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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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포기하고 숨을 고르고 있는 참가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위로 뛰어올라 닿지도 않을 요정들을 향해 소리쳤다.
팔이 빠질 것처럼 저리고 발바닥이 얼얼했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죽을힘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은 익숙했고,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 뼈저리게 겪어 왔다.
용병들은 그런 그녀를 어리석다는 얼굴로 주시했고, 곧이어 동작을 멈춘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만하지그래? 벌써 저만치 날아갔다고.”
누군가 비웃듯이 만류하는 목소리에도 한 주임은 계속해서 남은 한 마리라도 잡기 위해 뛰었다.
지금까지 잡은 게 몇 마리더라, 아마 열 마리도 안 될 것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처럼 자루를 열고 비질하듯 쓸어 담았어도 이보단 많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그러기엔 픽시들은 벌써 저만치 높이 떠서 숲을 향해 멀어지고 있었다.
‘한 마리만 더…!’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뛰어오르다가 중심을 잃고 그만 바닥으로 엎어졌을 때였다.
야닉의 눈빛이 맹수처럼 번뜩이며 날카로워졌다.
바닥에 넘어져서 망연히 앉아 있던 그녀의 어깨 위로 픽시 두 마리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난쟁이?]
[여기에서 난쟁이 냄새가 나.]
넘어진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롱소드 손잡이를 잡은 순간이었다.
검이 곧바로 제 모습을 드러내며 날을 세웠고, 희미하게 풍겨 오는 드워프의 흔적에 멀리 도망가던 픽시들이 방향을 틀더니 곧장 벌떼처럼 그녀에게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한 주임은 눈앞이 번쩍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 요정들이 쉴 새 없이 귓가에서 재잘거리는 통에 순간 기쁨보다는 간지러움으로 미칠 지경이었다.
[난쟁이야?]
[인간 같은데?]
[난쟁이는 어디 있지?]
그녀는 검 주위로 유독 많은 빛이 모여드는 것을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나, 난쟁이한테… 데려다줄까?”
[네!]
더 많은 픽시가 몰려들었다. 이제는 빛에 가려져 그녀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참가자들은 앞으로 나와 각자 자루를 확인받으십시오.”
머리 위로 포라킨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한 주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동시에 그녀를 따라 빛이 움직인다. 머리 위로 커다란 덩어리가 둥실거렸다. 한 주임은 연신 ‘난쟁이한테 데려다줄게.’ 하고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기다란 테이블에 나란히 선 진행요원들이 용병들에게서 자루를 건네받으며 양피지에 결과를 적고 있었다.
“한 마리씩 나와. 한 마리씩.”
[한 마리씩!]
[한 마리가 뭐야?]
빼꼼 열린 자루에서 붙잡혔던 픽시들이 킥킥거리면서 빠져나오기 시작하자 진행요원은 매서운 눈으로 재빨리 수를 헤아렸다.
“그루센. 열아홉 마리.”
참가자 이름 옆으로 잡은 픽시의 숫자가 쓰였다.
길고 지루한 검사가 이어지는 동안 한 주임은 맨 끝줄에 서 있는 자신의 순서가 오기도 전에 픽시들이 도망가 버릴까 봐 쉴 새 없이 다독였다.
검을 그러쥔 손이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저렸다. 참을성이 없던 일부 픽시들을 제외하고는 다행히도 그녀의 차례가 올 때까지 요정들은 크게 이탈하지 않고 잘 따라와 주었다.
진행요원은 난감한 얼굴로 한 주임의 머리와 어깨에 달라붙어 있는 픽시들과 허공에서 반짝거리는 덩어리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깃펜을 들고 있던 손이 갈등으로 머뭇거렸다.
“원래 규칙은 자루 안에 넣어와야 하는 건데요….”
“아… 너희 여기 들어갈래?”
한 주임이 조심스럽게 입구를 열었지만 픽시들은 자루 안을 빠르게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당혹감이 스친 그녀의 얼굴을 보던 진행요원이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어차피 전부 들어가지도 않을 양인걸요.”
진행요원은 한 주임 이름 옆에다가 점 하나를 쿡 찍었다. 1차 시험의 합격을 의미했다.
야닉은 그제야 등을 세우고 잔에 남은 포도주를 벌컥 들이켰다.
도박 같은 시험에서 그녀가 떨어져도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겠거니 했는데, 살아남았다. 아마도 1등으로 말이다.
저치 중에 드워프의 장비를 가진 자가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하긴, 그 비싼 걸 들고 다닐 수 있으면 팔아서 영토나 사지, 뭣 하러 힘든 용병 짓을 계속한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도박이 성공한 데에 커다란 만족감을 느꼈다.
단상 아래에는 다친 자들을 위한 치료 막사가 설치되어 사제들과 알리온 주교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제들은 노쇠한 주교가 직접 영지 밖으로 나와 마법을 쓰는 것을 한사코 말렸지만, 그는 아직 치유마법을 쓸 수 없는 신관들을 대신해서 솔선수범해야 한다며 지팡이를 짚고 사원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그런 그의 첫 번째 환자는 다름 아닌 한 주임이었다.
“괜찮은데…….”
“무릎에서 피가 철철 나잖아요!”
이한율의 유난에 막사로 끌려오듯 들어온 한 주임은 알리온을 보고 머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바짓단에 묻은 혈흔을 확인한 사제들이 의자에 앉히고는 허벅지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자 바닥에 찍힌 무릎 상처가 드러났다. 이한율은 제가 다 쓰라린 양 시린 얼굴을 했다.
“약초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아가씨는 2차 시험을 봐야 하니 마법을 걸지.”
알리온은 일어나려는 사제를 말리고 한 주임에게 다가가 회복마법을 걸어 주었다.
포라킨 외 사람에게 치료를 받는 것은 처음인지라 한 주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의 다리를 보는 것처럼 구경에 몰두했다. 그의 마법은 포라킨의 것보다 조금 더 녹음이 짙고 회복되는 속도도 빨랐다.
“주교님께서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치유 술사시랍니다. 한평생을 신을 모신 분이시니 신성력도 남다를 수밖에요.”
사제가 자랑스럽게 늘어놓고는 얼른 성호를 그었다.
눈 깜짝할 새에 상처가 사라지고 하얗고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자 이한율이 금방 고갤 돌렸다.
“……이제 2차 시험 준비하러 가요, 주임님.”
* * *
삼백여 명 가운데 1차 시험을 통과한 자는 총 50명이었고, 탈락의 고배를 마신 이들은 저마다 화를 내거나 풀이 죽거나 하며 돌아갔다. 분노를 참지 못한 일부는 험상궂은 얼굴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다니다가 부대 기사들에게 제압을 당하기도 했다.
한 주임과 이한율을 포함한 합격자 50명은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테이블 앞에 서서 한 사람씩 원통에 든 막대 제비를 뽑았다.
같은 색을 뽑은 이들이 무리를 지어 서자 포라킨이 앞으로 나섰다.
“2차 시험은 5명씩 10개 조로 구성되어 두 개 조가 전투, 승리하는 조가 위로 올라가는 방식입니다. 경기는 각 조마다 일대일 형식으로 진행되며 순서와 횟수의 제한은 없습니다. 자신 있는 분이 상대 다섯 명을 전부 제압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최종 우승 조는 다섯 명 모두가 입단시험 합격, 그리고 패배한 조에서 특출한 활약을 보인 다섯 명이 추가 합격입니다.”
포라킨은 빠르게 규칙을 설명한 뒤 단상에서 내려와 좌중을 훑었다.
“자신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지만 살인은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을 죽이거나 의도적으로 크게 다치게 하는 경우 자치령에 의거, 즉시 구금하겠습니다. 또한, 항복 선언을 한 상대에게 불필요한 공격을 가한 경우에도 실격 처리합니다. 항복은 말로 외치거나 무기를 버리고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리면 됩니다.”
그녀는 아주 엄중하고도 딱딱한 목소리로 경고한 뒤 참가자들을 둘러보았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유명인사 몇 명, 호승심으로 고조된 신예들, 잔꾀로 올라온 사람들, 그리고 한 주임 같은 운 좋은 자들까지.
단상 위에서는 스캄이 너도나도 들으라는 듯 조심성 없이 큰 소리로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우리 신입이 운 하나는 기가 막힌단 말이야? 어떻게 50명 중에 현자와 같은 조가 됐지?”
“…….”
야닉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1차 때와는 달리 여유로운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고 앉아 하인이 따라 주는 포도주만 음미할 뿐.
한 주임은 자신의 막대기 끝이 초록색으로 덧칠된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한율의 것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의 것 역시 조금 밝긴 하지만 같은 초록색이었고, 이한율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색깔 구분이 어려운 수인족 몇 명은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자신이 속한 조로 이동했다.
“같은 팀이라 다행이에요!”
“으응….”
한 주임은 찜찜한 기분으로 이한율에게 성의 없이 대답하고는 단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닉과 금방 눈이 마주쳤고 그는 근사한 미소로 응답을 해 왔다.
평소 같으면 민망해진 그녀가 먼저 눈을 피했을 텐데, 종류를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어 한 주임은 누군가 말을 걸어올 때까지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서 있었다.
“거기 두 사람, 이방인?”
여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허스키한 음성치곤 나긋한 말투에 한 주임은 무심코 돌아봤다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말을 건 여인은 스캄과 같은 거인족이었다. 부슬거리는 적갈색 머리를 정수리 끝까지 높이 묶어 올리고 가죽옷 위에 철갑 보호대를 찬 전형적인 전사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녀는 끼고 있던 무쇠 건틀릿을 벗어 겨드랑이에 대충 꽂아 넣고는 한 주임을 향해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이방인 마법사 둘과 같은 조라니, 우승은 떼 놓은 당상이겠어.”
악수를 청하는 그녀의 동작에 한 주임이 곧장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한 주임보다 두 배는 넘게 커다란 손을 씩씩하게 위아래로 흔들며 그녀는 시원하게 웃었다.
“내 이름은 미르. 최초의 거인 위미르에서 따온 진부한 이름이지. 우리 꼰대 작품이야.”
“한재인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이한율 씨예요.”
한 주임은 미르가 손을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겨우 손을 떼고는 얼른 이한율을 가리켰다.
이한율 역시 미르의 과격한 악수 짓에 멋쩍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오, 우리 다섯이 이제 트라야누스에서 한솥밥을 먹는 건가?”
“첫 경기는 내 차지다. 양보는 없어.”
그들과 같은 초록색 막대기를 뽑은 두 사람이 다가오며 한마디씩 하자 한 주임은 머리를 조금 숙여 인사했다.
머리를 조아리는 일은 평민이 귀족에게나 하는 행동이었기에 세 명의 용병들은 서로 어색한 시선을 교환하다가 이내 통성명을 주고받았다.
“내 이름은 블라산코. 열정의 나라에서 온 낭만 기사지.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끝이 꼬부라진 날렵한 콧수염을 쓸어내리며 블라산코가 여느 왕족과도 같은 자세를 취하며 인사를 건네 왔다.
향유로 멋들어지게 뒤로 넘긴 까만 곱슬머리가 햇살에 반짝거려서 한 주임은 부신 눈을 약간 찌푸렸다.
그다음으로는 이세계에 와서 처음 보는 모습의 인물이 다가왔다.
“용병 폰이다. 보다시피 수인족이다.”
폰의 샛노란 머리칼 사이로 뾰족한 갈색 귀가 쫑긋거렸다.
한 주임은 곱상한 그의 얼굴과 아까부터 뒤쪽에서 살랑거리는 풍성한 꼬리털을 보며 어렵지 않게 여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저는 그냥 한 주임이라고 불러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음.”
그녀는 싱숭생숭했던 마음도 잊고 폰의 귀를 한번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자그마한 키에 연신 꼬리를 좌우로 흔들어 대며 귀엽고 사랑스러움을 물씬 풍기고 있는 폰은 표정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진지하고 근엄했다. 한 주임은 차마 대놓고 보지는 못하고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