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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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멀뚱히 서 있는 한 주임의 주위를 느긋하게 맴돌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경매장에 나온 종마를 고르는 것처럼 신중한 모습이었다.
한 주임은 영문도 모른 채로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무례한 시선을 온전히 받아 내고 있었다.
루는 태어날 때부터 까맣게 그을린 것 같은 제 피부와 우유처럼 온통 뽀얀 한 주임을 비교하며 입매를 비틀었다.
‘소문대로 반반하긴 하잖아? 키도 크고.’
소문이 어쨌건 간에 예쁜 여자가 그의 옆에서 알짱거리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야닉을 찼다고?”
난데없는 돌직구에 운영팀과 식당 안 하녀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세기의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어느새 주방에서도 사용인 몇 명이 슬그머니 기어 나와 힐끔거리는 중이었다.
“무슨 얘긴지…….”
띠동갑은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다짜고짜 시비조로 반말을 걸어와 당혹감과 불쾌감이 밀려들었지만, 한 주임은 어른스럽게 대응하려 애썼다.
포라킨 단장이 이야기했던 ‘끔찍한 말괄량이’라는 수식어가 너무나도 딱 맞아떨어져 보이는 순간이었다. 외모만으로 보자면 또래 같은 두 사람인데 눈앞의 소녀와 비교하자 포라킨이 갑자기 훌쩍 어른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루는 고상한 척 애쓰는 이방인이 같잖다는 얼굴로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결코 제가 작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트라야누스 단원인 루라고 해. 참고로 야닉의 약혼자기도 하니까 그 사람 주변에 얼씬거리지 말았으면 해. 그쪽이 찼다고 하는 것도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야닉만큼 완벽한 남자가 어딨다고 그를 거절하겠어?”
단호하리만치 확신에 찬 말에 한 주임은 불쾌했던 것도 잊고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약혼자는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대꾸고 뭐고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져 있을 때 식당으로 들어온 포라킨이 대뜸 끼어들었다.
“말은 바로 해야죠. 아직 수습이잖아요. 더군다나 약혼자라는 망상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까? 열아홉씩이나 먹었으면 소꿉놀이는 이제 그만할 때도 됐을 텐데요.”
포라킨이 태연히 내용을 정정하자 루가 즉각적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못생긴 게 참견하지 마! 밥 먹을 시간에 그 잘난 마법으로 좀 더 예뻐질 순 없겠니, 못난아?”
“까만 콩한테 그런 소리 들을 이유 없습니다.”
포라킨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 심드렁하게 대꾸하면서 의자를 빼 앉았다.
가장 싫어하는 별명에 루가 화르르 얼굴을 붉히며 아악! 하고 제풀에 못 이긴 괴성을 꽥 지르고는 문이 부서질 듯 세게 닫고 나가 버렸다.
한순간에 괴괴해진 식당 안에는 눈치 없이 스튜를 후루룩거리는 염 부장의 식사 소리만 울려 퍼졌다.
“식사들 하세요.”
포라킨은 심심찮게 있는 일인 양 철 수세미 같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 * *
“아크만 부대의 기사단장님이신 로하겔 브리티지 경의 종기사, 헥토르 아산입니다. 명을 받고 사자님들을 모시러 왔습니다. 이제부터 저희 요새가 자랑하는 대장간으로 여러분들을 모시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평민이니 모쪼록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아크만 기사단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공정한 선발을 거쳐 사람을 받으니까요.”
깍듯하게 자신을 소개한 기사는 자신의 소속이 매우 자랑스러운 듯 당당히 가슴을 펴고 말했다.7
김유정이 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사 서임은 왕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황제 폐하께서 제국의 모든 기사를 일일이 상대하셨다가는 그대로 국상을 치르게 될 겁니다. 일단 하급기사들은 제후들이 선서임을 시키고 나중에 서류를 올리면 황실에서 제가(制可)를 내려 주지요. 실제로 폐하를 뵈려면 기사단장 정도는 되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저희 아크만에는 기사단보다 용병단이 훨씬 더 많습니다. 폐하께서 아크만에 기사들이 많은 걸 용납하지 않으시거든요.”
헥토르는 쓴 입맛을 다시며 걸었다.
무려 두 나라와 근접해 있는 국경지대 영토의 기사들이 백 명도 안 된다니, 누가 들으면 배를 잡고 웃을 일이었다.
그나마 델피온은 전쟁을 하기엔 너무 가난한 데다 화친을 맺은 상태고, 로엘과는 옛날부터 툭하면 국지전을 벌이긴 했어도 야닉이 아크만에 온 뒤로 입장을 180도 바꾸어 최대 거래국으로 변모한 요즘이었다.
아마도 로엘에서 아크만 성채를 노리고 보낸 군대가 세 번쯤 전멸당한 뒤부터였을 것이다.
수아르 4세가 유언 중에 ‘아크만은 꼭 가지고 싶었는데.’ 이런 말을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다.
대장간은 걸어가기엔 꽤 멀리 있어서 그는 운영팀을 데리고 마구간으로 먼저 향했다.
운영팀은 오전 내내 헥토르에게 말을 다루는 법과 기본적인 승마 기법을 배워 나갔다.
한 주임은 그곳에서 퀴버를 발견하고 다가가 목을 쓸어내렸다. 퀴버가 제자리에서 앞발을 구르며 반가움을 표시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묵직한 안장을 등에 올리고 가볍게 올라탔을 땐 박 차장이 오오! 하고 부러움 섞인 탄성을 쏟아 냈다.
말들이 다그닥거리며 연무장을 지날 무렵 트라야누스 용병단과 아크만 부대 기사들이 한데 어우러져 훈련 중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서로의 무기를 맞대고 대련 중이었다.
용병단의 대다수는 야인족이라 보통 사람보다 키가 몇십 센티나 훨씬 더 컸는데, 보통 체격의 일반인 용병들도 수가 적지는 않았다.
한 주임은 저들 사이에 껴서 훈련받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연무장 끄트머리에서는 수습 단원들 사이로 루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들이 저만치 앞서 달리는 것을 보며 죽을상으로 걷다가 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진득하게 눈에 담던 한 주임이 저만치 앞서가는 일행을 따라 황급히 퀴버를 몰았다.
헥토르와 운영팀은 광장처럼 널따란 연무장을 지나쳐 아래로 기울어진 좁고 가파른 구름다리를 건넜다. 다리 너머 끌로 깎아내린 듯한 거친 암벽이 가까워지자 어디선가 깡깡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무기고와 대장간 같은 중추 시설이 있는 부지 입구는 무척이나 외지고 깊숙한 지하로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헥토르는 지하 입구에 서 있는 위병들에게 경례를 받은 뒤 간단한 설명을 시작했다.
“요새 지하는 대장간뿐만 아니라 감옥과 심문실도 있고, 유사시에 최후의 방호기지 역할도 합니다. 지하동으로 대피한 후 저 구름다리를 부숴 버리면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은 어떤 적도 이곳으로 들어올 수가 없지요. 내부는 바깥보다 넓고 복잡한 미로 구조로 설계되었으니, 혼자 돌아다니시다가 유골로 발견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쇼.”
섬뜩한 이야기를 자랑스럽게도 늘어놓은 그가 운영팀을 안으로 이끌었다.
기다란 복도를 오래 걷기를 한참, 어느새 깨끗한 벽과 바닥이 끝나더니 동굴 같은 좁은 돌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후끈거리는 공기가 퍼져 나오는 곳으로 조금 더 들어갔다.
“여기서부턴 걸어서 갑니다. 말들이 소음과 열기에 놀라거든요.”
일행은 손수레들이 쌓인 보관소에 고삐를 걸어 두고 횃불이 걸린 복도를 따라 다시 안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몇 갈래로 나누어진 길을 여러 번 지나왔기에 한 주임은 절대로 혼자 들어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헥토르가 말한 어딘가에서 발견될 유골이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그을린 듯한 까만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땀이 배어 나올 정도로 후끈거리는 열기가 온몸을 덮쳤다.
온통 어둡고 새빨간 대장간 안에는 근육질의 작은 체구를 가진 남자들이 가슴팍이 흠뻑 젖은 상의를 입고 두꺼운 가죽 장갑을 낀 채 각자의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 주임은 그들이 만들고 있는 것이 자루에 쌓여 있는 말편자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용광로에서 지글지글 끓는 쇳물이 모루 위로 떨어지고 수증기를 내뿜으며 치익거리는 소리로 담금질 되는 풍경에 별세계에 온 것처럼 두리번대던 것도 잠시, 화구에 끊임없이 던져지는 석탄 냄새에 코가 찡하고 가차 없이 메질하는 망치 소리가 아플 정도로 귀를 세차게 때렸다.
한편에 앉아 이를 감독하고 있는 난쟁이는 그것이 마치 듣기 좋은 노랫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흥얼거리고 있었다.
“다위 님! 새로 오신 사자님들입니다!”
“앙? 뭐라고?”
“이방인이요!”
헥토르가 소리를 지르듯 외치자 그제야 운영팀을 발견한 다위가 제 키보다 한참 높은 바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빡빡 민 머리 사이로 닭 볏처럼 남긴 머리털을 가진 난쟁이는 배꼽까지 내려오는 땋은 수염을 휘날리면서 그들을 지나쳤다. 문 앞에선 그가 운영팀을 향해 따라 나오라는 손짓을 하더니 다시금 바쁘게 걸었다.
밖으로 나간 그가 대장간 근처에 있는 제 키에 맞춘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뭐 해!’ 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화들짝 놀란 운영팀은 다급히 허리를 굽혀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내부는 천장이 적당히 높아 안에서는 허리를 펼 수 있었다.
헥토르는 다위의 집무실이라고 소개했지만, 집무실이라고 하기엔 그곳은 거의 난쟁이의 집 같았다.
드워프의 신체에 최적화된 작은 가구들은 잡동사니처럼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고, 바닥이 온통 쇳가루로 반짝거리고 있어서 일행은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서서 쭈뼛거렸다.
“대충 앉아라. 인간들이 앉을 의자 따위는 없으니.”
다위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새로 온 이방인들을 한 명씩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대거, 팔치온…. 석궁, 아니 활…? 혼자 알아들을 수 없을 말로 중얼거리다가 ‘고개 아프니 빨리 앉으라고!’ 하고 성미 급한 역정을 내는 것이었다.
운영팀은 이미 바닥에 앉아 있는 헥토르를 힐끔 보다 서둘러 주저앉았다.
헥토르는 드워프들의 성깔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기 위해 성심성의껏 소개를 시작했다.
“최후의 드워프 장인이신 다위 님이십니다. 요새의 모든 부분에 이분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드워프족은 건축, 제련, 세공의 달인들이니까요.”
“술도 잘 만들지.”
다위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