. 이방인들이 많은 곳답게 이세계의 글자 아래엔 한글이 대부분 함께 표기되어 있었다.
한 주임은 시간이 날 때 이곳의 글자도 배워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어는 통하는데 글자가 다르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 가지 빛깔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달린 교회를 안팎으로 구경하다가 비단 드레스들이 줄줄이 걸려 있는 옷가게에선 한참이나 머물렀다.
전 세계 각국 디자인을 모방한 옷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의상실 주인이 차와 과자도 내주며 알랑거렸지만 가격표를 확인한 그들은 다음에 올게요, 라는 변명만 남기고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그러고 나와서 우연히 발견한 곳에는 반가운 한글이 커다랗게 달린 간판이 보였다.
홀린 듯이 앞에 멈춰선 일행이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임식당’이라고 쓰여 있는 곳으로 성큼 들어갔다.
“새로 오셨다는 이방인분들이군요!”
푸근한 인상의 직원이 반긴 식당 내부는 크진 않았지만 그리운 고향의 청취를 풍기고 있었다.
운영팀은 어딘가 먹먹해진 눈으로 빈자리에 앉아 손을 올렸다.
조금 뒤 누가 봐도 한국인다운 외모의 50대 남성이 웃으며 다가왔다.
“임철우입니다. 잘들 오셨어요. 적응만 된다면 이곳도 꽤 마음에 드실 겁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중간중간 하얗게 센 머리를 하나로 묶고 상아색 셔츠와 바지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멋들어진 신사처럼도 보였다.
그는 따로 주문할 필요 없이 알아서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말하곤, 주방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다시 나왔다. 그런 다음엔 식당 가운데에 한 계단 솟아오른 마룻바닥에 올라 의자 옆에 세워져 있던 낡은 기타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에 운영팀은 물론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까지 기대감에 찬 얼굴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타 줄을 몇 번 튕겨가며 조율한 뒤에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자그마한 식당이 그의 목소리에 일순 고요해졌다.
“제 두 번째 고향 아크만에 새 식구가 온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며, 비루한 실력이지만 노래 한 곡 부르겠습니다. 참고로 첫 번째 고향은 충남 태안 바닷가 마을입니다. 절인 청어는 그만 먹고 싶은 아저씨를 부디 딱하게 여겨 박수 부탁드립니다.”
곳곳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오며 박수가 쏟아졌다. 그는 흠흠, 목을 가다듬고는 운영팀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가 한국을 떠난 지 오래라 신세대 노래는 모릅니다. 대신에 제가 열렬히 좋아했던 가수의 곡을 들려드리지요.”
운영팀이 대답 대신 커다란 박수로 응답하자 그는 투박한 손으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다정했던 연인은 어데로 갔나
사랑을 속삭이던 정다운 목소리 귓가에 맴도네
흐르는 시간 속에 그리운 고향
그 모든 것들을 이젠 나는 잊어야 하네
꿈을 꾸던 친구는 어데로 갔나
내일을 바라보던 우리 두 사람 영영 헤어졌다네
진실하고 다정한 눈동자
그 모든 것들을 이젠 나는 잊어야 한다네
파도가 치는 아무도 없는 곳 너무도 머나먼 섬
내가 떠나온 이유를 알 길이 없어
사랑은 세월에 변하고 친구는 흐름에 잊었네
쓸쓸한 안개가 내려앉으면 나는 또 울겠지, 다시 또 울겠지
* * *
본성으로 돌아온 운영팀과 마주친 하랑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다들 눈이 왜 그러세요?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임식당에 다녀왔는데요…….”
김유정이 퉁퉁 부은 눈으로 대답하자 하랑이 말 안 해도 알겠다는 얼굴로 아아, 하고 다독거렸다.
“임 사장님이 또 노래를 불렀나 보군요. 그분이 노래만 하시면 다들 우시더라고요. 식사는 잘하셨고요?”
“네. 잔치국수에 순무 김치랑 너비아니 먹다가 또 울었네요…….”
박 차장이 생각만 해도 울컥하는 듯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한 주임은 눈물까진 안 났지만 적당히 분위기를 맞춰 주었다.
하랑은 음울해하는 그들에게 얼른 화제를 돌려 내일 수도로 돌아간다는 황실기사단의 소식을 전해 주고는 푹 쉬라고 말한 뒤 바쁜 걸음으로 안뜰을 빠져나갔다.
온종일 시내를 쏘다녔던 운영팀도 꽤 지친 듯 저녁도 거르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 주임은 일찌감치 씻고 침대에 누워 고민에 빠졌다.
‘내일부턴 한율 씨한테 마력을 받아야 할 텐데.’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아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마력 충전 직후 : 타인에게 닿아도 흡수하지 않음.
하루 경과 :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으나 타인과 신체 접촉 시 미미하게 흡수함(장갑 등을 착용하면 괜찮음.)
‘오늘이 하루째인가.’
그녀는 어젯밤 식사 후 마지막으로 야닉의 손을 잡은 뒤 그에게 통보했던 것을 떠올리며 볼펜을 쥔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이틀 경과 : 약간 으스스해짐. 이때부터는 일반인과의 접촉 주의!
사흘 경과 : 한기가 돌기 시작하고 팔다리 힘이 풀림. (혹시 모르니 차장님 근처에 가지 않기)
나흘 경과 : 아직 모름
※참고 : 포라킨 단장님 왈, 열흘 정도 지난 후 갓난아기가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음.
‘그래도 난 성인이니까 열흘보다는 더 버티겠지.’
일단은 내일까지는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니 이한율에게 부탁하면 어찌어찌 해결은 될 것 같기는 했다.
처음부터 이한율은 자기가 도와준다고 했으니 거절을 하진 않을 것 같고…. 그라도 있어서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그녀는 새삼 자신의 목숨이 깃털같이 가볍게 느껴졌다.
아니, 그보단 저기 혼자 타고 있는 촛불이 더 어울리겠다. 누군가가 장난으로 불기만 해도 훅 꺼져 버리는 존재 정도.
불안함이 또다시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페어리들이 자기들을 찾아오면 죽지 않는다고 했는데.’
마나를 나누어 주겠다던 머릿속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야닉의 말대로 그저 요정의 삿된 장난일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취발론 산으로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녀는 답이 없는 난제에 수첩을 도로 덮어 버리고 서랍에 넣었다.
다음 날 눈을 뜨자 ‘이틀 경과’의 내용대로 따뜻한 이불 속에서도 닭살이 조금씩 돋아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한 주임은 찬물로 대강 씻고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히 옷을 챙겨 입은 후 푸른 여명을 헤치고 본성 밖으로 바삐 걸어 나갔다.
꼭두새벽부터 부지런히 일과를 시작하는 사용인들에게 일일이 아침 인사를 건네며 그중 부산스럽게 걸어가던 어린 소년에게 질문했다.
“저기, 황실기사단이 오늘 떠난다고 들어서요. 벌써 출발을 했나요? 배웅을 하고 싶은데….”
“어? 사자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기사님들이 조금 전에 사원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아직 계실 거예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코 밑에 검댕 같은 까만 것을 묻힌 소년이 제 덩치만큼 커다란 자루를 메고 씩씩하게 앞장서자 그녀는 주춤거리며 뒤따랐다.
끽해야 중학생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데 일을 해도 되는 건가 생각하다가 자루라도 좀 들어 줄까 싶어 손을 머뭇거렸다.
소년은 변성기에 들어선 갈라진 목소리로 붙임성도 좋게 말을 걸어왔다.
“사자님들이 무지막지하게 세다는 건 알고 있지만요. 그래도 해도 뜨기 전에 아가씨 혼자 막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아크만은 다른 곳보단 안전하긴 하지만 주교님을 뵈러 오는 외지인들도 많이 있으니까요.”
소년은 한껏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한 주임은 그를 도와주려던 손을 거두고는 얌전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저기 아래 연무장에 있는 사람들 보이시죠? 그리로 가시면 됩니다. 전 과수원에 비료를 옮겨놔야 해서 여기까지만 동행할게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아,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러니까….”
“벤이에요! 사자님이 바로 그 한 주임님이시죠? 딱 보자마자 알겠더라니까요. 나중에 사원에 오시면 제가 구경시켜 드릴게요. 아 참, 그리고 황자님을 차신 건 너무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분은 제 우상이시거든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소년이 제 할 말만 다다다 하고 도망치듯 달려갔다.
한 주임은 자리에 서서 무슨 소린가 하고 얼떨떨하게 있다가 이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엘라가 오해했던 사태가 벌써 본성 밖까지 파다하게 퍼진 것이다.
늘 비슷한 일과를 반복하는 사용인들에게 있어 새로운 소식은 엄청난 흥밋거리였기에 하룻밤 새 들불처럼 퍼져 나가는 것쯤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담당 하녀에서 식당으로, 식당에서 빨래터로, 빨래터에서 마구간으로, 마구간에서 대장간으로, 그걸로도 모자라 사원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어떤 이는 이 재밌는 뉴스를 전하기 위해 뛰어다니기까지 했다.
당분간 여기저기서 비슷한 소리를 듣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다.
마력이 고갈되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팔다리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