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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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귀족들이 사는 곳은 서로 가깝지가 않아서… 먼 길을 왔는데 성이 아닌 영지의 상점으로 초대를 받는다면 무례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수도같이 큰 도시에 여러 귀족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야닉이 묻자 이그리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무립니다. 황자님이라면 한미한 가문에서 방문하는 대신 밖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자고 한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그 말에 야닉이 흠, 하더니 동의했다.
“그 역시 무례하다고 생각하겠지. 용건이 있다면 낮은 신분이 방문하는 게 일반적이니까.”
“그게 바로 제가 이 먼 길을 선물을 싸 들고 온 이유지요. 아크만과 로엘 중간에 ‘카페’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아, 물론 그랬다면 황자님께선 만나 주지도 않으셨겠지요?”
이그리토가 킬킬거리자 야닉도 따라서 웃었다.
안타깝지만 염 부장의 영업은 실패였다. 이 시대에서는 시기상조였고 현실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그리토는 뼛속까지 사업가였고 이대로 버리기는 아까운 아이템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사업의 방향을 획기적으로 보완할 방안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고 싶군요.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조만간 재방문할 수도 있을 정도로요. 아무튼.”
야닉은 그의 말이 단순한 거절이 아님을 알았다.
정말로 별로였다면 화제를 돌릴 때 이그리토가 저도 모르게 ‘그나저나’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제 버릇도 알지 못하는 이그리토는 야닉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운을 띄웠다.
델피온 왕국과 거래를 트려면 로엘과 델피온 사이에 있는 그리즐리 숲에 길을 내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아크만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는 성공적인 제안을 위해 서두를 길게도 끌었다.
“곧 있으면 눈보라가 몰아치는 시기가 오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통행로가 온통 서릿발로 뒤덮여서 짐 마차도 못 다니고 꼼짝없이 두 달간을 요새 안에서만 지내셔야 하는데, 저희 상단의 최대 거래처인 아크만이 고립되는 건 저희로서도 큰 손해란 말입니다.”
“매년 그러했으니 어쩔 수 없지. 겨울을 날 준비는 지금 왕창 사들이는 거로 하고 있고.”
슈만 상회가 요즘 어렵나? 하는 농담을 섞어가며 야닉이 가볍게 물었으나 이그리토는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분명 뭔가 부탁을 하려는 얼굴이었다. 이그리토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눈을 굴려댔다.
“해서 말입니다만, 지금 나 있는 경로가 로엘과 아크만의 최단 거리인 건 알지만 지형이 험해서 마물도 많고, 차라리 이참에 델피온 쪽으로도 새로이 길을 내면….”
곧바로 의중을 눈치챈 야닉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자르고는 돌연 술을 내오라 명했다.
하녀들이 서둘러 가장 독한 밀주를 가져오고 곧이어 값비싼 육두구가 잔뜩 올라간 베이컨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삽시간에 차려진 술상에 이그리토가 속으로 ‘망했군.’ 탄식을 뱉었다.
“여정이 고단했을 텐데, 먼저 한잔하지.”
“제가 술이 약해서…….”
“마셔.”
호의가 아닌 명령이었다.
이그리토는 눈을 질끈 감고 야닉이 손수 따라 준 술을 들이켰다. 목구멍이 홧홧하게 타올라 얼굴을 잔뜩 구겼다가 겨우 펴고는 최선을 다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황자는 평소에는 벌꿀을 바른 버터처럼 달콤하게 굴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는 제안을 받으면 마치 야수의 눈 같은 금안을 번득이면서 송곳니를 드러냈다.
꼭 지금처럼 말이다.
‘제국의 3황자가 얼뜨기라는 소문을 아직도 믿고 있는 등신들은 언젠가 큰코다칠 거야. 저 이빨에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이그리토는 목을 움츠리며 금방 굽실거렸다.
“첫날부터 제가 고루한 사업 이야기만 늘어놓았군요. 좋습니다! 오늘은 실컷 마시고 즐기지요. 늘 슈만 상회를 이용해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제가 가져온 선물 중에 여기 아리따우신 숙녀들을 위한 고급향유와 상아로 만든 머리빗도 있으니, 부디 즐겁게 사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대가 가져오는 선물이라는 건 온통 제안이고 뇌물이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에 이그리토가 손을 내둘렀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혀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물론 선물이 마음에 드신다면야 최소수량만으로도 최고의 가격으로 모시지요!”
* * *
목욕을 마치고 화장대 앞에 앉은 한 주임이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노크 소리에 대답했다.
그녀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가까워지는 발소리는 미엘라의 것이 아니었다.
“고급향유, 상아로 만든 머리빗. 써 봐야지?”
커다란 손과 어울리지 않게 아기자기한 물건을 들고 들어온 남자는 놀라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향해 망설임 없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미엘라는요? 아니… 미엘라는?”
친구를 하기로 한 날부터 야닉은 단둘이 있을 땐 편하게 말을 하라고 했는데, 아직 입에 붙지 않아서 자꾸만 실수가 나왔다.
그는 몸을 돌린 한 주임의 어깨를 잡아 원래대로 앞을 보도록 만들고는 향유 뚜껑을 열어 손바닥에 조금 흘렸다.
“밤 산책.”
“이 밤에요? 아, 이 밤에?”
“앞을 봐야지.”
야닉은 머리를 휙 돌리는 그녀를 재차 똑바로 앉히고 미끈거리는 향유를 양손에 부드럽게 문질러 마찰시켰다. 손바닥에서 미지근해진 액체가 향긋한 내음을 풍기며 머리카락 끝부터 조금씩 번져 나갔다.
“하녀도 데이트할 시간 정도는 있어야겠지.”
한 주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엘라가 데이트 상대가 있었구나, 하는 표정 위로 거울 속에 비친 야닉의 모습에 갑자기 숨이 막혔다.
머리카락을 뭉근하게 쥐었다 폈다 하며 향유를 발라 주는 남자라니.
그가 머리를 말려 주는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말려 주는 것과 매만지는 것 사이에는 그녀 기준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때는 이 정도로 부끄럽진 않았는데…….
거울. 분명히 몹쓸 거울 때문이다.
‘친구는 이런 것도 해도 되는 건가……?’
남자친구는커녕 그냥 친구도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더더욱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건 뭐였지?”
난데없는 질문에 한 주임이 응? 하니, 야닉이 아까 한 주임이 했던 ‘나중에요.’ 입 모양을 그대로 따라 했다.
“나중에 말해 준다며.”
한 주임은 아까 식당에서의 일을 떠올리고는 아! 하고 곧 벙긋거렸다. 예민한 얘기라 절로 뜸이 들여졌다.
“아성의 유령에 대해 포라킨 단장님이 말해 줬…거든.”
“흐음. 그랬군.”
그는 그저 수긍하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벌써 6년이나 지난 일이니 동요가 크지 않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가.
가만히 눈치만 보는데, 야닉은 향유를 조금 더 바른 다음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로기아 후작은 훌륭한 영주였어. 빼어난 무신이자, 노련한 책략가였고. 내가 열아홉 살에 아크만에 와서 넘칠 정도로 많은 걸 배우게 해 준 고마운 이지.”
“안되셨어…….”
“나도 3년 정도는 그렇게 생각했어.”
야닉이 어딘가 쓸쓸한 웃음을 흘렸다.
문득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수척해 보였다.
웃고 있지 않으면 무척이나 고단해 보였고, 궁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살이 빠졌는지 조금 더 선명해진 인상이 약간 날카로워 보일 정도였다.
잠깐 영지를 비웠을 뿐인데 그는 요새의 월동준비와 갖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로 혹사를 당하고 있었다. 그가 제시간에 맞춰서 식당에 온 적은 그녀가 요새에 온 후로 한 번도 없었기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막사에서 함께 잤던 날에 어린아이처럼 잠투정을 부리며 품속을 파고들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팔자 좋게 머리나 내맡기고 앉아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한 주임은 벌떡 일어나 야닉을 문까지 밀어내기 시작했다.
“뭐지?”
별안간 내몰린 야닉이 문 앞까지 당도하자 제 등을 억척스럽게 밀고 있는 가느다란 손을 잡아 세웠다. 그 와중에도 마력은 착실하게 흘러 들어갔다.
“가서 좀 자요. 아니, 빨리 가서 자. 어제 몇 시간 잤어?”
그가 이해를 못 한 얼굴로 멀뚱히 서서 한 주임을 쳐다봤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어쨌건 대답은 해야 할 듯싶어 ‘충분히.’라고 해 본다.
네 시간 정도면 충분히 잤지.
그는 아크만에 온 뒤로 다섯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모종의 이유로 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잠에서 깨는 습관이 든 까닭이었다. 한번 깨면 다시 잠들기도 어려웠고.
한데 눈앞의 여자는 도통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한 주임은 갑자기 심각한 얼굴을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냥 보내면 또 안 자고 일할 거야. 그냥 재우는 게 낫겠어….”
그러더니 쫓아낼 땐 언제고 이번에는 팔을 잡아끌어 침대로 데려간다.
“누워.”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 성격이건만, 야닉은 순간 당황해서 뭐? 하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지금 누우라고. 이건 유혹인가? 그렇다면 기쁘게 받….
“많이 피곤해 보이니까, 여기서 자라고….”
…그럼 그렇지. 아직도 그녀를 모르나 싶어서 쓴 입맛을 다시며 그는 침대에 맥없이 앉았다.
왜 갑자기 자라고 하는 건진 모르겠으나, 그로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기에 얌전히 친우의 명을 따르기로 했다.
그녀의 다음 행동이 궁금해져서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다시 화장대로 돌아가 덜 마른 머리를 대강 빗어 내린다. 그러고는 뚝딱거리면서 침대로 돌아왔다.
야닉은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웃음을 참았다.
“그대는 안 자?”
“나도 잘 거야. 너 자면.”
야닉이 김샌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뒤로 쓰러지듯 누워 버리자 침대가 반동에 크게 출렁이며 캐노피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무심히 옆자리를 툭툭 쳤다.
“이리 와. 친구도 잘 시간이야.”
한 주임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주인공처럼 고뇌했다.
그만큼 이성과 본능 사이 어딘가 중간쯤에서 헤매었다. 결국에는 현실로 돌아와 현대 상식으로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지만.
“이성 친구끼리는 같이 자는 거 아니야.”
다행히 이세계에서도 현대의 상식이 통했는지, 그가 산뜻하게 일어나서는 그녀의 이마를 노크하듯 가볍게 톡 건드렸다.
“……잘 아네.”
야닉은 불꽃이 사그라지는 벽난로 앞으로 가서 장작 몇 개를 던져 놓고 손가락을 튕겨 단번에 활활 타오르게 만든 다음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