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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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타이르듯 말하며 두 손을 자연스럽게 한 주임의 허리에 감싸자 반걸음 정도였던 틈새가 급격히 줄어들며 두 상체가 닿았다.
거의 포옹과도 같은 자세에 그녀가 눈을 병적으로 깜빡거렸다.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살대는 것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지금 당장 나가서 모조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된다고, 나는.”
“내가 살던 곳에서는 그런 걸 두고 채용 비리라고 해. 처벌도 받을 수 있는 짓이야.”
한 주임이 차갑게 내려앉은 눈으로 그의 팔을 떼어 냈다.
순순히 물러난 그가 어깨를 가볍게 올렸다가 내리고는 짐짓 안타깝다는 어조로 입을 놀렸다.
“여기서 날 처벌할 수 있는 자는 없는데, 아쉽겠어.”
“……내가 할 거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야닉은 물론 한 주임 스스로도 놀랐다.
모르겠다. 어차피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온 말인데 아무렴 어떤가.
그냥 지금 이 순간은 뻔뻔하게 구는 얄미운 남자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고, 막무가내 짓을 하는 것에 대한 비난을 하고 싶었다.
그의 말이 맞는다 쳐도 그녀의 양심과 상도덕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이고, 비열했다.
“그대가? 어떻게?”
예상대로 그가 호기심을 번득이며 물었다.
궁금해 미칠 지경이니 어서 말해 보라고 하는 눈빛이 자명해서 한 주임은 입술 안쪽 살을 잘근잘근 물었다.
“나, 나가서 부정 채용이었다고 자백한 다음에 자진 탈퇴할 거야.”
다시금 책상 위에 앉은 야닉이 잠잠히 그녀를 바라본다.
그게 처벌인가? 하는 싱거운 반응이었다.
‘이게 아닌데.’
당황스러움이 역력히 내려앉은 얼굴을 갈무리하려는 것이 티가 나도 너무 나서 야닉은 겉으로 웃음을 흘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한 주임에게도 느껴졌다.
제가 무어라고 고귀한 황족에게 처벌을 운운한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야닉의 말이 맞다 해도 괘씸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는 형벌을 내리기로 했다. 이번에는 야닉이 참지 못하고 대놓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혈관이 흐르는 모든 곳에서 심장 소리가 울려댔다.
“너랑 이제 친구 안 해. 마력도 한율 씨한테 받을 거야….”
“…….”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창피해서 귀까지 시뻘게졌다.
거나하게 비웃음을 당한 뒤에 마음대로 하라는 목소리가 이미 들리는 것 같아서 절로 이가 맞물렸다.
차마 그것까지는 면전에서 듣고 싶지가 않아서 그녀는 몸을 돌려 빠르게 문으로 걸었다.
다급하게 문고리를 잡고 여는 순간, 등 뒤에서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조금 열린 문을 다시 닫는다. 시야에 유려하고 곧게 뻗은 손가락과 도드라진 힘줄, 적당히 그을린 피부와 잘그락거리는 링 팔찌가 차례대로 들어왔다.
돌아보자 미간을 잔뜩 좁힌 야닉이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시험은 몇 달 전부터 보기로 한 거라서 취소할 수가 없었어. 그대에게 시험도 없이 들어오라고 했으면 거절했을 거 아냐, 안 그래?”
“그야 당연….”
한 주임은 입술을 달싹이다 멈췄다. 내가 거절할까 봐 이런 짓까지 했다고?
“용병단에 들어오지 않아도 좋으니까, 뒤에 한 말은 없던 거로 해.”
“…뭐?”
“친구 철회와 이한율, 둘 다 없던 거로. 응?”
야닉은 이제 애처로운 눈길로 대답을 촉구해 왔다.
그까짓 게 왜 중요하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별똥별처럼 쏟아졌다.
내가 친구가 아닌 게 무슨 별일이라고, 내가 이한율에게 마력을 받든 말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고 일일이 따져 묻고 싶었다.
너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잖아. 부인이 있잖아. 나는 그냥, 찔러 보는 거잖아.
‘왜?’라는 그 한 음절이 목구멍에서 탁 막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물어보고, 대답을 듣고, 확신을 가지게 되면, 결과는 뻔했다.
그에게 자신에 대한 마음은 그냥 호기심이고, 자신은 마력을 가져가 주는 편리한 도구이자, 보살펴야 할 이방인이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물어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왜.’는 관계를 끝내고 싶을 때나 쓰는 표현이다.
친절하고 호감을 보였던 남자는 그 말고도 여럿 있었고 ‘왜’라는 질문을 했을 때 그들이 보였던 반응은 하나같이 틀에 박힌 듯 똑같았다.
[왜 저한테 자꾸 연락하세요? 여자 친구도 있으시잖아요.]
[뭐? 누가 너랑 뭐 하재? 어이없어서, 참나.]
펄쩍 뛰면서 화를 내거나 심지어는 뒷말까지 흘리고 다녔다.
이 남자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을까? 아닐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여기에서까지 버림받으면 그녀는 이제 정말로 갈 곳이 없다.
그가 싫지 않았다. 가까이 오는 것이 싫지 않고, 손을 잡는 것도 처음부터 싫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마음이 그를 남자로서 느끼는 건지,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이 받아들이는 건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아무렴 야닉이라고 해서 다른 남자들과 다를까도 싶었다. 한 주임은 혼란스러웠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불쌍한 척하는 남자의 심리가 궁금했다.
“……그냥 내가 혼자 관두는 걸로 할게. 검술을 가르쳐 줄 사람만 구해 줘.”
야닉이 그녀의 손에서 장갑을 벗겨내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마력을 나눠 주며 그거면 돼? 하고 묻는 눈빛이 너무 따뜻해서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도무지 세게 나갈 수가 없었다.
왜 나한테 잘해 줘? 날 어떻게 생각해? 네 마음이 궁금해.
용기가 없어서 차마 물어볼 수 없는 말을 주워 삼키고, 뭉실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니 어쩐지 뱃속이 먹먹한 기분으로 가득 들어찬 것만 같았다.
“이제 나갈까? 다들 기다리고 있겠군.”
다정한 손길로 장갑을 다시 끼워 주며 야닉이 말했다.
한 주임은 긴장감과 불안함을 떨치려 주먹을 한번 꽉 쥐었다가 펴고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진홍빛 노을이 선연히 내려앉은 연무장에서는 오늘 뽑힌 신입 단원들과 기존단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끌벅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관사에서 트라야누스 대장과 이방인이 함께 나오는 것을 목격한 이의 시선을 시작으로 곧 모든 용병이 자세를 곧추세우고는 일부는 긴장감으로 각을 잡고, 또 일부는 한 주임을 보고 히죽거렸다.
한 주임은 좌중을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기, 입단식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제가 개인 사정으로 입단을 못 할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려고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그녀는 시험조작을 폭로하는 대신에 개인 사정이라고 얼버무리는 걸 택했다.
아무래도 대장이고, 이 나라의 황자인데…. 걸어오면서 마음이 물러진 이유였다.
어리둥절해서 서 있는 단원들 앞에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일으키는데, 당황한 이한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본 지 거의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오늘 같은 표정은 처음이었다.
“결국 불었수?”
스캄이 건들건들 던진 물음에 팔짱을 끼고 있던 그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안 그래도 호되게 혼나고 나오는 길이야.”
기껏 얼버무려 줬더니만 대장, 부대장이라는 인간들이 무슨 짓인가 싶어 한 주임이 획 돌아봤다.
야닉은 야단을 맞은 철부지 학생처럼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웅성거리는 신입들과 단원들을 향해 능청스럽게 사실을 고하는 것이다.
“이한율과 같은 조에 넣었다가 걸렸거든.”
“야닉!”
한 주임이 아연한 얼굴로 소리쳤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입들을 포함한 용병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도 잠시, 여기저기서 비웃음 섞인 야유를 요란하게도 보내왔다.
“대장답지 않게 무슨 개망신이에요?”
“하도 끼고 다녀서 진즉에 입단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시험에 나오길래 뭔가 했잖아요!”
“떨어진 놈들은 열 좀 받겠는데? 붙은 나야 알 바 아니지만.”
역시 이세계의 사람들은 사고방식이 어딘가 다른 게 틀림없다.
머리 싸매고 고민했던 문제가 단순한 촌극이었던 것처럼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각하면 아예 본성을 나갈까는 생각까지 했던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순간이었다.
때앵! 때앵!
그 순간 성채 문루에 달린 종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아군이 귀환한다는 신호에 야닉을 포함해 용병단의 눈이 일제히 한 곳으로 날아들었다.
이윽고 내관문을 통과한 말 한 마리가 연무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브레고가 석양을 등지고 가까워지는 형체를 파악하려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역광에 드리워진 어슴푸레한 형상을 확인한 그가 자신감 없이 물었다.
“하랑?”
한 주임은 하랑의 등에 다른 사람이 엎어져 있는 것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익숙한 모양의 은색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는 정신을 잃었는지 하랑과 묶인 몸통을 제외한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반동을 따라 맥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 좀 도와주세요. 하아, 하아.”
하랑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용병들이 달려 나가 성미 급하게 기사를 끌어내리다가 하랑이 같이 딸려와 바닥으로 떨어질 뻔하자 그제야 두 사람 허리에 엮여 있던 기다란 넝쿨을 발견하고 그것을 우악스럽게 잡아 뜯었다.
“혼자 가는 게 아니었어…. 정말로 미친 짓이었다고요…….”
굴러떨어지듯 말에서 내린 하랑이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웅얼거렸다.
산속에서 노숙할 준비를 충분히 하고 갔음에도 그의 상태는 유난히도 꾀죄죄했다. 가시밭길에서 한바탕 구르기라도 한 것처럼 로브는 너덜거렸고, 그 아래로 뻗어 나온 바지와 가죽 신발은 온통 진창범벅이었다.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흙탕물로 세수라도 한 건지 이마부터 목까지 얼룩덜룩한 데다 볼까지 홀쭉해진 것이 그야말로 사흘은 굶은 거지꼴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놈은 또 뭐고? 왜 도로 데리고 와?”
스캄이 눈살을 찌푸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황실 기사를 보며 말하자 하랑이 앉은 채로 슬쩍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기사 나리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에요.”
황실 문장이 새겨진 투구를 벗겨내자 그 안에 드러난 얼굴은, 여기에 모인 사람들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이의 것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안면을 구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