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작품입니다. 저자와 발행처의 허락 없이 본 저작물로 무단전재,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 시 민사 및 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다 왔어.”
한 주임은 음울한 상념에서 벗어나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임식당’ 세 글자가 보이자 그녀는 폴짝 말에서 뛰어내렸다. 공중에 떠 있던 다리가 지면에 떨어지며 짜르르 울린다.
꿈이 아니다. 걱정스럽게 저를 바라보는 눈앞의 남자는 현실이었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위험하게.”
야닉이 못마땅한 얼굴로 천천히 내려와 그녀를 살폈다.
신발 굽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발바닥이 찡하고 아려왔지만 한 주임은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며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오 마이 갓! 재인아!”
가장 먼저 그녀를 발견한 박 차장이 달아오른 얼굴로 두 팔 벌려 달려들었다.
가까이 온 그녀에게서 포도주 냄새가 확 풍겨 오자 한 주임은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박 차장이 눈을 끔뻑거리며 한 주임의 차림새를 보더니 갑자기 손가락질을 하며 크게 외쳤다.
“너, 너 누가 이렇게 이쁘게 하고 오래? 우리 다 이렇게 왔는데!”
한 주임은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의 복장이 이곳 사람들과 몹시도 이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영팀들은 아침에 대장간에 갔던 복장 그대로 셔츠에 바지 차림새였고, 다른 이방인들도 모두 겨울용 블리오나 아니면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삽시간에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 몰려들었다.
한 주임은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슨 궁전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한 것처럼 차려입은 스스로가 광대라도 된 기분이었다.
자신을 보는 시선들이 모두 다 비웃음을 꾹 참고 있는 것만 같고, 나름 예쁘다고 생각했던 제 차림새가 급격히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몰려드는 민망함에 당장에 뭐라도 변명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미엘라가….”
“자기 담당 메이드? 그 애가 이렇게 입혀 줬어? 걔 좀 이상하다. 우리 나갈 때 빤히 봤으면서 왜 자기만 공주님처럼 입혀 보냈대?”
박 차장이 딸꾹거리면서 다가와 소곤거렸으나 작은 가게에 있던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목소리였다.
“혹시, 걔가 자기 괴롭히는 거 아니야?”
“네?”
한 주임은 아연한 얼굴로 박 차장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박 차장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왜 굳이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아니이. 이상하잖아. 사람 놀림거리 만드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
“어쩌지. 내가 입으라고 한 건데.”
그 순간 가만히 듣고 있던 야닉이 끼어들었다.
자연스럽게 한 주임의 허리에 손을 두르더니 뻔뻔스럽게도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는다.
“이방인들이 파티를 연다기에 다들 이렇게 입는 줄 알고 내가 직접 골랐거든. 이런 자리인 줄 알았으면 차라리 오지 말 걸 그랬군. 어찌할까. 돌아갈까? 가서 우리 둘이 파티할까? 나로선 그게 더 좋은데.”
그러더니 뺨에 입까지 맞춘다.
지켜보던 이들이 경악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데 박 차장 혼자 킥킥 웃어댔다.
그녀는 단단히도 취해 있었다. 아니, 취해 있어야 했다. 맨정신이면 못 할 말까지 기어이 떠벌리고 있었다.
“황자님, 그거 연극인 거 다 알거든요. 우리 재인이가 마력이 없으니까 도와주시는 건 감사한데요, 자꾸 그러시면 얘가 얼마나 혼란스럽겠어요? 순진하고 착한 애가 일일이 반응하는 게 재밌긴 하겠죠. 그런데요, 그거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처거든요.”
이상하다. 분명히 자신을 옹호해 주는 말 같은데, 왜 기분이 좋지가 않을까.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여지 남기고 다니는 걸 한국에서는 어장관리라고 한답니다, 바람둥이 왕자님.”
“차장님이 많이 취하셨네요!”
듣고 있던 김유정이 돌연 벌떡 일어나 걸어 나왔다.
김유정은 뭐라고 항변하려는 박 차장의 입을 우악스럽게 틀어막고는 어딘가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공 대리가 스프링처럼 의자에서 튀어나와 박 차장을 부축했다.
박 차장은 콧잔등을 잔뜩 찌푸리며 삐죽거렸다.
“나 안 취했는데…….”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취하셨고요. 더 하시면 내일 목이 날아가게 생겼어요.”
김유정은 단호하게 판결하고는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한 주임에게만 들리도록 빠르게 속닥거렸다.
“주임님 주무신다고 해서 저희끼리 먼저 왔어요. 죄송해요. 한율 씨도 안 왔거든요.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시고 황자님이랑 재밌게 놀다 가세요.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근처 여관으로 갈 거예요.”
“빨간색 지붕이니까 올 거면 사장님한테 물어봐요. 가자, 유정 씨.”
공 대리가 박 차장을 거의 들쳐 메듯이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김유정도 얼른 따라 나갔다.
한 주임은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터벅터벅 빈자리로 걸어가서 대충 앉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고 성가셔졌다.
이런 자리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야닉이 환영식이라고 말해 줬을 때 바로 안 간다고 할걸. 흘려들었던 자신을 몇 대 패고 싶을 만큼 짜증스러웠다.
‘잘 모르겠어. 차장님은 분명히 날 걱정하는 것 같은데, 왜 기분이 안 좋은지 모르겠어. 그냥, 그냥 찝찝하고 불쾌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난제에 부딪힌 듯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미엘라가 정말 날 우스갯거리로 만들려고 이런 옷을 입혔을까? 그런 것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이거 저 마셔도 돼요?”
답답한 마음에 처음 보는 사람의 잔에 들어 있는 밀주를 보다 물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성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낚아채듯 가져와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야닉이 굳은 얼굴로 걸어오다가 일순 멈칫했다.
“야닉!”
주방에서 나오던 루가 그를 보고 전속력으로 달려 나와 그대로 품에 뛰어든 것이다.
야닉이 반사적으로 팔을 잡아 떨어뜨렸지만, 그녀는 거머리처럼 재차 달라붙어서는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나 피했지? 피해 다닌 거 맞지?”
“루, 놔.”
“싫어. 놔주면 또 도망칠 거잖아.”
야닉은 복잡한 얼굴로 우악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손을 떼어 냈다.
이 작고 귀찮고 귀엽고 성가신 아이는 한번 들러붙으면 도무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시 안기려는 것을 힘으로 막아내고 한 주임을 눈으로 좇는데,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다.
아. 젠장. 절로 짜증이 치밀었다.
* * *
밖으로 나온 한 주임은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었다.
꽁꽁 에일 듯이 추운 날씨에 민소매 드레스 하나만 달랑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라니.
거기다 장미 머리핀까지 꽂은 모양새가 말 그대로 머리에 꽃 꽂은 미친 여자가 따로 없었다.
차라리 정말로 미치기라도 했으면 나을 뻔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추위를 느끼지도 않았을 테니까.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치아가 절로 딱딱 부딪치며 온몸이 달달 떨려 왔다.
닭살이 돋은 두 팔을 끌어안고 공 대리가 말했던 빨간 지붕의 여관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등 뒤에서부터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익숙한 온기. 그 남자다.
“고마워요.”
“…….”
남자는 여자의 기분을 살피려 세심하게도 다섯 걸음 떨어진 뒤에서 말없이 따라왔다. 그녀가 춥지 않을 정도로 열기를 내보내며.
“챙겨 줘서 고맙고, 감싸 줘서 고맙고, 지금도…….”
한 주임은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천천히 걸었다.
야닉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밤길이 두렵지 않고 먼 길이 막막하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길로만 곧장 걸어가면 된다는 단순한 목표가 머릿속을 가볍게 만들었다. 저 사람은 무슨 신 같은 건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보고는 다시 웃었다.
“제가 친구가 없었거든요?”
갑자기 뜻 모를 고백을 뱉는 그녀를 야닉은 가만히 지켜봤다.
“회사 다니면서 차장님이 저를 많이 챙겨 주셨어요. 밥도 같이 먹자고 먼저 말해 주고, 차장님 남편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해 주고, 같이 염 부장님 흉도 보고.”
말투에 웃음이 스며들어 있어서 그도 조금 웃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혹시라도 결혼하게 되면 차장님이 부케를 받아 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차장님 말고 다른 사람이 딱히 없었거든요.”
부케가 뭐더라. 들어 봤는데. 야닉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세레나와 했던 결혼식은 요새 사원에서 결혼 선언문만 낭독하고 알리온의 공증을 받아 간단히 끝냈다.
이방인들이 간혹 결혼할 때 재잘거렸던 말인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나니 미칠 것 같았다.
‘멍청한 놈.’
“근데 오늘 느낀 건데요.”
한 주임이 빙글 뒤를 돌면서 웃었다. 아니, 웃지 않았다.
그녀는 웃었지만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차장님은 부케 안 받아 주실 것 같아요. 그냥, 오늘 보니까 왠지 그럴 것 같아요.”
“내가 받아 줄게.”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한 주임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예쁘게 접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부케가 뭔지는 알아요?”
“당연히 알지. 그러니까 내가 받아 줄게. 그대 결혼식에서. 약속하지.”
야닉은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상상이라도 하듯 눈을 굴리다가 다시 키득거렸다.
“약속한 거예요? 무르기 없어요.”
“제국의 황자가 하는 약속이니 믿어도 좋아. 내친김에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봐. 오늘은 다 들어줄 테니.”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다 들어준다는 건지.
한 주임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은 충동이 일어 무슨 짓궂은 부탁을 할까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가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시간만 끌었다.
골몰히 고민에 빠져든 그녀가 답답했는지 야닉이 가까이 다가와 재촉했다.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어서. 다 들어준다니까?”
황금을 달라 하면 기꺼이 줄 수도 있다. 옷과 보석을 달라 하면 차고 넘치게 줄 것이다.
하룻밤을 달라 하면 평생 잊지 못할 밤을 선사할 테지. 하지만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어쩌면 충동에 휩싸인 건 야닉일지도 몰랐다. 아마도 혼자서 걸어가던 뒷모습을 봤을 때부터.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차마 붙잡지 못하고 뒤를 따랐다.
때로는 가만히 지켜봐 주는 위로도 필요한 법이고, 오늘의 그녀는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으니까.
애타는 것 같은 갈증은 오롯이 그의 몫인 듯했다.
“그럼 나랑 친구 해요.”
이것 봐. 부탁이라는 게 겨우 이런 거다.
“그걸로 되겠어?”
“차고 넘쳐요.”
야닉은 그녀의 차가워진 손을 들어 손등에 맹세의 입맞춤을 했다.
비록 기사의 고결한 맹세는 아닐지 몰라도 한 인격으로서의 존중과 신의를 담았다. 그리고 약간의 사심도.
“영광이야.”
야닉은 한 주임을 데리고 빨간 지붕의 여관으로 향했다.
하늘로 불꽃을 쏘아 올리면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가 보고 초소를 향해 신호를 보내겠지. 그러면 눈 깜짝할 새에 용병들이 말을 몰고 올 것이다.
그렇게 성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그녀를 눈요깃거리로 삼고 싶지 않다.
기쁘게 미소 짓는 친우는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워서, 불현듯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