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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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이 국자를 들고 커다란 토기 하나에서 밀주를 담아 다위에게 내밀었다. 국자 안에서 동동 떠다니는 꿀벌 사체들을 다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쭉 들이켰다.
그의 입으로 벌 몇 마리가 빨려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한 주임이 흠칫 물러나는데, 다위는 짭짭거리는 소리를 내며 음미하다가 입 안에서 구르는 벌들을 익숙하게 바닥에 뱉어 냈다.
“나쁘지 않군. 내 집무실로 두 동이 보내.”
신관은 드워프가 하는 ‘나쁘지 않다’라는 표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합격이라는 뜻이다.
다위는 국자 안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켠 뒤 또 똑같이 퉤, 하고 건더기를 흩뿌렸다.
그들이 양조장을 나오며 걷는 동안 다위는 배웅을 나온 신관에게 들으라는 것처럼 투덜거렸다.
“이방인 놈들이 하도 난리를 피워서 봐주고 있지만, 원래 에일을 만들 때는 침이 들어가야 한단 말이야. 어린 여자애의 것이면 더할 나위가 없지. 그게 진짜 에일이라고! 뭣도 모르는 멍청한 족속들 같으니라고.”
“다위 님도 세상이 바뀌고 있는 걸 인정하셔야 하는 날이 올 겁니다. 그 방식은 벌써 백 년도 전에 없어졌지요.”
신관이 자못 뻔뻔하게 나오자 다위는 주황색 턱수염이 파르르 떨리도록 입매를 비틀었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어. 젖비린내 풀풀 나는 녀석이 말대꾸하고는, 쯧.”
흰머리가 희끗희끗 난 노신관을 어린애 대하듯 꾸중하는 다위의 모습에 한 주임과 이한율이 의아한 눈을 마주쳤다.
다시 말에 올라 다위를 지하 입구에 데려다주고 돌아서는데, 몸에 밴 말 냄새를 신경질적으로 털어 내던 다위가 불쑥 한 주임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여자! 그 노란 눈깔 녀석한테 화살촉에 쓸 가고일 한 마리만 가져오라고 전해. 한 마리면 충분하니까 또 몇 수레씩 가져와서 쌓아 놓지 말고.”
“네? 가고일…이요?”
“그런 게 있으니까 전하기나 해. 전처럼 쓰지도 못하게 시커멓게 태워서 가져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꼭 말하라고.”
“네에…….”
“대답 좀 크게 해! 메질 소리에 귀가 먹어서 네 개미 같은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고!”
“네!”
* * *
트라야누스 용병단의 입단시험 당일 아침, 한 주임은 해도 뜨기 전에 일어나 부츠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롱소드를 받은 다음 날부터 그녀는 새벽마다 조깅을 시작했는데 본성과 사원을 왕복으로 달리는 코스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뿐이지 그 험악한 비탈길을 뛰어오르다니, 미엘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임님은 도무지 휴식이라는 걸 모르시는 분 같아요. 왜 고생을 사서 하실까, 정말이지 알 수가 없어요. 제가 주임님이라면 해가 저 높이 뜰 때까지 늘어지게 자다가 일어나서 최고로 예쁜 드레스를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다음, 버터를 잔뜩 바른 거위구이를 먹고 초대장을 돌릴 거예요.”
그녀는 꿈꾸는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삶의 이상향을 조목조목 읊어 나갔다.
한 주임은 미엘라의 말에도 그저 담담한 얼굴로 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고 가죽 보호대를 벗었다.
“다른 영지에 사는 귀족 영애들과, 멋진 신사들에게 장미 향이 나는 초대장을 보내는 거예요. 그러면 본성에 있는 커다란 연회장에 수백 개의 초가 켜지면서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겠죠?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음유시인을 데려와서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도 좋겠네요!”
미엘라가 욕조에 물을 받으며 황홀한 얼굴을 하자 한 주임은 본성을 안내받았을 때 연회장에 대해 들었던 내용을 반추했다.
“우리 요새는 외져서 다른 귀족들이 많이 못 온다던데….”
“아이참, 어디까지나 상상이니까요! 방해하지 마세요.”
한 주임은 입을 꾹 다물고 미엘라가 어서 욕조 물을 받고 나가 주기만을 기다렸으나 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손짓은 여타의 귀족들처럼 여유롭고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어디까지 했더라. 아, 연회! 외국의 온갖 진귀한 음식들이 차려지고 고귀한 신분들이 가득 찬 연회장에는 너무너무 멋진 남자들로 가득 찰 거예요. 돈이 차고 넘칠 만큼 많은 상단의 젊은 수장, 남쪽 나라에서 온 이국의 구릿빛 왕자님, 거친 파도를 가르고 막 도착한 바이킹의 무자비한 선장!”
상상 속 멋진 남자들에 미엘라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데이트 상대가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한 주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신성 기사단의 전설적인 영웅, 금발의 팔라딘! 아아. 가슴 아프게도 이루어질 수 없는 우리 두 사람. 분수대에서 운명적으로 마주치지만 돌아설 수밖에….”
그녀는 마치 한편의 비극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슬픈 목소리로 허공에 손을 들어 올렸다. 얼마나 몰입했는지 눈가가 다 그렁그렁했다.
“저기, 나 이제 씻고 싶은데…….”
산통을 깨는 한 주임의 목소리에 미엘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욕조가 넘칠 듯이 차오르는 수도관을 얼른 잠갔다.
덕분에 따끈했던 물이 미지근하게 식어 버려 미엘라가 울상을 지었다.
“더우니까 그냥 씻을게요. 뜨거운 물 더 가져올 필요 없어요.”
한 주임이 애써 위로하듯 달래자 미엘라는 다급히 허리를 굽혀 죄송하다고 말한 뒤 욕실 가림판을 펼쳐 주었다.
한 주임이 위에 하나씩 올리는 옷가지들을 챙기며 미엘라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수도에 사는 귀족 영애들은 그런 파티가 일상이래요. 라비티움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꼭 가 보고 싶어요. 똑같이 허드렛일이나 하는 신세일지라도요.”
한 주임은 욕조 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음에, 4년 뒤에 다른 이방인들이 왔을 때 수도로 돌아가는 분들이 계시면 그때 미엘라도 함께 가요.”
“주임님도 4년 뒤에 수도로 가실 거예요?”
“아니,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갈 때….”
한 주임은 무릎을 끌어올려 안으며 황궁에서 출발했을 때 마차 안에서 봤었던 도시의 풍경을 떠올렸다.
수도, 수도라. 궁금하긴 하지만 가고 싶은지 묻는다면 글쎄, 잘 모르겠다.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제국의 수도일 뿐인데.
아크만 요새가 제법 마음에 들었고 벌써 정도 들었다.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 호화로운 방이 진짜 제 방처럼 느껴지는지.
‘밥도 맛있고, 사람들도 모두 친절하고, 일에 쫓기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친구도 있고.’
그녀는 어젯밤 식당에서 손 키스를 받은 것이 떠올라 좀 부끄러워졌다.
야닉은 친구가 되기로 한 다음 날부터 착실하게 저녁 식사에 참석하며 마력을 나누어 주었다. 어제는 특히나 오랫동안 손을 놔주지 않아서 아직도 손등에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저희는 몇 년씩 계약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관둘 수 있어요. 급여도 높은 편이고요. 전 이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주임님처럼 손 안 가는 주인을 모신다는 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죠! 덕분에 자유 시간도 많고 아주 만족스럽답니다!”
미엘라는 망상은 망상일 뿐이라며 한 주임이 다 씻고 나올 때까지 떠들어 대다가 목욕가운을 건네준 뒤 서둘러서 그녀의 머리를 말려 주었다.
오늘은 제 주인의 용병단 입단시험이 있는 날이라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은 다음 휘날리지 않도록 촘촘하게 땋았다. 동그란 뒤통수에서 앙증맞게 달랑거리는 모습이 귀엽다고도 생각했다.
‘주임님이 아무리 사내처럼 하고 다녀도 우리 황자님 눈에는 미의 여신처럼 보일걸요.’
그녀는 만족스럽게 자신의 결과물을 지켜보다가 나머지 옷과 장비들을 척척 챙겨 주었다. 그러다가 침대 아래 살짝 튀어나온 상자를 보고 물었다.
“정말 검만 가져가시면 되는 거예요? 활은 안 필요하세요?”
“아, 네. 검만 있으면 돼요.”
“아깝다. 진짜 예쁘고 좋아 보이던데.”
미엘라는 윤기가 흐르는 우아한 활대와 신비한 푸른빛에 둘러싸인 시위를 상기하며 침대 아래 덩그러니 방치된 롱보우가 좀 불쌍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별수 있나. 제 주인은 무기를 받아 온 첫날부터 침대 아래에 두고는 단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았다.
다위 님은 아무 무기나 만들어 주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희한한 일이다. 그녀는 물끄러미 상자를 보다가 나갈 준비를 마친 주인을 배웅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 * *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용병단의 수장님께서 1차 시험부터 참석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루이자는 이른 아침부터 시에나의 의복 시중을 받는 야닉을 보며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자유 용병들 사이에서 웬만한 고위 기사단에 버금가는 명성을 가진 바로 그 트라야누스 용병단의 입단시험이었다. 결원이 생기지 않는 이상 좀처럼 인원을 선발하는 일이 없기에 소식이 퍼지자마자 제국 각지, 심지어 외국에서도 사람이 몰렸다.
거인족의 후예들로 주축이 되는 용병단이니만큼 신분 제한이 없음은 물론이요, 최근까지 멸시를 받았던 드워프의 후손 움리족이나 짐승의 피가 섞인 수인족까지 너도나도 참가서를 들이밀었다.
덕분에 아크만 영내의 여관들은 빈방 없이 꽉꽉 들어차 대성황을 누리고 있었고, 방이 없어서 마구간이나 사육장에서 쪽잠을 자는 이들까지 생겨나고 있던 참이었다.
야닉은 영지에 방문하는 시험참가자와 외국인들을 위해 기꺼이 성문을 개방했고 참가자들에 한해 통행료를 면제시켜 주었다. 그들은 요새 성채를 제외한 영지의 모든 곳을 구경하고 둘러보며 자신이 자유민으로서 정착할 만한 땅인지 가늠했다.
인구수의 증가. 그것은 요새의 규모를 늘리고 세력을 키우는 데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다만 대다수가 거친 생활을 한 용병들이니만큼 치안도 강화했다. 성에 있는 위병의 수를 두 배로 늘리고 성가퀴마다 정예 궁수를 배치했다.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아크만 기사들은 매 시각 순찰을 돌며 기민하게 움직였다.
자유 용병들은 낮에는 제 무기를 손질하다가 저녁이면 술집으로 몰려가 에일을 마시며 시험에 관한 정보들을 주고받았다.
“참가자가 얼마나 늘었지?”
야닉이 오른팔을 내밀자 시에나가 능숙하게 구속구를 하나씩 채워 나갔다.
그의 팔목에 끼워진 세 개의 금속 팔찌가 동시에 제 임무를 수행하듯 서서히 마력을 빨아들였다.
“지난번보다 183명이 늘어 총 325명입니다.”
“그중에 이방인은?”
“한 주임님과 이한율 님 두 분입니다.”
루이자의 말에 야닉이 몸을 돌렸다.
“이한율도?”
“처음에 신청인 명단을 보고 스캄 님께 확인 요청을 드렸습니다만, 그냥 들어오라는 걸 거절했다고 하더군요.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치르고 싶다고요. 꽤 제법이죠?”
‘어지간히도 달라붙는군.’
단박에 이한율의 속내를 간파했지만, 루이자는 눈치채지 못하고 올곧고 건실해 보이는 청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다지 새겨듣지 않고 있을 때 문밖에서 시험 준비가 끝났다는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닉은 설원 늑대가 새겨진 푸른 맨틀을 두르고 저벅저벅 밖으로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