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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39화 (39/155)

39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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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적거리며 포석이 깔린 바닥이 끝나는 시점에 들어서자, 멀지 않은 곳에서 출발 준비가 끝난 듯 군마 위에 올라타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맨 앞에 서 있는 거스 경이 심각한 얼굴로 누군가와 이야기 중이었다.

한 주임은 그 사람이 야닉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보고는 저도 모르게 옆에 있던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영주님께선 몸이 얼마나 안 좋으신 겁니까? 폐하께서 안부까지 물으셨는데 이대로 얼굴도 못 뵙고 돌아간다는 게 영.”

거스 경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야닉은 턱을 문지르며 골치 아픈 연기를 하고 있었다.

“토벌 중에 저주 계열 마물이 섞여 있었던 모양이야.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더군. 주교님이 치료 중이시니 별문제는 없을 테지만 자칫하면 옮을 수도 있다고….”

옮을 수도 있다는 말에 거스 경이 조금 움찔하더니 괜히 한 걸음 물러났다.

“크흠, 부디 쾌차를 바란다고 전해 주십시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자님? 어딜 보고 계십니까?”

“아, 그래. 조심히들 가고. 하랑, 잘 모셔다드리고 와.”

“걱정 붙들어 매십쇼. 어서 가시죠, 나리!”

하랑이 가볍게 말에 올라탄 뒤 제 뒤에 있는 남녀에게 소리쳤다.

“지웅 님, 상아 님도 준비되셨죠?”

두 사람은 각자 말 위에서 한껏 상기된 얼굴로 야닉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야닉 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다음에 꼭 놀러 올 테니 건강하세요.”

그는 편안하게 웃어 주며 배웅했다.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 전서구를 보내도록 해, 데리러 갈 테니. 그대들은 좋은 부모가 될 거야.”

“언젠가 우리 아기가 태어나면 수도로 놀러 오세요!”

한 주임은 커다란 나무 뒤에 서서 인사를 마친 사람들이 빠르게 성채를 내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하랑에게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조금 아쉬워서 흙먼지만 날리는 말발굽들이 사라지는 광경만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왔으면 인사라도 하지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악, 깜짝이야!”

그녀는 몹시도 이상하게 놀란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돌아봤다. 야닉이 뒷짐을 지고 서서 태연히 웃고 있었다.

“기왕 나온 김에 지금 갈까?”

“…어딜요?”

“아, 실례. 그새 습관이 들었나 보군.”

야닉이 한 주임을 향해 내밀었던 손을 깔끔하게 거두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하마터면 자신도 버릇처럼 맞잡으려 했던 모양이었다. 깜빡한 척하고 은근슬쩍 잡아서 마력 좀 나눠 받을 걸 그랬나 하는 얍삽한 생각이 들었다가 그건 또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 고개를 내저었다.

야닉은 한 걸음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를 요새 안에 있는 사원으로 이끌었다.

아크만은 아주 오래전 바위산 절벽 위를 깎아내리며 지은 산성인지라 수십 개의 석탑 사이사이가 오르막과 내리막길로 쉼 없이 굽이쳐 있었다.

들쭉날쭉한 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자 어느 순간 기다랗게 늘어선 사과나무와 넓은 포도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밭 사이에서 부지런히 비료를 뿌리고 있던 벤이 두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큰 소리로 주교님! 하고 외쳤다. 그 소리에 알리온이 굽혔던 무릎을 펴고 끙차, 허리를 바로 세웠다.

야닉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바닥에 있던 알리온의 지팡이를 툭툭 털어 건넸다.

“밭일은 그만 사제들에게 맡기시라니까요.”

“이젠 노인네 취미 생활도 못 하게 하십니까? 고얀 분 같으니라고. 오, 이분이 바로 예의 그 아가씨로군요.”

한 주임은 사실 좀 의아했다.

황자가 차였다는 소문은 벌써 모르는 이가 없는 듯한데, 어쩐지 그녀의 얼굴만 보면 다들 ‘저 사람이구나.’ 하고 곧바로 알아채는 것이 아리송했기 때문이었다.

‘키 큰 이방인이라고 소문이 났나.’

김유정이나 박 차장과 비교했을 때 다른 점이라고는 그 두 사람보다 제가 10㎝ 정도 더 크다는 것뿐이었다.

그녀 기준에선 본인 얼굴은 제법 봐줄 만한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던지라 모두가 ‘미모의 이방인’이라는 수식어로 알아보고 있다는 것까지는 차마 알지 못했다.

오로지 야닉만이 그 수식어가 마치 자기한테 하는 칭찬인 것처럼 뿌듯해했다.

“주교님께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이른 시간부터 찾아왔습니다.”

진지하게 전한 방문목적에도 알리온은 산뜻하게 대꾸했다.

“그래요? 내가 도움이 될까 모르겠구먼. 그 전에 사자님도 내가 키운 녀석들을 한번 맛보겠어요?”

알리온이 탐스럽게 열린 포도알 하나를 따서 한 주임에게 내밀자 그녀는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받았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자줏빛 열매를 망설임 없이 입에 넣고 툭 깨무니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시큼하고 떫은 과즙이 한가득 터져 나왔다.

“읏.”

그녀가 차마 뱉지도 못하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꿀떡 삼켜 버리자 알리온이 일곱 살 개구쟁이처럼 키득거렸다.

“4년에 한 번 칠 수 있는 늙은이의 소소한 기쁨이라오.”

그는 수염이 파르르 떨리도록 웃고는 두 사람을 사원 안으로 데려갔다.

한 주임은 끌어올린 입을 가리고 있는 야닉을 살짝 노려보다가 이내 눈앞에 있는 커다란 성전에 시선을 빼앗겼다.

온통 회백색의 건물들 사이에서도 눈부실 만큼 희고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건물 옆으로 무너져있는 기둥의 잔해가 그대로 남은 것으로 보아 옛터에 새롭게 축조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예배당이었다.

아치형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일 먼저 높다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돔 형태의 둥근 천장에는 고대의 성인들과 천사들이 신전에 방문한 이들을 축복하는 모양새로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예배당 한가운데 커다란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성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알리온 주교는 단상을 향해 짧게 성호를 그은 후 기다란 나무 의자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주교님께선 마력 없이 소환되는 이방인에 대해 아십니까?”

야닉이 무겁게 꺼낸 말에 알리온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한 주임을 쳐다보았다.

색소가 옅은 갈색 눈이 찬찬히 그녀를 살피더니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어온다.

“예전에 그런 자들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이 늙은이도 처음입니다. 더군다나 소환자의 경우는 더더욱 처음이지요. 한데 사자님께선 무척이나 건강해 보이는군요. 황자님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거겠지요?”

“…네.”

그녀가 무릎 위에 올렸던 손을 머뭇거리며 야닉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주교는 그의 힘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제가 한번 잡아 봐도?”

한 주임은 주교가 얼마큼의 마력을 가졌는지 알 수 없어 조금 망설였다.

내일 당장 영면에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비쩍 마른 고령의 노인에게서 이틀 치나 되는 마력을 흡수했다간 이 자리에서 당장 미라처럼 메말라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다행히 야닉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살며시 접촉한 부분에서 해일처럼 마력이 빠져나가자 그는 흐름이 느려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알리온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채워 준 다음 넘기자 곧 주름진 손이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 왔다.

“음… 오오! 정말로 신기하군요.”

알리온이 몸에서 스르륵 사라져 가는 마나를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한 주임이 흠칫 몸을 굳히자 그는 서둘러 손을 떼고 긴밀히 살폈다.

한 주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제 마나가 황자님의 마나와 부딪치는군요. 기분이 어떠십니까?”

“약간… 멀미가 나는 것 같아요.”

그녀가 파리해진 얼굴로 대답하자 곧바로 야닉이 손을 잡아 제 것으로 마저 채워 넣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울렁이던 배 속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알리온은 마력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미미하게 웃었다.

“마나는 영혼의 혈액이랍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것처럼 마나 역시 그 성질이 다르고 기운도 다르지요. 전부 고갈되기 전까지는 가능하면 같은 사람에게만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찾아온 고위 신관이었건만 별다른 소득 없이 그녀에게 실망감만 안긴 것 같아 야닉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포라킨에겐 미안하지만 자료를 좀 더 찾아보라 해야겠다 생각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밥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것 같은데 양이 충분하지 않은지, 어째 처음 봤을 때보다도 더 마른 것 같다.

감싸 안은 어깨가 바스러질 듯 여린데도 그녀는 이제 괜찮아졌다고 느꼈는지 자꾸만 품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는 그것이 퍽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사원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한 주임은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어제 구경했다던 영지 이야기만 계속해서 늘어놓고 있었다.

대꾸는 해 주고 있지만 어딘가 빙빙 겉도는 기분에 야닉은 차라리 화제를 돌렸다.

“저번에 말했던 롱소드 보강을 오늘 하도록 하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반짝거리는 눈을 맞춰 온다. 이런 얘기가 아니면 도통 웃어 주질 않는다니까.

“다른 분들 것도 다 같이요?”

“그래. 아침 먹고 뜰에서 기다리고 있어. 안내해 줄 사람을 보낼 테니.”

“아…….”

한 주임은 야닉이 같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가 그가 무척 바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첫날 저녁을 함께 먹은 뒤론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로 집무실과 연무장을 바삐 오가며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지금도 눈 깜짝할 사이 도착한 본성에서 응접실에 손님이 기다리신다는 말을 듣고는 서둘러 멀어지지 않았던가.

한 주임은 약간 침울해져서는 식당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뭘 도와줄 건 없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가는데, 먼저 와서 식사하고 있던 운영팀이 눈을 굴리며 한 주임의 눈치를 본다.

그녀는 박 차장의 시선을 따라 테이블의 상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봤던 짧은 머리의 소녀가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당신이 한 주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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