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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54화 (54/155)

54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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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갑옷을 입고 있던 사내는 석고처럼 하얀 얼굴로 눈을 감고 있어서 꼭 죽은 것처럼 보였다. 목에서부터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정수리까지 이어진 고대 문자는 기다란 띠 형식으로 이곳저곳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한 주임과 이한율을 제외한 용병들이 곧바로 심각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창백하고 파리한 낯빛, 몸에 직접 새겨진 기이한 술식, 뼈 위에 바로 가죽만 얹어 놓은 듯 기아처럼 마른 몸.

풍문으로만 떠도는 흑마술사의 외형을 그대로 재현시켜 놓은 듯한 남자의 겉모습 때문이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야닉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한 주임을 제 뒤로 감추고는 서둘러 포라킨을 불러오라 명령했다.

“너… 뭘 주워 온 거야?”

야닉의 추궁에 숨을 고르고 있던 하랑이 어기적거리면서 일어나 다가왔다.

하랑은 흙바닥에 누워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를 보며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취발론 산에서 만났어요. 길 안내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요. 갑자기 사람이 목을 매고 있는 걸 본 바람에,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지릴 뻔했다니까요!”

“꼬라지를 보면 몇 번 지린 것도 같은데.”

스캄이 코를 틀어막으며 농담하는 와중에도 야닉은 미동 없이 남자를 주시했다.

위험감지기라도 달린 것처럼 몸을 사리는 데 귀재인 제 종자가 데려온 사람이라 더욱 신중한 눈으로 훑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남자의 귀 아래 혈관이 튀어나온 부분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 보니 미약한 맥이 느껴진다. 그는 짧게 고민 후 명령을 내렸다.

“일단 지하로 데려가서 팔다리를 묶고 가둬 놔. 혹시 모르니 재갈도 물려 놓고.”

의료병동에서 들것을 든 부제들이 달려와 의문의 남성을 실으려다 기사들에게 제지를 당했다.

검은색 철갑을 두른 아크만의 기사들이 은갑옷의 남성을 둘러메고 척척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것을 한 주임은 야닉의 어깨 너머로 멀거니 바라봤다.

“그리고 너는…….”

엉킨 머리를 박박 긁고 있는 종자를 한심한 눈으로 보던 야닉이 손을 휘휘 내둘렀다.

“좀 씻고, 뭣 좀 먹고, 그다음에 내 방으로 와.”

야닉은 행여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을까 한 주임을 하랑에게서 멀찌감치 떨어뜨렸다.

“스캄, 헤르미네가 오면 심문실로 가 있으라고 해. 내가 금방 갈 테니.”

갑작스러운 하랑의 귀환으로 어수선했던 연무장은 스캄의 지휘 아래 금방 도열을 갖추고 간단하게 입단식을 진행한 뒤에 빠르게 정리되었다.

일정이 모두 끝난 후 캄캄한 저녁이 되자 용병 고르칸이 이한율에게 친한 척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능청을 떨었다.

“당장 본성에 가서 짐 싸서 나와, 현자 양반. 오늘부터는 우리 숙소에서 자야지? 이제부터 한 식군데 말이야.”

고르칸의 말에 이한율의 얼굴 위로 급격하게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귀한 마법사를 마다할 용병대는 어디에도 없었고, 시험 내내 눈에 띄는 활약상을 펼친 그는 한 주임을 따라 탈퇴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제비뽑기했을 때 한 주임의 막대기를 보고 곧바로 야닉이 손을 쓴 것을 알았지만, 그걸 들킬 줄이야.

그는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포라킨을 보면서 잠깐 딴생각에 잠겼다. 일단은 좀 더 마법을 배운 후에…….

그래, 모든 일은 철저한 준비를 거쳐야 탈이 나지 않는 법이니까.

“단장님, 오셨어요.”

생각을 정리한 이한율이 만연한 미소를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 * *

레비탄 제국의 제2황자, 그의 침실은 화려한 여성 편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깊은 밤까지 불 꺼지는 일이 드물었다.

제국민에게 있어 황가의 명예나 고귀함 따위는 애저녁에 집어던진 탕아이자, 동시에 박애주의자, 팔방미인, 철부지 등으로 불리는 황족. 그가 바로 시즈 오베라였다.

“아크만에 갔던 기사들이 돌아왔다고?”

“네. 조금 전에 입궁해서 숙소로 복귀했습니다. 동행한 이방인 두 분은 이곳 2층으로 모셨고요. 내일 아침 폐하께 보고될 겁니다.”

“폐하가 아니라 모건이겠지.”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제 손으로 손수 가운을 두르고는 원탁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보고를 위해 이 밤에 침실을 찾은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여섯 번째 부인, 피에스타였다. 그녀는 시즈가 병 코르크를 열기 전에 한발 먼저 손을 뻗었다.

“제가 먼저 확인을.”

“당신이 대부분의 독에 내성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고통은 엇비슷하게 느끼는 거 아닌가?”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시즈는 피에스타를 말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대답 대신 코르크를 열어 코를 가져다 대고 향을 맡더니 손바닥에 조금 흘려 입으로 넣었다. 그녀의 행동에는 망설임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일절 섞여 있지 않았다.

“…축사에서 쓰는 약이 조금 섞인 것 외에는 이상 없어 보입니다.”

피에스타는 미간을 좁히며 손수건을 꺼내 입 안에 남은 잔여물을 침과 함께 뱉어 냈다.

시즈가 축사? 하고 약의 출처를 가늠하듯 골똘히 생각하다가 돌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자 침대 위에 곯아떨어진 이름 모를 거리의 여인이 몸을 뒤척거렸다.

피에스타는 침대 위에 두었던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 누군가 시드의 침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거릿입니다.

짧은 노크 뒤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별궁 하녀장이었다.

문을 열어 주는 이가 그의 여섯 번째 부인인 것을 확인한 마거릿이 침착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짧게 용건을 전달하고 나가는 하녀장의 몸짓은 군더더기 없이 빠릿빠릿하고 또 익숙해 보였다.

피에스타는 쓴 입맛을 다셨다. 웃느라 눈물까지 고였던 시즈가 후, 하고 손가락으로 눈가를 매만지는 것을 보며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힘주어 쥐었다.

시즈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슬리퍼를 벗고 가벼운 천 신발로 갈아 신고 있었다. 그러더니 거울 앞에 서서 흐트러진 금발을 손으로 대강 빗어 올리고는 목석처럼 서 있는 피에스타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귓가를 간질이는 시즈의 숨결에서 기이한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여성 취향이 한계도 없이 넓은 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제 남편은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뇌의 한 부분이 단단히 망가진 것이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부름에 응할 리 없다.

“날 위해 준비한 건데, 성의는 보여야지.”

시즈는 피에스타의 손에서 술병을 가로채고는 그대로 높이 들어 병째로 들이켜기 시작했다.

약을 탄 포도주가 남자의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침실의 적막을 깨부쉈다. 동시에 그녀는 심리적인 갈증을 느꼈다.

그가 가볍게 몇 모금 더 마시더니 피에스타의 손을 들어 친절히 돌려주었다. 남자의 얼굴은 재미있는 놀잇감이라도 발견한 아이처럼 천진하기 그지없었다.

“저기 쓰러져 있는 가여운 아가씨를 부탁해. 피에스타.”

문을 열고 나긴 시즈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멀어지다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참아 왔던 숨을 터뜨릴 수 있었다.

피에스타는 뜨겁게 타올랐던 가슴을 진정시킨 뒤 얼음장보다 차가운 얼굴로 돌아섰다. 그러고는 거칠게 이불을 걷어 내고 드러난 반라의 여인을, 싸늘한 시선으로 아주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발소리를 죽인 채 하인들이나 드나드는 별궁의 후문으로 나간 시즈는 미리 준비된 말을 보고 비웃음을 흘렸다.

편자도 박지 않고 어둠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시커먼 말이라니.

새삼 그녀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 기가 차고 우스워서 자꾸만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그는 인적이 없는 곳으로 고요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별궁에서 이어지는 메마른 장미정원을 지나 황실 전용 사냥터 숲을 가로질렀다.

수풀 사이를 헤치는 소리가 잦아들 때쯤엔 작은 오두막이 나온다. 황족들이 잡은 동물을 해체하고 가죽을 벗겨 내는 용도로 사용하는 도축장이었다.

나뭇결 마디마디 배어든 피비린내와 희미하게 풍기는 오물 냄새로 사냥터지기 외에는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는 그 선득한 공간.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면 늘 그랬듯 검은 베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싼 여인이 시즈를 기다리고 있다.

“모건.”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하얗고 마른 손가락이 베일을 벗고 돌아본다. 황태자비 모건 뤼시크였다.

“초대장치곤 과격했어. 돼지 발정제라니. 적어도 사람 취급은 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뺨에 얼굴을 묻으려는데, 모건이 고개를 슬쩍 돌려 피했다.

백연 가루를 잔뜩 바른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새어 들어온 달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났다.

“무엇이 우리 비 전하를 이리 심통이 나게 했을까.”

어르고 달래듯 상냥한 목소리에 돌아오는 건 질투로 벼려진 날 선 시선이었다. 모건은 시즈의 옷깃을 잡고 그의 얼굴을 바투 끌어당겼다가 매몰차게 뒤로 밀었다.

“계집질이 끊이질 않으니, 내 차례가 오기도 전에 지칠까 봐 손을 좀 썼어.”

“당신에게는 그런 것 따윈 필요 없다는 걸 잘 알잖아.”

그 말이 모건의 마음에 퍽 들었는지 입가에 진 가느다란 주름이 깊어지며 붉은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그녀는 말 잘 듣는 개에게 상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짧은 입맞춤을 하사하고는 짚단을 채운 버석한 이불 위에 신발을 벗고 다리를 올렸다.

“여기만큼 우리와 어울리는 공간도 없을 거야, 시즈. 더럽고, 추잡하고, 은밀한 밀실.”

모건은 제 발을 어루만지고 있는 시즈를 내려다보며 황홀감에 젖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같은 배에서 난 형제를 제 손안에 쥐고 있다는 정복감이 그녀를 더욱더 고양시켰다.

단조롭고 고루한 남편 체이스와는 달리 그의 동생 시즈는 젊고 유머러스하고, 또 능수능란했다.

“지금이라도 날 선택해, 모건. 나 말고 당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남자는 없어.”

푸른 혈관이 비치는 발등에 키스를 퍼부으며 시즈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모건은 가빠지는 숨을 고르며 웃음을 흘렸다.

“황제는 체이스가 될 거야. 나는 황후가 될 거고. 그리고 배 속에 있는 당신의 아이가 제위를 잇겠지. 그걸로 만족해, 시즈.”

“내 사랑은 잔인하기도 하지.”

꿀처럼 달콤한 말을 건네며 시즈는 모건에게 입을 맞췄다.

40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성숙한 여인의 목덜미에도 입술을 눌렀다가 한 손으로 가볍게 목을 쥐었다. 시즈는 잠시간 그것을 비틀어 버리는 상상을 하다가 손을 떼어 냈다.

사납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 모건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드잡이하듯 그를 잡아당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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