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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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시험은 참가자의 규모와 주변 피해를 고려해서 내성의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육중한 강철 성문 앞으로 수백 명의 참가자와 심사자들이 집결해 있는 모습은 마치 한 무리의 군부대처럼도 보였다.
그들의 정면에 마련된 단상 위에는 제국의 제3황자이자, 트라야누스의 수장을 위한 가제보가 설치되어 있었다. 양옆으로는 부대장 스캄과 아크만 기사단장인 로하겔 브리티지 경이 자리를 잡았다.
“일개 용병단 입단시험에 바글바글하게도 모여들었네.”
스캄이 하는 말과는 다르게 뿌듯한 얼굴로 참가자들을 보며 말하자 로하겔 경이 야닉을 힐끔 쳐다봤다.
“정말 다 보실 작정입니까? 최종시험만 참석하셔도 될 텐데요.”
“자네가 아직 뭘 모르는구만. 대장은 지금 한 명만 보고 있다고. 저기 저 이방인 말이야.”
스캄이 커다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우락부락한 용병들 사이 이질적으로 요요한 여인이 결연한 얼굴로 당당하게 껴있었다.
야닉은 굳이 부정하지 않으며 팔짱을 낀 채 한 주임을 주시했다.
참가자 중에 그녀가 유일한 여성은 아니었으나 다른 소수의 여성 용병들은 사내 못지않은 덩치거나, 신체 능력이 뛰어난 수인족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일반인에 가까운 여자에게 시선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주임의 근처에 있던 용병 몇 명이 기다렸다는 듯 휘파람을 불며 끈적한 시선을 던졌다. 개중에는 성희롱까지 서슴지 않는 이도 더러 있었다.
“허수아비 황자가 이 변방까지 고생해서 찾아온 우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가?”
“이봐, 아가씨. 곱상한 얼굴로 신랑감을 찾으러 나온 거야? 그런 거라면 내가 딱 맞는데.”
“끝나고 뭐 해? 혹시 늑대인간이랑 자 본 적 있어?”
“…….”
한 주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시선을 정면에 유지한 채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 정도 모욕이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참가 신청서를 제출할 때 담당 직원이 그녀를 보고 걱정스레 귀띔을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옆에 있던 이한율이 그녀의 주위에서 더러운 언사를 내뱉는 참가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머릿속에 구겨 넣었다.
같은 시간 야닉은 스캄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한 주임 뒤에 있는 바이킹이랑 대각선에 있는 파란 머리, 옆줄에 있는 개 수인은 떨어뜨려.”
“왜요?”
“인성 탈락.”
“…설마 여기까지 말소리가 들리는 거요?”
독수리만큼 시력이 좋은 대장이 설마 귀도 탈 인간 수준인가 싶어 아연히 물어보자 야닉이 그럴 리가, 하고 웃으며 손가락으로 입을 톡톡 쳤다.
입 모양을 읽었다고? 스캄이 새삼 넌더리가 난다는 얼굴을 하며 부하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이윽고 포라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리자 군중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입단시험 진행을 맡은 황실 부설 제1 연구소 수석연구원 헤르미네 포라킨입니다. 시험 일정과 방법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기계적인 목소리는 바람 마법을 타고 저 멀리 있는 참가자들의 머리 위까지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청각이 예민한 수인족들이 자극이 되었는지 귀를 쫑긋거리며 반응했다.
“1차와 2차 시험은 모두 오늘 진행하며, 1차에서 합격한 이들은 조를 구성하여 곧바로 2차 시험에 돌입합니다. 지난번보다 참가자 수가 폭등한 관계로 시험 내용이 대폭 수정되었으니 참고 바랍니다.”
포라킨의 말에 기껏 준비한 것들이 허사로 돌아간 이들의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그녀는 술렁이는 소리를 깨끗하게 무시하며 고저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1차 시험은 ‘픽시 잡기’입니다. 픽시는 대지의 정령인 노움이 부리는 하급요정입니다. 일정 시간 동안 날아다니는 픽시들을 사전에 지급해 드린 자루 안에 담으시면 됩니다. 참고로 픽시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분들은 즉시 실격입니다. 이 부분은 실격을 떠나서라도 노움의 저주가 따라온다는 건 잘 알고 계시겠죠. 알아서 조심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늘에 떠 있는 요정들을 어떻게 잡습니까!”
참가자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질문하자 주변이 술렁이며 동조했다.
포라킨은 제 말을 잘라먹은 용병을 잠시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 주위로 적당히 실드가 쳐질 겁니다. 질문은 제 말이 모두 끝난 뒤 부탁드립니다.”
부탁이라고 하는 사람의 표정치고는 심히 싸늘한지라 투덜거리던 이들의 소음이 금세 잦아들었다.
“무력으로 다른 참가자의 자루를 빼앗거나 협박해도 즉시 실격입니다. 오롯이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해결해 주십시오.”
포라킨은 지팡이를 내리고 조그맣게 ‘오롯이요.’ 중얼거리고는 야닉을 흘겨보았다.
시험 내용을 멋대로 바꿔 버린 속셈이 뻔해서 기가 찼지만 용병단 대장인 그가 하는 말이 곧 법인지라, 그저 한번 쳐다보는 것으로 소심한 반발심을 내비친 것이었다.
제 시선을 느꼈으면서도 뻔뻔한 얼굴로 빙글거리는 야닉을 뒤로하고 포라킨은 대기하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눈짓했다.
단상 위로 올라온 이방인 일곱 명이 포라킨의 지시에 따라 하늘 위로 두 손을 뻗었다.
포라킨이 가장 먼저 실드를 전개하자 이방인들이 그곳에 마력을 쏟아붓기 시작했고 곧이어 참가자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실드가 펼쳐졌다.
실드는 공중에서 얇고 넓게 퍼져나가 어느새 거대한 돔 모양으로 메마른 초목 위에 스르륵 내려앉으며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나갔다.
뒤이어 하인들이 집채만 한 상자를 들고 실드를 뚫고 들어가 뚜껑을 열자 동시에 금색으로 반짝이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픽시들은 곧장 하늘 위로 날아오르다가 실드에 막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무형의 실드가 마치 금가루를 뿌린 듯 일렁이는 장관이 펼쳐지고 이를 구경하던 영지민들에게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방을 둘러싼 구경꾼들로도 모자라 성벽 위 통로까지 구경을 나온 인파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톱니바퀴 모양의 성가퀴에 매달려서는 연신 환호성을 쏟아 내며 축제와도 같은 행사를 즐기고 있었다.
‘검을 잡아, 제인. 검을 잡아.’
야닉은 공중에서 손을 휘젓고 있는 한 주임을 보며 연신 뇌까렸다.
손깍지를 낀 두 손이 긴장감으로 빳빳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앞에 놓인 포도주를 입 안에 오래 머금다가 삼켰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대부분이었던 지난 시험과는 달리 몇 년 새 명성이 드높아진 트라야누스의 입단 소식에는 이름난 용병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봉토를 버린 방랑기사까지 있었다.
열 명 내외로 뽑는 시험에 이세계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조금 지난 한 주임이 덜컥 붙을 확률이란, 안타깝지만 없다고 봐야 한다.
여기 모인 용병 중 일부는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긴 백전노장일 테고, 절반 이상이 수없이 많은 실전경험을 쌓은 노련한 자들일 것이다. 이런 편법도 없으면 그녀가 입단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고 시험도 없이 편입시킨다? 그녀 성격상 제 발로 걷어차고 뛰쳐나오지만 않으면 다행일 정도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향해 날 선 비난과 원망을 쏟아 낼 게 분명한데, 그건 그것대로 고통일 것 같다. 그래서 아까부터 대놓고 혀를 차며 흘겨보는 헤르미네를 애써 모른 척하고 있던 것이리라.
그는 하인에게 손짓해 어느새 비워진 잔을 다시 채웠다.
픽시들은 사방이 막힌 것을 확인하자마자 용병들 사이를 빠르게 날아다니며 까르륵거렸다. 하지만 너무 작은 탓에 그들이 내는 웃음소리는 깨알만 한 구슬들이 유리병 안을 차르르 굴러다니는 간지러운 소리만 흩뿌려 댈 뿐이었다.
수인족들은 신체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서 공중을 공략했다.
표범의 뒷다리를 가진 이는 실드에 닿을 만큼 우아하게 뛰어올라 잽싸게 자루를 휘둘러 뭉쳐 있던 픽시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머리를 굴려 협업했다.
한 명이 팔을 이리저리 휘둘러 한쪽으로 몰면 다른 사람이 자루에 들어온 요정들을 덮쳐 얼른 끈으로 입구를 막았다.
몰이하던 사람이 제 차례가 되어 자루를 펼쳐 들었는데 제 몫을 챙긴 이가 입을 싹 닫고 내빼기도 했다. 눈 뜨고 코 베인 용병은 험한 욕을 뱉으며 배신자를 찾아 참가자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푸주 칼 같은 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요정을 때리고 쳐서 바닥에 떨어진 잔해를 주워 담던 무식한 용병은 곧바로 거한의 진행요원들에 의해 실드 밖으로 쫓겨나 버렸다. 그가 가까운 시일 내로 노움의 보복을 받게 되리란 걸 예상한 이들은 동정 대신 야유를 퍼부었다.
한 주임은 반딧불 같은 요정들이 벌써 절반 넘게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조급함에 휩싸여 무의미한 손만 계속해서 휘젓고 있었다.
픽시들은 아슬아슬하게 손 틈새로 빠져나가며 재밌는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빠르게 날아다녔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다가 이한율을 살폈다.
이한율은 처음에 서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크고 작은 물방울들을 만들어서 날아다니는 요정들을 물속에 가둔 뒤 자루 안에 차곡차곡 넣고 있었다.
자루가 물로 가득 차면 천 사이로 실금 같은 물 빼내기를 반복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망태기 같은 주머니 안은 그가 잡은 픽시들로 가득 차 희미한 빛을 뿜어냈다.
그는 얼마간 픽시 잡기에 몰두하다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한 주임의 시선을 느끼고는 한걸음에 달려왔다.
“제가 많이 잡아서 나눠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야, 그러지 마. 그건 싫어.”
차라리 떨어지면 모를까. 이한율의 친절이 고맙지도, 반갑지도 않았다.
그녀의 승부욕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다. 한 주임은 의도적으로 그와 멀리 떨어져서 다시 손을 휘둘렀다.
머지않아 단상 위에서 실드에 마력을 붓고 있던 이방인들의 손이 하나둘씩 떨려 오기 시작했다.
“단장님, 저희 슬슬 한계예요! 일이 분 정도면 끝날 것 같아요.”
“1분 뒤에 종료하죠.”
포라킨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방인들의 목소리에 짧게 공지하고는 한 주임을 살폈다.
그녀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기에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야닉을 쳐다봤다. 이 어이없는 시험을 기획한 남자의 표정은 일말의 감정 없이 고요하며 침착했고, 그저 한 곳만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떨어뜨리고 싶은 건지, 붙이고 싶은 건지.’
이쯤 되니 헷갈렸다.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한 주임을 보고 있자니 미리 귀띔해 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포라킨도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1분은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고, 그녀는 한 주임을 쳐다보며 아주 천천히 손을 내렸다.
실드가 사라지고 있었다.
가운데 천장에서부터 녹아내리듯 구멍이 뚫린 곳으로 픽시들은 모래시계 안의 황금가루가 쏟아지듯이 줄지어 빠져나갔다.
한 주임만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뛰었다. 실드가 사라진 틈으로 냉기 어린 바람이 불어와 땀이 맺힌 이마를 쓸고 지나갔다.
“안 돼! 돌아와!”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