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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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궁의 응접실로 들어선 지웅과 상아의 얼굴에는 희미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4년 만에 돌아온 궁의 모습은 그들이 처음 소환되었을 때 기억하고 있던 것과 별반 달라진 점이 없었으나, 아크만에서 받았던 환대와는 사뭇 다른 사용인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들은 민원 처리를 위해 사무적으로 움직이는 직원들처럼 두 사람을 대하며 다소 냉랭한 모습으로 응접실로 안내하고는 금세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시 열린 문으로 들어온 이는 황실 재무관 중 한 명이었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듣자 하니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마물 토벌에서도 두 분의 활약이 대단하셨다고요.”
재무관은 경쾌한 말투로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으나, 형식적인 겉치레인 듯 진심이라곤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지웅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크만에서 4년이나 있었는데 그 정도로 뭘요.”
“그럼요. 거긴 더 위험한 것들도 많았고….”
상아가 얼른 맞장구를 쳤지만 재무관은 그런 것에는 큰 관심이 없는지 시큰둥한 반응으로 자신이 들고 온 서류를 내밀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4년 전 약속대로 두 분은 이제 레비탄에서 자유로이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 서명만 해 주시면 말이죠.”
지웅은 납작하게 무두질된 고급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아크만에서 이세계의 문자를 배워 두었기에 읽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헷갈리는 단어가 나오자 제 연인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상아는 지웅에게서 받아 든 서류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수도 라비티움에 3층짜리 저택 한 채와 열다섯 명의 사용인을 하사하고 세금을 면제시켜 주신다고요.”
“네.”
재무관은 여상히 대꾸했다. 상아는 그의 반응을 힐끗 보다가 아랫부분도 마저 읽어 내려갔다.
“매달 금화 30개분의 어음을 발행할 수 있다…. 30개요?”
상아의 말과 동시에 지웅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금화 30개라니, 그들은 이곳에서 맨 처음 화폐가치를 이해할 때 이용했던 방식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동화 한 개는 한국 돈으로 만 원 정도의 값어치였고, 은화는 십만 원, 금화는 백만 원 정도의 개념과 엇비슷했다.
집과 하인들을 공짜로 주고 세금도 면제에다 매달 3천만 원씩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내용에 두 사람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크만에서도 호화로운 숙소 생활에 매달 금화 열 개씩을 받아 왔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좋은 조건에 상아는 서둘러 내용의 말미 부분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이내 신중한 얼굴로 물었다.
“제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충성을 다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네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죠. 아크만에서도 주기적으로 원정에 불려 나가 마물이나 설인 야만족들을 토벌하지 않으셨습니까?”
재무관은 자신이 알고 있는 부분이 맞는지 가늠하는 모양새로 질문을 던졌다.
상아는 곧바로 아크만을 두둔하려다 지웅이 덥석 손을 잡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크만에서 원정을 나간 적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원자에 한했고, 야만족과는 진작에 평화협정을 맺었다.
야닉은 이방인들에게 숙식을 비롯한 모든 방면의 교육을 무상으로 지원한 데다, 그러고도 모자라 아크만 이후의 삶을 고려해 넉넉한 급여를 주고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는 약속도 해 주었다.
그 대가로 야닉이 이방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아크만의 내부사정을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 것. 입을 막으려면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자신들을 존중했다.
다행히도 대다수의 이방인은 그 뜻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3황자의 정치적 입장을 십분 이해했으며 정든 사람들이 있는 아크만을 아꼈다.
지웅은 재무관 앞에서 표정을 감추고 씩 웃어 보였다.
“네, 그럼요. 아크만이 힘들긴 했죠. 춥고 삭막하고 또 위험하기도 하고요. 저희가 수도로 온 이유가 그것 때문인데요.”
지웅의 답변이 충분히 납득이 되었는지, 재무관은 등을 소파에 기대며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서류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수도에서 편안하게 지내시다가, 제국이 부를 때 응답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상아의 질문에 재무관은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좌우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여러분 같은 마법사들이 필요한 일이라 봐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전쟁…인가요?”
지웅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재무관은 품속에서 깃펜과 잉크병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전쟁이 그리 쉽게 나던가요? 그저 제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한다는 형식적인 조항이에요. 원하신다면 아크만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만, 이 영광스러운 제안은 두 번 다신 없을 겁니다. 제 시간도 그리 넉넉지 않고 말이죠.”
아쉬울 것 없다는 태도로 피식 콧숨을 뿜는 재무관의 모습에 두 연인의 고민에 빠진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 * *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 시작되고 한 주임은 어제보다 한층 더 쌀쌀해진 새벽바람을 가르며 사원을 올랐다.
회사에 다닐 때는 밥 먹듯이 잦은 야근과 따라오는 피로로 아침 운동은 꿈도 못 꿨는데, 아크만에 오고 나서는 무척이나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 오고 있었다.
운동 후 아침 식사를 마치면 사원에서 신관이 진행하는 글공부가 기다리고 있다. 신기하게도 사용하는 언어가 똑같은데 글이 다르다니,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마법이 난무하는 세계니만큼 따지고 들기도 어려웠다.
한 주임은 머릿속으로 예습했던 철자들을 하나씩 되새김질하며 산길을 달렸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찾아오는 시기라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린 길 위에 입김이 기다랗게 뿜어 나왔다.
“하아.”
언덕 끝에 사원의 흰 건물이 빼꼼 드러나는 것을 보며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멀리서 움직이고 있는 인영에 초점을 맞췄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남자의 실루엣이었다.
발목까지 오는 기다란 블리오를 입은 사내는 옷처럼 하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사원을 향해 걷고 있었다.
순간 목덜미가 싸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어오고 있던 방향은 분명 서쪽의 낡은 성이었고, 그 성에 사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으므로.
‘아성의 유령.’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별명이었고, 그다음에는 본명이었다.
테오도르 로기아 후작이라고 했었나,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음영이 드리워진 얼굴이 드러났다.
후작은 무어라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걷고 있었고, 초점이 없는 눈은 지척까지 다가온 한 주임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단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산발한 은발 아래 반듯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는 눈 밑이 퀭하니 그늘져 있었으며, 볼은 움푹 패어서 기다란 선이 도드라졌다.
‘유령’이라는 별명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리만치 추운 날에도 기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얇은 차림새였다.
소매 아래로 뼈만 남은 것 같은 손목이 언뜻 비쳤다. 이름을 날리던 기사 출신답게 메마른 가죽이라도 제법 단단한 모양새였지만 총기를 잃은 눈동자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린 사람의 것이었다.
아무리 유령이라 불린다지만 살아 숨 쉬고 있는 그는 너무나도 추워 보였고, 울퉁불퉁한 손끝은 빨갛게 부르터서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였다.
그 처량한 모습이 못내 한 주임의 신경을 자극했다. 인류애인지, 동정심인지 모를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말을 걸어 보기로 작정하고는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어 들었다.
“…한천 구씨 십 대손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하. 부디 가엾은 영혼을 살피시고 보듬어 주소서. 세실에게 안식을 주소서.”
몇 걸음 앞까지 가까워지자 후작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는 작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같은 문장을 반복적으로 읊조리고 있었다.
말소리가 온전히 귀에 들어오자 한 주임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한천 구씨 십 대손?’
로기아 후작은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절박한 목소리로 이상한 주문을 외고 있었다.
뒤에 따라오는 말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들린 건 한국의 성씨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딸을 향한 기도.
오래지 않아 멍하니 서 있던 한 주임의 머릿속에 번쩍 섬광이 내리꽂혔다.
아. 설마….
말을 걸기로 작정했던 것을 그만두고는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떡하지. 말을 해야 하나? 그냥 못 본 척해야 하나?
포라킨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5년이나 저랬다는 건데, 내가 함부로 관여해도 될까? 주제넘은 짓이 아닐까?
후작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무엇보다 갑자기 초면의 이방인이 다가와서 하는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릴 리도 없었다.
‘괜한 오지랖일지도 몰라. 내가 뭐라고…….’
용기는 없는 주제에 양심 한구석이 쿡쿡 쑤셨다.
한 주임은 부러 헛기침하고 다가가서는 조용히 로브를 내밀었다. 겨우 쥐어 짜낸 한 줌의 용기였다.
그러나 호의가 무색하게도 로기아 후작은 아주 잠깐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내민 손이 정처 없이 허공에 맴돌았다. 깨끗하게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 한 주임은 조금 무안해져서 그가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힐끔거리며 로브를 도로 입었다.
주섬거리면서도 휘적휘적 걷는 후작의 뒷모습이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구한테 이야길 해야 하지.’
후작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떠오르는 사람이 야닉뿐인지라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내리막길을 달리는 발걸음이 마음처럼 무거워서 뛰는 둥 마는 둥 걸어 내려왔더니, 평소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는지 날이 이미 훤해져 있었다.
한 주임은 안뜰에서 본성으로 걸어오던 포라킨과 맞닥뜨렸다.
“단장님, 안녕하세요.”
“네. 좋은 아침입니다.”
전혀 좋은 아침 같지 않은 피곤한 기색으로 포라킨이 인사하더니 어색하게 눈치를 본다. 그러더니 답지 않게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벅벅 긁는 모습에 한 주임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포라킨은 우물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뗐다.
“…용병단에 입단하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제비뽑기까지 조작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아, 단장님이 그런 것도 아닌데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딱히 저에게 유감은 없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마음이 놓였는지 전에 없던 미소가 희미하게 입가에 걸리는 것이 보였다.
“용기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잘하셨어요.”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는지 똑바로 눈을 마주하고 전하는 포라킨을 보며 한 주임은 조금 쑥스러워져서 눈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