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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52화 (52/155)

52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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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막 함부로 들어오는 곳이 아닌데, 그치, 티보.”

“그러니까요. 제 말이요.”

두 명의 거인이 얼굴이 허옇게 떠서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고 한 주임이 그들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왜들 그렇게 놀라세요.”

“으응? 우, 우, 우리가 언제.”

그녀는 두 사람의 반응에 한층 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무언가 이상하다고 처음 느꼈던 것은 오늘 아침 운동을 했을 때부터였다.

여명이 채 가시지 않은 푸른 새벽을 뚫고 사원을 찍고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양조장에서 술을 받아 오던 사용인들의 대화를 들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저번에는 기초 체력으로만 시험을 치르더니 갑자기 생뚱맞게 내용은 왜 바꾸셨대?]

[나야 모르지. 황자님이 명령하신 일이니 따르는 수밖에. 안 그래도 다위 님이 픽시들 잡아 오느라 엄청나게 고생하신 모양이야, 이 시간부터 술 가져오라 난리시니. 밤새 에일을 두 통이나 드셨다더군.]

이때까지는 픽시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참가자 수가 많아져서 시험 내용이 바뀌었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의심으로 바뀌기 시작한 시점은 우연한 기회로 다위가 강화해 준 검을 잡았을 때였다.

다위가 픽시들을 잡아 왔다는 것도 그렇고, 검에 몰려든 그것들을 세어 보지도 않고 합격점을 찍어 준 진행요원도 그랬다. 이런 큰 규모의 시험에서 이렇게 대충 처리를 하나 싶어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의구심이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된 계기는 2차 시험을 위한 제비뽑기였다.

갑자기 암막을 씌운 테이블이 등장해서는 제비 막대를 뽑는데, 뽑은 막대기가 쓸데없이 길기도 했거니와 초록색이 다른 조원들과 색감이 조금 달랐다.

게다가 조 편성을 마친 뒤엔 진행요원이 빼앗듯이 막대를 가져가 버린 것도 다분히 의심스러웠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에 염료가 약간 묻어난 것이 결정타였다. 마치 제비를 뽑을 때 급하게 막대기에 덧칠이라도 한 것처럼…….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으세요?”

아까 제비를 뽑았던 수상한 테이블을 찾아 부대 관사까지 걸음을 했는데, 스캄과 티보가 저를 보는 표정은 가히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게다가 거짓말도 못 하겠는지 입을 꾹 다물고 도리질만 한다.

이쯤 되니 이렇게 허술하고 순진한 사람들에게 속은 저 자신이 말도 못 하게 형편없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한 주임은 잇새로 신음 같은 한숨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허접한 사기꾼들을 지나쳐서 건물 주위를 빠른 걸음으로 빙 돌았다.

슬픈 예감은 왜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지. 노래 가사가 절로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장작을 패는 사용인들 옆으로 출처를 알 법한 낯익은 크기와 높이의 나무 테이블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상당히 급하게 대충 만들었는지, 군데군데 못이 튀어나오고 구부러지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너무나도 의도가 분명한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걸 본 한 주임은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 하, 참나.”

경기 내내 몇 시간 동안이나 암막 테이블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누군가 저 안에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가 뽑은 막대에 다급하게 색칠을 했을 것이다.

그 괘씸한 작자가 누구건 간에 그를 책망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그저 상관이 시킨 일을 그저 얌전히 따랐을 테니까.

그 빌어먹을 상급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이 못 견디게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야닉 리버스.”

불경하게 입에 담은 이름과 동시에 주먹을 쥔 손에 빠듯하게 힘이 들어갔다.

“사자님, 이런 곳에는 어쩐 일이세요?”

한 주임을 힐끔거리던 남자 하인이 다가와 묻자 순간 그녀는 소각 예정인 쓰레기 더미에서 손에 잡히는 것을 대충 들어 올렸다.

“시, 실수로 제 물건이 여기 껴 있어서 찾으러 왔어요.”

“……그거를 다시 입으시게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의 따스함이 되어 주었을, 걸레짝에 가까운 방한 외투였다.

그녀는 사용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테이블을 가져가서 부수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 굳이 부수지 말라고 하진 않았다. 대신 증거들이 모두 팔뚝만 한 장작으로 변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머릿속으로 온갖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어떻게 화를 내야 내 분노가 제대로 전해질까.

그 능구렁이 같은 남자는 분명히 또 느물거리면서 어깨나 한번 세우고 말면 그만일 것이다.

방귀도 뀌어 본 놈이 크고 시원하게 잘 뀐다고, 이참에 염 부장에게 가서 있는 대로 성질부리는 법이라도 급하게 과외를 받아 볼까 하는 우스꽝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제대로 화를 내 본 적도, 큰소리를 쳐 본 적도 없었다.

분명히 이대로 가면 혼자 씩씩거리다가 할 말도 못 하고 어영부영 비참한 꼴만 당하고 돌아와서는 몇 날 며칠을 이불 속에서 괴로워할 것이 안 봐도 뻔했다. 이미 그런 과거가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누가 보면 뭐 그런 걸 가지고? 할지 몰라도, 화를 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중대하고도 지대한 결심과 결의가 필요한 법이다. 따지러 가는 경우엔 특히나 더 말이다.

한 주임은 입에 풀칠한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부글거렸던 과오를 되풀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단은 겉모습만이라도 위압감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녀는 온몸으로 화를 내는 사람처럼 가슴을 한껏 부풀리고 큰 보폭으로 본성을 향해 걸었다.

팔까지 크게 휘저으며 관사 건물 코너를 도는 순간, 달려오던 누군가와 부딪힘과 동시에 한 주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죄송합니….”

“악! 눈 똑바로 안 뜨고 다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진짜! 입단식 끝나기만 해. 내가 가만 안 둘 테니까! 제 발로 나가게 만들 거라고, 내가!”

한 주임은 멀거니 서서 따발총처럼 다다다 쏴대는 자그만 여자아이를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루야말로 한 주임이 조금 전까지 상상하던 바로 그 살아 있는 ‘분노의 화신’의 현신 같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하고는 이세계에 강림하신 화신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때마침 멀리서 야닉이 관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루가 곧장 달려가다가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는지 따지려는 것을 그만두고 돌아서서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한 주임은 루가 회색 건물 안으로 사라지면서 자신을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분명 키는 제가 훨씬 더 큰데, 루는 그녀를 꼭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연히 드는 모멸감으로 딱딱하게 굳은 몸을 이끌고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야닉.”

“연무장에 모여 있다 들었는데, 왜 여기 있어?”

“잠깐 얘기 좀 해.”

천진한 얼굴을 하던 야닉이 심상치 않은 그녀의 표정을 읽었다.

아, 역시 눈치를 챘나. 그럼에도 그는 뒷공작을 들킨 사람답지 않게 태연자약하게도 서 있었다.

* * *

그를 따라 들어선 집무실은 오랫동안 난방을 하지 않은 듯 싸늘하고 선득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시멘트 냄새와 필요한 가구 외에는 아무 장식도 없는 건조한 사무실은 눈부실 만큼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본성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태양처럼 눈 부시고 아름다운 남자가 익숙하게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아 용건을 묻는 광경이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부대 안에 있는 집무실이라 조금 삭막한 구석이 있지. 앉을 곳이 없는데 이리 올래?”

나긋한 말투로 내민 손에 평소 같으면 단전부터 간질거렸을 것이 틀림없겠지만, 오늘은 그와는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으로 가슴이 요동쳤다.

한 주임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에 시험 내용도 바꾸고 제비뽑기도 조작한 거야?”

“응.”

야닉은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명료하게 내뱉었다.

아니 그보다는, 밥 먹었어? 따위의 일상대화에 대답하는 사람처럼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대답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본인이 당황스러웠다. 변명할 생각도, 사과할 마음도 일절 없어 보이는 명쾌함이 화가 난다기보다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대가 들어오고 싶어 했으니까?”

가만히 서 있는 한 주임을 바라보며 말하는 야닉의 금색 동공에는 정말이지 그 이유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것뿐이랴, 도덕심 또한 없다.

“그건 불공평하잖아. 여기까지 먼 걸음 해서 온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그녀는 반박하려다 말끝을 흐렸다.

불현듯 이 나라의 사고방식이나 고정관념이 한국과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그렇다면 무턱대고 화를 내는 것도 능사가 아니지 않은가.

뭐가 문제라는 듯 무해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황자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는 잘못인 걸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고, 그녀는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지금 아무것도 아닌 일로 따지려 드는 걸까?

야닉은 상념에 빠져 있는 한 주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흐음, 하고 팔짱을 풀더니 책상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위험한 경고등이 머릿속에서 번쩍거리는 것 같았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왔다.

“그대가 무언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그와 한 주임 사이는 반 발자국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올라간 시선이 그에게 꽂힌다.

한 주임은 ‘퍼스널 스페이스’라고 부르는 영역이 넓은 편이었다.

버스나 지하철 줄을 설 때도 그녀는 앞 사람과의 간격을 넓게 잡는 부류였고, 불특정 다수가 그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했다.

타인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자들끼리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은 그녀에게 있어선 다른 종족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인 것이다. 어색하고, 껄끄럽다.

그러나 야닉은 한 주임의 영역 안으로 침범하는 데 있어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기가 막힌 것은 한 주임 역시 그것이 전혀 껄끄럽지도, 불편하지도 않다는 사실이었다.

“트라야누스는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사병대야. 누구를 뽑을 때 ‘공평’이란 잣대는 필요하지 않아. 고려해 본 적도 없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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