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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45화 (45/155)

45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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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성을 포기하고 입구를 바위로 막아 시간을 끄는 것.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차악일 수밖에 없는 결정이 끝나자마자 이방인들은 한곳에 모여 폭격과도 같은 불꽃을 암벽에 쏟아부었다. 곧이어 고막이 터질 듯이 쾅쾅거리는 충격과 함께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온통 시커먼 연기로 뒤덮였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 시야가 확보된 샛길에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바윗덩어리와 흙더미가 쏟아져 있었다.

트롤들이 그 아래에 깔려 움찔거리자 기사들이 잔해 위로 달려들어 움직이는 모든 것에 무자비하게 검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암벽이 무너진 충격으로 한쪽 성문이 떨어져 나간 아성에서 세실 로기아가 유모와 함께 잿더미를 헤치고 쿨럭거리며 걸어 나왔을 때였다. 동시에 영주의 귀환을 알리는 올리판트 소리가 머리 위로 길게 울려 퍼졌다.

세실은 아버지가 도착했다는 신호에 유모의 손도 뿌리치고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돌무덤 사이를 달렸다.

[아버지가 돌아오셨어!]

[아가씨! 이쪽으로 오십시오!]

세실을 발견한 기사가 서둘러 손을 뻗었지만, 그녀에게 닿기 직전 세실의 몸이 돌연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땅속에 파묻혀 있던 크고 두툼한 괴수의 손이 튀어 올라와 소녀의 가느다란 허리춤을 한 손에 낚아챈 것이다.

트롤은 흙더미를 후드득 떨어뜨리며 나머지 몸뚱이를 잔해 속에서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세실은 그 차갑고 축축한 손아귀에서 인형처럼 흔들리며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다.

트롤이 한 손에 어린 소녀를 쥐고 잠시 비틀거리다가 자신에게 몰려드는 갑옷을 두른 인간들을 보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동족들은 바위에 깔려 누운 채로 속절없이 난도질을 당하고 있었다. 트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기사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자 도망칠 곳을 찾던 놈은 망설이지 않고 아성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더니 남아 있는 성문 하나를 종잇장처럼 뜯어내고는 제 머리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놈이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통에 영애가 위험할까 봐 함부로 손대지도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사이 트롤은 제 몸통은 생각지도 않고 꾸역꾸역 욱여넣은 뒤 입구 파사드를 부숴 가면서 기어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몇 명이 힘없이 검을 떨어뜨렸다.

트롤이 몸을 비집고 들어가면서 손아귀에 힘을 주는 바람에 세실의 허리가 앞으로 크게 꺾이며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괴수가 기어이 성으로 들어가는 동안 소녀의 쏟아지는 은발이 마치 깃발처럼 처연하게 펄럭거렸다.

원정대의 노도와도 같은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리며 가까워지고, 이윽고 거대한 흑마가 망연자실해서 굳어 있는 기사들 앞에 멈추어 섰다.

로기아 후작이 거칠게 투구를 벗어 던지고는 잔뜩 흥분한 말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뛰어내렸다.

그는 산사태라도 난 듯 무너진 잔해들을 둘러보다 서 있던 기사를 향해 걸어왔다.

[트롤 잔당들은 모두 처리했나? 산을 무너뜨린 건가?]

기사는 대답 대신 덜덜 떨리는 손을 올려 트롤이 반쯤 부숴놓은 성의 입구를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후작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세실!’ 그는 바닥에 떨어뜨린 투구를 주울 생각도 않고 곧장 내달렸다.

곧이어 도착한 야닉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트롤을 보고 단칼에 목을 베어 냈다. 확인 사살을 끝내고 나니 놓친 네 마리 중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뒤늦게 기사들의 시선이 박혀 있는 아성으로 욕설을 짓씹으며 뛰어 들어갔다.

야닉이 다시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팔에는 축 늘어진 어린 소녀가 들려 있었고, 기이한 각도로 고꾸라지는 가느다란 목을 연신 추슬러 안으며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치료 사제를 불러!]

* * *

“황자님은 세실 아가씨가 이미 돌아가셨다는 걸 알면서도 알리온 주교님을 불러 아가씨의 외상을 치료하게 하셨어요. 영주님은 딸을 구하려다 입은 팔의 상처를 제때 치료받지 않아 아가씨의 장례식 내내 열병에 앓아누우셨죠.”

무거운 침묵 속에서 포라킨이 잔에 담긴 사과주를 들이켜며 목을 축였다.

“그 후로 영주님은 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가, 그다음 해부터는 사원에서 밤낮으로 기도를 하다가, 이제는 아성과 사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고 계세요. 영주로서의 모든 의무를 내려놓으신 채로요.”

마지막 말을 뱉어 내는 포라킨의 입매가 비뚜름했다. 그러다가 몸을 뒤로 조금 물린다.

“새벽에 다니셔서 그런지 언제부턴가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아성의 유령’이라고 불리고 계신 모양이더라고요.”

그녀는 차갑게 식어서 거의 돌덩이처럼 굳은 빵을 놔둔 채 입가를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들은 아까보다 어둑해진 식당 안에 양초를 추가로 켜서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포라킨이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분위기를 환기하듯 운영팀에게 공지했다.

“그건 그렇고, 내일이면 한율 님과 한 주임님의 무기가 완성될 거라더군요. 모레부터는 한 주임님을 제외한 분들의 마법훈련을 재개하겠습니다. 주임님은 며칠 안 남은 트라야누스 입단시험을 준비하시면 되겠고요.”

“5일 남았어요.”

한 주임이 생각만 해도 긴장이 되는지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주임님이라면 될 때까지 도전하실 테니 미리 축하를 드려야겠네요. 그 망나니 같은 ‘루’도 통과한 시험이니, 주임님께는 별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포라킨 나름대로 농담을 던지는 모양새였으나 이미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는 쉽사리 전환되지 못했다.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나간 포라킨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유정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크게 한숨을 토해 냈다.

“불쌍하다. 영주님.”

“요새라고 해도 무조건 남공불락은 아닌가 보네.”

공 대리가 김유정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중얼거리자 이한율이 곧바로 ‘난공불락이요, 대리님.’ 하고 정정했다.

그거나 저거나, 하면서 툴툴대는 와중에 문이 열리더니, 야닉이 의외라는 얼굴을 하며 들어왔다.

“저녁 식사치고는 늦은 시간인데.”

인사를 하는 하녀들을 지나쳐서 어딘가 음울한 식당 공기를 느끼며 그가 다가왔다.

‘무슨 일?’ 말 안 해도 그의 눈빛이 그렇게 묻고 있었지만 한 주임은 텁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입 모양으로 작게 ‘나중에요.’라고 했더니 가만히 보던 그가 매끄럽게 걸음을 옮긴다.

야닉은 그대로 박 차장에게 다가가 점잖게 손을 내밀었다. 한번 겪어 본 적이 있는지라 박 차장이 기꺼이 손등을 내어주었다.

새털같이 가벼운 키스를 건네는 모습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이,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펴는 모습이 지극히 우아하다고 한 주임은 생각했다.

느긋하게 자신에게 걸어오는 모습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그녀는 의도적으로 눈을 깜빡여서 현실로 돌아오려 애썼다.

그는 다음 차례인 한 주임의 손등에 조금 더 무게를 실어 진득하게 입술을 눌렀다가 천천히 떼어 냈다. 충분히 마력을 주려고 시간을 끈 것인지, 자신을 조금 더 느끼라고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안녕, 친구.”

“아, 음.”

한 주임이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을 보면서 그가 속으로 조금 웃었다.

당돌하게 제국의 황자에게 친구 하자던 아가씨는 어디로 갔는지, 부끄러워하는 소녀만 앉아 있다.

그 모습도 보기 좋지만,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은 그것보다는 조금 더….

‘……아직 이르겠지.’

아쉬운 마음을 접은 야닉은 한 주임을 지나쳐서 김유정에게 갔다가, 실례. 하고 돌아섰다. 옆에 앉아 있던 공 대리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글거리고 있던 탓이었다.

김유정은 혼자만 손 키스를 못 받은 게 짜증이 나서 테이블 아래 공 대리의 얇은 허벅지를 콱 꼬집었다.

“오, 이분들이 이번에 새로 오셨다는 그.”

야닉의 뒤를 따라 처음 보는 중년 남성이 들어오자 하녀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전형적인 귀족 남성의 복장을 한 그가 치렁치렁한 맨틀 자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걸어 들어와 야닉이 했던 것처럼 박 차장에게 똑같이 손을 내밀었다.

“좋은 밤입니다, 레이디. 로엘 왕국에서 온 잡상인 이그리토 슈만입니다.”

남자의 넉살에 하녀 몇 명이 키득거리자 박 차장도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손을 내주었다.

“네, 안녕하세요.”

“잡상인치고는 돈이 너무 많지.”

야닉이 픽 웃으며 자리에 앉아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흑심 채울 생각 말고 이리 와 앉아. 슈만 후작.”

“벌써 들켰나요?”

그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박 차장의 손등에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추고는 돌아갔다. 그러곤 유쾌한 어투로 여전히 앉아 있는 운영팀을 힐긋거렸다.

“지루한 사업 이야기에 관심이 있으신 게 아니라면 저희가 이분들의 불청객이 되겠군요.”

에둘러 말하는 귀족식 화법이었지만 곧장 눈치를 챈 운영팀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닉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손을 들어 그들을 불러 세웠다.

“다른 일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동석하지. 여기 있는 이방인들은 이계에서 상단을 운영하던 자들이거든. 어떤가, 후작. 나는 이들의 의견도 들어 봤으면 하는데.”

그의 말에 이그리토가 태도를 싹 바꾸더니 눈을 반짝였다.

“오오. 이계의 상단이요? 그것참 반드시 고견을 들어 보고 싶군요. 어떤 물건을 취급하셨습니까?”

운영팀은 시선을 교환하다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누가 답변을 할지 눈치만 보는데, 염 부장이 선뜻 나서서 이그리토에게 악수를 청한다.

“염동환입니다. 제가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보기 드문 염 부장의 리더십에 운영팀은 속으로 하나같이 ‘오올’ 하고 입술을 옹송그렸다.

염 부장은 ‘디폴 디저트 카페’라는 그들에게 생소한 용어 대신, 다과를 곁들인 휴게공간이라는 기막힌 표현을 써 가며 열성적으로 영업을 뛰었다. 영업사원 출신이었던 그의 입담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그리토는 홀린 듯이 염 부장에게 빠져들었다가 소개가 끝나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하신 ‘카페’라는 곳은 부유한 귀족층을 겨냥한다면 다분히 사업성이 있을 법하지만, 글쎄요….”

고심할 때 나오는 버릇인 귓불을 문지르며 그가 중얼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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