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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42화 (42/155)

42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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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욕실로 떠밀리듯 옮겨진 한 주임은 미엘라의 재촉에 어영부영 목욕을 마쳤다.

미엘라는 장갑을 낀 채로 서둘러 한 주임의 머리를 말려 주고는 자색 새틴 드레스를 꺼내 왔다.

와인 빛깔의 윤기가 흐르는 드레스 위에 정교하게 세공된 허리띠 장식까지 완벽하게 착장을 마친 뒤에는,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리고 드레스와 같은 색상의 장미 모양 보석 핀을 귀 옆에 꽂았다.

땋은 머리가 길지 않아서 어깨에 겨우 닿는 모양새였지만 한 주임 생각에도 제법 우아해 보인다고 감탄하고 있을 때, 미엘라는 볼까지 발그레해서는 거의 방방 뛰고 있었다.

어제 텅 빈 옷장을 보고 속상해서 하녀장 시에나에게 토로한 것이 집사장 루이자에게까지 전달된 모양이었다.

루이자는 손수 세레나의 드레스룸 하나를 열쇠로 열고 들어가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 몇 벌을 미엘라에게 건네주었다. 미엘라는 그길로 직조실로 달려가 허리를 줄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썰미에 수선된 드레스는 한 주임의 가는 허리에 꼭 맞아떨어졌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레비탄의 어떤 귀부인도 주임님보다 기품 있진 않을 거예요!”

“그건 좀 비약이지 않을까요?”

민망해서 부인했지만 미엘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제 안목을 믿으세요. 지금 모습으로 손 내밀면 안 잡아 줄 남자는 세상에 없어요. 만약 있다면 그자는 남자가 아닐 거예요. 아니면 사내구실 못하는 불구거나.”

낯 뜨거운 말을 당당하게도 하고는 그녀는 제 주인을 데리고 본성 밖으로 나갔다. 안뜰에는 한 주임만을 위한 마차까지 벌써 대령해 있었다.

“안에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거의 욱여넣듯 한 주임을 마차 안으로 밀어 넣고 미엘라는 한달음에 본성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하녀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미엘라! 마차 안으로 모셨어?”

“너무 예쁘시더라. 그 정도면 야닉 님도 한번 차였다고 포기하지 않으실 거야!”

“야닉 님 오늘 일정 끝나신 거 맞죠, 부인?”

그녀들의 눈이 야닉을 담당하는 하녀장에게 우르르 쏠렸다. 시에나는 마치 거사를 앞둔 열사처럼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모시고 나오지.”

시에나는 그녀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그러나 조급하지 않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3층으로 올라갔다.

똑똑.

-들어와.

예상대로 야닉은 공식업무를 마친 후에도 집무실에서 자잘한 서류 따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장을 발견하고 선뜻 손짓했다.

“아, 시에나. 마침 잘 왔어. 저번에 갖다준 세탁비누는 효과가 좀 어떻지? 괜찮으면 정식으로 수입을 할 생각인데.”

얼마 전 상업 길드에 가입한 신규 상단이 제안한 물품 리스트를 찬찬히 살펴보던 그가 물었지만, 시에나는 거기서 거기인 비누 따위엔 아무짝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무엄하게도 주인의 질문을 싹둑 잘라먹고는 곧바로 제 역할을 이행했다.

“지금 좀 나가 보셔야겠습니다.”

“어딜?”

제안서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가볍게 묻는 말에 시에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모든 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오늘 이방인분들끼리 환영회가 열리는 건 알고 계시죠?”

“음. 임식당에서 한다고 들었는데, 다들 재밌게 놀다 오라고 해. 돌아올 때는 마차를 보내고.”

“그게… 한 주임님이 아직 출발을 못 하셨습니다.”

야닉이 그제야 양피지를 내려놓더니 눈을 맞춰 왔다.

“아까 다 같이 나간 거 아니었나?”

분명 몇 시간쯤 전에 시끌벅적하게 나가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녀 혼자 출발을 못 했다니, 무슨 소린가 싶었다. 자정을 알리는 사원의 종소리가 곧 울릴 시간이건만.

“잠이 깊이 드셨었는지 미엘라가 한참을 깨웠던 것 같더군요. 지금은 준비를 마치고 마차에서 대기 중이십니다. 아무래도 이 시간에 마부와 단둘이 밖으로 모신다는 것이 염려되어….”

사실은 미엘라가 안 깨운 거지만.

“다른 하녀들도 모두 바쁜지라.”

시에나는 뻔뻔스럽게 연기를 이어 나갔다.

야닉이 그녀들의 속셈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다들 잘 시간에 바쁘다는 것은 또 무슨 어이없는 핑계란 말인가.

그는 피식 웃으며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극에 기꺼이 어울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실은 내키기도 했고.

“이 시간에 마부와 단둘이 밖으로 나가는 건 곤란한 일이지.”

그는 앵무새처럼 시에나의 말을 따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주인을 속여먹는 불경한 하인을 벌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도 나름 신선하게 다가왔다.

집무실을 나오자 바쁘다던 하녀들이 잠옷 바람으로 다 보이게 숨어서는 키득거리는 시선이 등 뒤로 느껴졌다.

‘아주 신들이 나셨군.’

야닉이 순순히 그녀들의 계획에 동참해서 밖으로 나가 마차에 오르고 문을 닫았을 때 하녀들이 쏟아지듯 안뜰로 몰려나왔다.

그녀들이 마부를 향해 일제히 눈빛을 쏘아대자 신호를 받은 마부가 엄지를 척 올리며 명을 받들어 마차를 출발시켰다.

한 주임은 난데없이 마차에 탄 야닉을 보고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것은 야닉도 마찬가지였다.

임식당에 가는데 왜 이렇게 차려입었지? 하다가 금방 이유를 깨달았다. 안 봐도 미엘라의 소행이겠지.

그는 찰나의 순간 미엘라의 작품을 빠르게 감상했다. 그리고 점수를 매긴다. 이 추운 날에 어깨가 버젓이 드러난 드레스라니, 그것만으로도 0점이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녀는 목적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야닉은 그녀의 물음에 엉망진창이었던 황궁의 만찬회를 잠시 떠올렸다.

“……진짜 환영식?”

마차 바퀴는 매끄럽게 포석을 구르며 성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임식당으로 향하던 마차가 멈춰 선 곳은 목적지가 아닌, 아직 횃불만 타오르고 있는 어두컴컴한 산길 한복판이었다.

마부가 돌연 의자에서 내려오더니 엉거주춤 문을 두드려 댔다.

“제가 갑자기, 배가, 아파, 가지고요. 죄송하지만, 뒷간엘 좀 다녀오겠습니다.”

마부는 사전에 준비한 대사를 몹시도 어색하게 읊으며 눈을 굴렸다. 야닉이 웃든 말든 그는 충직하게 임무를 마친 후 수풀 속으로 냅다 달음질쳤다.

벌써 저만치 어둠 속으로 사라진 마부를 본 야닉이 미련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우린 말을 타고 갈까.”

“네? 저분은….”

“안 올걸.”

그는 명쾌하게 결론짓고는 한 주임의 손을 잡고 땅으로 얌전히 내려 주었다. 그런 다음 마차에 연결된 말의 샤프트를 빠르게 풀었다.

“드레스 때문에 함께 타야겠어. 이리 와.”

한 주임은 말을 타기엔 폭이 좁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할 수 없이 그의 앞에 다가섰다.

치마를 허벅지까지 끌어올려 탈 수도 없는지라, 그가 허리를 번쩍 들어 말 위에 올려 주었을 땐 저도 모르게 ‘꺅’ 하고 새된 소리까지 내지르고 말았다.

가볍게 뒤에 올라탄 야닉은 이 겨울에 외투도 입히지 않고 내보낸 미엘라를 나중에 단단히 혼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빨리 달리진 않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 내 허리를 안아.”

드레스 재질이 미끄러운 데다가 옆으로 앉은 자세가 불안해서 말했으나 그녀는 허리춤에 있는 옷자락만 약간 움켜쥘 뿐이었다.

결국 야닉이 그녀의 양손을 끌어당겨 허리에 두르자 한 주임의 얼굴이 그의 목덜미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허리를 감은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낀 야닉이 물었다.

“많이 추워? 열기를 내보내고 있긴 한데.”

“아, 아니에요. 이제 안 추워요.”

‘추워서 떠는 게 아닌가.’

그는 입매를 끌어올리며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고 한 주임은 밀착된 상체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리기 위해 꼼지락거렸다.

다행히 말이 일정한 속도로 나아가자 금방 중심을 잡은 그녀가 껴안고 있던 자세를 바르게 세웠다.

그가 말을 할 때 머리 위로 들렸던 목소리라든지, 목에서 느껴지던 진동이라든지, 탄탄한 가슴이 울리는 것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던 것이 자꾸만 생각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겨울바람이 휑하니 드러난 어깨와 팔에 닿기도 전에 야닉이 의도적으로 내뿜는 열에 한 주임은 정말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느껴지는 거라고는 뜨거운 온기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세차게 뛰는 자신의 심장 박동뿐.

‘제발 의식하지 말자. 제발. 나이도 먹을 대로 먹었는데 열일곱 살처럼 굴지 말자.’

그녀는 그 말만을 주문처럼 반복적으로 뇌까렸다.

“이방인들이 올 때마다 임식당에서 환영회를 열어. 새로 온 사람들에게 고향 소식도 듣고 이곳에 대해 설명도 해 주고, 뭐 그런 자리라더군. 나도 가 보진 않았는데.”

야닉이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것을 들으며 한 주임은 슬며시 허리에 감았던 손을 풀었다.

저녁도 한참 지난 한밤중이라 그런지 들어선 시가지는 은은한 연등 불빛 아래 인적 없이 고요했고 조용한 공간 속에 말발굽 소리만 울렸다.

그녀는 야닉의 목소리가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아까 대장간에 갔었어요. 다위 님이 검 보강도 하고 활도 만들어 주신대요.”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의외라는 듯 반응했다.

“그 다위가? 별일이군.”

기대보다 짧은 대꾸에 한 주임이 다음 말을 이어 나가려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데 야닉이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

“조만간 마물 재료를 보충해 줘야겠어. 드워프들에게 그것만큼 좋은 장난감은 없거든. 나중에 함께 갈까?”

“네.”

함께 가자는 별거 아닌 말이 단숨에 들뜨게 한다. 새털처럼 간질간질한 마음이 저 높은 달까지 닿을 것만도 같다.

그러나 너무나도 멋없게 ‘네’ 하고 대답한 스스로가 약간 바보 같다 생각했다.

한 주임은 야닉의 어깨 너머로 반짝이를 흩뿌려 놓은 듯 별이 빼곡히 박힌 하늘을 보다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상쾌한 밤공기가 폐부를 한가득 채우고 귓가엔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울렸다.

남자의 일정한 심장 박동이 아주 작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두근거리는 건 나 혼자만인 것 같다.

도시의 소음, 꽉 막힌 퇴근길 전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적막이 깔린 어둑한 원룸. 그 모든 것들이 상상이고, 지금 이 순간만이 현실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금 눈을 뜨면 이 모든 것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내 방 형광등이 보이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경험한 모든 것들이 어쩌면 지독하리만큼 달콤한 꿈은 아니었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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