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56화 (56/155)

56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작품입니다. 저자와 발행처의 허락 없이 본 저작물로 무단전재,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 시 민사 및 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한 주임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그 옆을 포라킨이 따랐다.

“그나저나 아침 운동은 계속하고 계시나 보네요. 저로서는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단장님은 바쁘시잖아요.”

“안 바빠도 안 할걸요.”

무심히 내뱉는 말에 한 주임은 가만히 고갤 끄덕이며 식당으로 가는 동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맞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하랑이 데려온 그 기사분이요.”

퍼뜩 지하 감옥으로 데려갔던 낯선 사람이 궁금해져서 묻는 말에 포라킨이 여상히 대꾸했다.

“외상도 없고 저주에 걸린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안 깨어나더라고요. 몸에 새겨진 술식이 원인인가 싶어서 살펴봤는데, 전부 고대어로 되어 있어서 밤새 해독하다가 오는 길입니다.”

“뭐라고 쓰여 있었는데요?”

“내용은 기밀이라서요. 나중에 황자님한테 한번 여쭤보세요.”

말을 마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포라킨의 모습에 한 주임은 약간 민망해졌다.

그녀의 말은, 그러니까 야닉은 자기가 물어보면 기밀이라고 해도 말해 줄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뿌듯해서 기분이 갑자기 붕 뜨는 듯 좋아지는 것이었다.

‘저녁에 물어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포라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을 때, 혼자 조용히 샐러드를 먹고 있던 박 차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 주임은 산뜻하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차장님, 일어나셨어요.”

“응.”

어딘가 기분이 저조해 보였지만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아서 사과 주스만 홀짝거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박 차장이 포크를 힘없이 탁 내려놓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재인아, 나 혼자 이게 뭔지 싶다.”

영문을 몰라 네? 하고 묻자 박 차장이 마른세수를 하며 기다렸다는 듯 푸념을 늘어놓았다.

“벌써 다들 제 살길 찾아서 바지런히 쏘다니는데 나 혼자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아서.”

“아…….”

한 주임은 적당한 대꾸를 찾지 못하고 잔에 코를 박을 듯 얼굴을 가렸다.

확실히 박 차장의 말대로 운영팀은 빠르게 이곳에 적응해서 지내고 있었다. 자신만 봐도 이곳에 오기 전부터 용병 준비를 했고, 무산된 지금은 검술 수업을 받기로 한 상태였으니까.

김유정은 하루가 멀다고 주방에 틀어박혀 이것저것 만들어 내기 바빴고, 공 대리는 그런 김유정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이한율은 당당하게 트라야누스에 입단까지 한 데다, 유일하게 믿고 있던 염 부장마저 로엘 상인과 죽이 맞았는지 그와 함께 영지를 거닐며 사업 이야기에 한창이었다.

그런 동료들을 지켜보면서 박 차장이 어딘가 조급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뭔가 기운이 날 이야기를 해야 할 듯싶어서 눈만 데굴거리고 있을 때, 포라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분들이 빨라도 너무 빠른 겁니다. 이것저것 한 번씩 다 해 보신 다음에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방인분들이 대체로 부지런한 건 알고 있었지만, 여러분들은 유독 심한 편인 것 같네요. 아무도 닦달하지 않는데요.”

매몰찬 그녀의 말에 박 차장이 칭얼대는 아이처럼 입을 삐죽거렸다.

“몸은 편해도 마음이 안 편하니까 그러는 거죠오.”

“당분간은 몸도 편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부터 마법 수업이 재개되는 걸 모르고 계신 건 아니겠죠? 점심 식사 후에 연무장으로 늦지 말고 나오세요.”

포라킨이 테이블 위에 있는 샐러드를 앞접시에 수북하게 퍼 담으며 말한 뒤에 한 주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주임님도 오늘부터 검술훈련을 받으신다고요. 스캄 님 말로는 선생이 아이노스 출신 검사라던데, 이름이…….”

“블라산코 님이요. 고향에서도 유명했던 선생님이셨대요.”

한 주임이 얼른 대답하자 포라킨은 어딘가 미묘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아, 네…. 시끌벅적하기는 했죠. 뭐, 그래도 주임님이라면 딱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네요.”

외국까지 이름이 알려질 정도면 굉장한 실력자가 틀림없겠다 싶어서 안 그래도 한 주임은 한껏 기대 중이었다. 2차 시험 때 같은 조였지만 이한율이 전부 싹쓸이하는 바람에 그의 실력을 보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그녀는 서둘러서 식사를 마친 뒤에 방으로 돌아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수첩 앞쪽에 있는 시간대별 일정표에 일과를 정리해 나가는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오전에는 글자 배우기랑 마물 도감 수업, 점심 먹고 검술훈련, 오후에 복습이랑 예습하고 저녁 먹기.”

웅얼거리면서 하나씩 아래로 적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펜이 멈추었다.

한 주임은 적을까 말까 머뭇거리다 작은 글씨로 끄적였다.

야닉한테 마력 받기.

마지막 점까지 찍은 뒤에 그의 이름을 들여다보니 왠지 민망해져서 마지막에 쓴 것은 지그재그로 찍찍 그어 버렸다.

* * *

블라산코 키르도스.

레비탄 제국에서 멀지 않은 남서 방향에 자리한 아이노스 왕국에서 온 이 남자는 자신을 ‘낭만 기사’라 참칭하는 용병이었다.

한미한 귀족 가문 출신의 그가 제국으로 망명하기까지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한 주임에게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블라산코는 어쨌든 훌륭한 검술 선생이었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는 밝은 오후였지만 칼바람이 나부끼는 연무장에서는 비장한 얼굴의 한 주임과 그 앞에 선 스승, 블라산코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블라산코는 손을 보호하는 캡이 달린 기다란 검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말문을 열었다.

“내 고향에서는 숙녀들도 아주 어릴 적부터 검을 듭니다. 레비탄과 달리 대단한 마법사들이 많지 않은 나라가 대개 그러하듯이 말이죠.”

한 주임은 그가 말하는 ‘대단한 마법사’들이 이방인을 지칭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블라산코를 포함한 새 용병들이 그녀가 마력이 없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일 테니 굳이 먼저 나서서 약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이유였다.

“이 블라산코를 선생으로 고른 건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만 잘 따라온다면 다음 입단시험에서는 당당하게 합격할 수 있을 겁니다.”

블라산코는 톡톡 튕기는 듯한 독특한 발음과 억양으로 말을 했는데, 아무래도 사투리 같은 건가 하고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그는 수업 첫날, 검을 내려놓고 맨바닥에 앉아 스트레칭부터 시키는 체계적인 방식을 가진 교육자였다.

“유연함이야말로 몸을 지키는 가장 큰 무기! 이런 나무토막 같은 몸으로 검을 들었다가는 단숨에 목이 날아간답니다. 레이디.”

그는 다리를 부채처럼 펼치고 앉아 힘겹게 상체를 굽히고 있는 한 주임의 등을 팔꿈치로 가차 없이 짓눌렀다.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리가 이 정도로 벌어졌으면 현대인치고는 퍽 유연하지 않나 싶었는데, 그녀의 검술 선생은 기어이 제자가 오징어처럼 흐물흐물한 상태가 되길 원하는 것 같았다.

“이것 참 심각하군요. 다리가 일자로 벌어지고 가슴이 바닥에 닿기 전까지는 검을 들 생각은 말아요.”

블라산코는 우아한 몸짓으로 제 다리를 하늘 높이 쳐올리며 시범을 보였다. 마치 발레리노 같은 동작을 선보인 그가 습관처럼 얄팍한 콧수염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며 투덜거렸다.

“소문 듣고 겨우 입단했더니 잘생긴 황자는 코빼기도 안 비추고 귀찮은 아가씨만 맡게 생겼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괜히 검술 선생을 붙여 달라 야닉에게 부탁했나 싶어서 민망한 어조로 사과를 하는데, 돌연 블라산코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삽시간에 얼굴이 달아오른 그가 입을 틀어막으며 허둥지둥거렸다.

“아가씨, 아이노스 말도 할 줄 알아요?”

한 주임은 여전히 다리를 찢은 채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염소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모, 모르는데요.”

“아가씨 지금 아이노스 말을 하고 있다고요! 그것도 엄청 능숙하게!”

블라산코가 얼른 달려와서 한 주임을 일으키며 말했다.

허벅지 안쪽 근육에 얼얼한 통증을 느끼며 한 주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레비탄에서 소환한 이방인들이니 당연히 제국어만 할 줄 안다고 생각했던 블라산코가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서로를 의문투성이로 바라보던 두 사람은 연무장 한편에서 마법 수업 중이었던 포라킨에게서 명쾌한 해답을 들을 수 있었다.

“몰랐습니까? 이방인들은 대륙을 포함한 모든 언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언어이해에 대한 마법식이 소환진에 포함되거든요. 기껏 소환시켜 놨는데 말이 안 통하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녀의 말에 블라산코 못지않게 한 주임을 포함한 운영팀 역시 몰랐다는 얼굴로 포라킨을 쳐다봤다.

그녀는 한창 실드마법의 구성 원리에 열을 올리고 있다가, 불쑥 찾아든 불청객이 달갑지 않았는지 귀찮은 얼굴로 빠르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예를 들자면, ‘안녕하세요.’와 ‘안녕하세요.’ 제가 방금 말한 인사는 각각 제국 말과 아이노스 말인데요. 두 언어가 달랐지만 이방인분들께는 똑같이 들렸을 겁니다. 그렇죠?”

운영팀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발음하는 입 모양까지 똑같았는데, 다른 말을 했다니 온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뭐, 그런 겁니다. 언어이해 마법식은 고대에서 쓰던 방식을 그대로 따온 거라서 무슨 원리인지는 저희도 아직 몰라요. 고대 마법은 계승된 게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거든요. 옛날에는 훨씬 더 많은 마법 종류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연구원으로서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전부 전해지지 않은 거예요?”

김유정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묻자 포라킨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가설은, 엘프와 드워프 종족이 멸망한 계기가 되었던 ‘대 마물 전쟁’입니다. 혼돈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생겨난 마물의 총공세로 대부분의 고대 마법사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에 가까워요.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간과 정령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포라킨은 자신을 향해 있는 좌중의 학구열 어린 눈을 둘러보다가 선뜻 말했다.

“옛날에는 로엘 왕국과 델피온 왕국을 포함한 북부 일대가 전부 제국령이었지만, 아쉽게도 저는 구교 보수파가 독립해서 세운 델피온 출신인지라 제국 시절 역사는 자세히 모릅니다. 델피온에서는 건국 이전 역사에 관해서는 가르치질 않거든요. 차라리 사원에 부탁해서 역사 수업을 받으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네요.”

그녀의 말에 운영팀은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도리질했다.

포라킨은 제국에 속했던 로엘과 델피온은 현재까지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이들이 속한 서대륙 이외의 나라는 전부 고유의 언어가 있다는 말을 끝으로 한 주임과 블라산코를 쫓아내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