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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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한율과 함께 완성된 무기를 찾으러 가는 날이었다.
살구잼이 듬뿍 들어간 파이와 염소젖을 섞은 밀크티로 아침을 먹고 마구간으로 걸어가는 길 내내 이한율은 말간 얼굴로 웃었다.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릴 때마다 한쪽에만 있는 보조개가 빠끔히 드러나는 것이 제법 귀엽다고 한 주임은 생각했다.
“어느 정도 준비해서 저도 주임님 따라 입단시험을 치르려고요.”
“용병단에 들어오게? 마법사는 따로 시험 같은 거 안 봐도 입단할 수 있다던데. 더군다나 한율 씨는 현자 급이잖아.”
한 주임이 기특한 눈으로 이한율을 보며 말하자 그가 조금 쑥스러운 듯 코밑을 문지르며 시선을 돌렸다.
“검술도 기회가 있을 때 배워 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주임님이 검을 쓰시기도 하고….”
“나 하는 거 보니까 재밌어 보였나? 재밌긴 해. 시험이라는 것도 궁금하고.”
두 사람이 산새가 지저귀는 아침 공기를 가르며 하하 호호 다정하게도 걷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미엘라가 끄응, 주먹을 쥐었다.
저쪽도 저쪽 나름대로 그림같이 잘 어울려서 몹시도 곤란했다.
어젯밤에 기껏 좋은 시간 보내시라고 자리까지 비워 주었건만, 야닉은 그녀의 방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훌쩍 나와 버렸다.
황자님이 생긴 거랑은 다르게 손이 느리단 말이지. 그녀는 짜증스럽게 손톱을 잘근거렸다.
‘이대로 세레나 공주님이 사망 처리가 되면, 황자님은 또 외간 나라 왕녀나 공녀랑 정략결혼을 하실 텐데.’
콧대 높고 오만한 귀족 영애 등쌀에 머리털을 쥐어뜯길 바에야 천사 같은 이방인 한 주임이 백배 천배는 나았다.
미엘라는 5년이 되려면 얼마나 남았는지 머릿속으로 헤아리다가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흠칫해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퀴버를 타고 요새 지하 입구에 다다른 한 주임이 문득 불안한 눈으로 이한율을 쳐다봤다.
한 주임이 어떤 걸 염려하는지 알고 있었던 그가 싱긋 웃었다.
“가는 길 알아요. 저번에 갔었을 때 외워두었거든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어? 그 미로 같은 길을 외웠다고?”
“네.”
똑같이 생긴 갈림길을 열 번도 넘게 마주쳤던 것 같은데 한 번 가 보고 외우다니, 혹시 이한율은 고사양의 안드로이드가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로봇치고는 일 처리가 너무 느렸다.
쓸데없는 상념을 날리고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통행 목적을 말하려는데, 안쪽에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이쪽을 향해 가까워졌다.
“멍청한 놈! 그게 어떤 건 줄 알고 떨어뜨려? 네 놈이 죽었다 깨도 못 만들 이 다위의 수작이란 말이다!”
“죄송합니다!”
밖으로 나온 드워프를 향해 병사들이 척! 경례하는 것을 깨끗하게 무시하며 다위는 말 위에 탄 두 사람을 올려보다가 또 인상을 구겼다.
“말에 탈 수 있다고 자랑하냐? 썩 안 내려와!”
별안간 이유 없이 화를 내는 모습에 한 주임과 이한율이 서둘러 말에서 내려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셨어요.”
“오늘 찾으러 오라고 한 말 못 들었어? 왜 이제야 느릿느릿 기어 오느냔 말이야. 무기를 갖고 싶지 않은가 보지?”
“아닙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순순히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에 다위가 혀를 한번 차더니 데리고 온 조수에게 턱짓을 했다. 움리족 직인은 땀이 말라 버석해진 옷 춤에 손을 잽싸게 문지르고는 잎갈나무로 만든 궤짝 세 개를 내밀었다.
맨 위에 있던 상자의 뚜껑을 열며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현자님의 지팡이는 남방의 호두나무를 써서 운디네의 눈물 결정을 박아 넣었습니다. 물 속성 마법 효과가 배는 좋아질 겁니다.”
이한율은 기다랗고 까만 지팡이의 상단 둥그스름한 곳 가운데에 박혀 있는 푸른색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홀린 듯이 집어서 머리 위로 어깨너비만큼 가로지르자, 결정이 반짝거리더니 거대한 물웅덩이가 지팡이의 이동 방향을 따라 하늘 위에서 기다랗게 둥실거렸다.
“네놈, 그거 망가뜨리면 다신 안 만들어 준다. 뭐,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여기 있는 모자란 놈이 죽을 똥 싸면서 만든 거니까 쓸 만은 할 거다.”
그의 말에 설명을 해 주던 직인이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었다. 다위는 곧바로 바람을 일으켜 이한율이 만든 물을 저 멀리 나무 위로 날려 버렸다.
한 주임이 호기심에 물었다.
“누가 망가뜨린 적이 있었나요?”
“아아. 있지. 레드 드래곤 발톱을 박아서 지팡이를 만들어 줬더니 그 자리에서 홀라당 태워 먹고는 뻔뻔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던 미친놈이.”
다위가 떠올리기만 해도 열불이 터지는 듯 씩씩거렸다.
뭐? 지팡이가 부실해? 맨손이 편해? 그 괴물 같은 놈이! 생각할수록 피가 거꾸로 솟는다.
같은 시간 집무실에서 이그리토의 물품 리스트를 들여다보고 있던 야닉이 귀를 만지작거렸다.
이한율은 막상 무기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주임님도 어서 열어 보라 눈짓했다.
한 주임은 떨리는 손으로 무엇이 들어 있는지 짐작 가능한 좁고 기다란 궤를 열었다.
“…우와.”
낡은 나무상자 안, 지푸라기 위에 놓여 있는 초라한 배경에도 그녀의 롱소드는 은은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크로스가드의 금장식은 조금 더 세밀하게 세공되어 우아함을 더했고 곧고 빛나는 검날은 끝이 뭉툭했다.
가만. 날이 뭉툭하다고?
한 주임이 의아한 얼굴로 다위를 바라보자 그가 시큰둥하게 ‘잡아 봐.’ 한다.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들어 올리자 하얀빛이 회오리처럼 검 주위에 몰아치더니 손잡이로 연기처럼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놀란 한 주임이 손을 떼려고 했지만, 빛이 전부 검으로 사그라질 때까지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단단하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멈추었을 때 롱소드의 검날은 더는 뭉툭하지 않았다. 공기라도 베어 낼 듯 잔뜩 예리하게 벼려진 날만 번뜩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각인이다. 그 검은 이제 너밖에 못 쓸 거야. 네 손에서 떨어지거나 다른 사람이 들면 목검이나 다름없어지지.”
다위가 내민 손에 롱소드를 건네주었는데 그가 잡자마자 검은 총기를 잃고 무딘 날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다가 다시 한 주임에게 돌아가자 주인을 환영하듯 영롱한 날을 빛내는 것이었다.
“오…….”
“자루를 잡지 않으면 날이 서질 않으니, 검집도 필요가 없지. 이 다위가 이 정도라고.”
한 주임은 얼른 허리춤에 롱소드를 꽂아 넣고는 크게 손뼉을 치며 호응했다. 찬사를 건넬 언변이 부족하니 행동으로라도 드워프를 추어올리려는 목적이었다.
다위는 기분이 좋아진 듯 콧김을 뿜으며 손등으로 직인의 팔을 세게 쳐서 나머지 상자도 재촉했다. 마지막 남은 상자는 그녀가 원치 않았던 물건이었다.
그것은 양궁 활과도 비슷한 크기의 장궁이었다.
“대나무와 참나무, 자작나무를 화피로 썼고, 손잡이는 롱소드에 썼던 고르곤의 뿔로 만들었습니다. 활시위는 바실리스크의 두 번째 탈피 비늘을 혹등고래 심줄과 엮었지요.”
한 주임과 이한율이 눈만 깜빡거리면서 반응이 없자 움리족 직인은 이방인들이 좋아할 법한 표현으로 정정했다.
“본성만 한 성을 두 채 정도는 살 수 있는 귀한 것입니다.”
그제야 입을 떡 벌리면서 벌벌 떨리는 손으로 상자째 건네받았다.
흠집이라도 날까 뚜껑까지 조심스럽게 밀어 닫자 이한율이 제가 들어 준다며 그녀의 손에서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이렇게 비싼 걸 그냥 막 주셔도 되는 거예요?”
“비싼 이유가, 구하기 어려운 상급마물의 재료들이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자재 수급만 원활하다면 공짜로 드리는 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다위 님께는 따로 수당이 지급되니까요.”
직인이 설명을 마친 뒤 공손히 다위에게 인사하고는 먼저 지하로 돌아갔다.
다위는 무기를 받은 한 주임과 이한율을 보다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이한율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기왕 온 김에 잘됐다. 너, 나 좀 그 지독한 냄새가 나는 짐승에 태워서 사원으로 가거라.”
“예?”
“드워프 말귀 못 알아들어? 나를 말에 태우고 사원으로 가라고!”
다위의 윽박에 이한율이 엉거주춤 그를 힘겹게 들어 올려 말 위에 앉히고는 자신도 뒤에 올라탔다.
드워프는 작은 체구와는 달리 성인 남성 못지않게 무거워서 두 사람을 태운 말이 뒤로 휘청거렸다. 한 주임도 얼른 퀴버에 올라 그들을 따라갔다.
안장 위에서 아래를 힐끔거리던 다위가 뒤에 앉은 이한율에게 물었다.
“너, 나처럼 귀한 몸이 고작 이런 쥐똥만 한 요새에 틀어박혀 있는 이유가 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첫째로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그 녀석이 알아서 척척 재료를 갖다주니 편해서고.”
다위가 말하는 ‘그 녀석’이 야닉을 가리킨다는 것을 이한율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다위는 저 멀리 보이는 포도밭을 가리키며 두 번째 이유를 읊었다.
“또 내가 원하는 만큼 술을 공짜로 준다고 했거든. 사원에서 만드는 술맛이 기가 막힌 이유도 전부 다 내 덕인 거지.”
다위는 숙성되고 있는 밀주의 상태를 확인하러 보름에 한 번꼴로 사원에 착실하게 드나들었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기에 이방인들에게 무기도 줄 겸 밖으로 나온 터였다.
신체조건 상 승마가 불가능한 그가 커다란 말을 ‘냄새나는 짐승’이라고 비하하는 건 자존심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다위까지 태운 말이 힘겨운 걸음을 옮기며 사원을 향해 언덕을 올랐다.
조금 뒤 포도밭에서 다위를 발견한 부제들이 흙을 털고 달려 나와 이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다위 님. 그리고 사자님들.”
말을 넘겨받아 한쪽에 잘 묶어둔 부제들은 익숙하게 양조 시설이 있는 곳을 안내했다.
제법 규모가 큰 석조건물 내부에서 이를 통솔하고 있던 신관이 웃으며 마중을 나왔다. 나이가 지긋한 신관은 한 주임과 이한율을 위해 친절하게 양조장을 소개했다.
“아크만에서 제조되는 술들은 모두 이곳에서 생산됩니다. 포도주와 에일, 그리고 다위 님께서 전수해 주신 벌꿀주까지요. 하나같이 특상품이지요. 특히나 포도주와 벌꿀주는 외국에서도 인기가 많아 우리가 신을 모시는 건지, 주신(酒神)을 모시는 형편인지도 모를 지경이에요.”
두 사람은 온기와 발효 내음이 가득한 공장을 두리번거렸다.
당화로라고 부르는 커다란 솥에서는 에일 제조를 위한 보리물이 자글자글 끓고 있었고 또 한편에서는 앳된 얼굴의 부제들이 발아 중인 곡물에서 쭉정이들을 쏙쏙 골라내고 있었다.
노신관은 이들을 밀주 숙성실로 데려갔다.
습한 공기에 독한 술 냄새가 진득하게 섞여서 냄새만으로도 취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한율은 곧장 한 주임을 살폈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눈만 초롱초롱할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