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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57화 (57/155)

57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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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용 무기와 말편자가 쌓여 있는 보급고 뒤쪽 공터로 돌아온 두 사람은 다시금 수업을 이어 나갔다. 한 주임은 이번에는 앞뒤로 다리를 찢는 고문 같은 훈련을 받고 있었다.

블라산코는 그녀가 제 모국어를 한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는 급격히 편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제인! 그래서 황자랑은 무슨 사이인 건데?”

“네?”

검집으로 한 주임의 어깨를 눌러 앉히며 블라산코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발그레한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훔치던 한 주임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하자 그가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황자가 시험까지 조작할 정도로 뒤를 봐줬잖아. 뭔데 그래? 그의 정부라도 돼?”

‘정부’라는 단어에 곧바로 등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한 주임은 슬금슬금 차오르는 부아를 애써 누르며 자세를 고쳤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친구예요.”

“흐응.”

블라산코가 그녀의 미간에 잡힌 주름을 보고 묘한 웃음을 흘렸다.

무어라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그 웃음이 심연까지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서 한 주임은 얼른 고개를 땅으로 굽혔다.

장장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스트레칭을 마친 후 그녀는 남의 것처럼 아무 감각이 없는 다리를 이끌고 본성으로 돌아왔다. 사실 여기까지 제 다리로 걸어온 것만 해도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검푸른 융단이 장황하게도 깔린 그레이트 홀을 지나 나선형의 우아한 계단 앞에 서자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리던 익숙한 그곳이 오늘따라 태산처럼 높고 가파르게 느껴져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홀 내부에는 수십 명의 사용인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한 주임을 향해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몹시도 친절한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눈 깜짝할 새 방까지 옮겨다 줄 수도 있을 테지만, 안 그래도 이것저것 나르느라 바빠 보이는 그들에게 차마 제 몸뚱이까지 날라 달라고 할 순 없었다.

한 주임은 두 팔로 계단 난간을 부여잡고 천천히 한 칸씩 오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자신을 발견한 하녀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왔다.

“어머! 괜찮으세요?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치료 사제님을 모셔 올까요?”

“아니, 아니에요. 그냥 방까지만 조금 도와주시면….”

이대로면 사람들 앞에서 개다리춤을 추며 계단을 오를 것 같아 그녀는 결국 도움을 요청했다.

저보다 키가 한참이나 작고 어린 하녀에게 몸을 기대자니 너무나도 미안했지만 2층까지 사족보행으로 기어오를 생각이 아니라면 그냥 도움을 받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반 층 정도 올랐을 때 끙끙거리며 부축을 하던 어린 하녀가 아무래도 혼자서는 어렵겠다 싶었는지 다른 도와줄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한 주임이 중간에 있는 층계참에 다다라 하녀의 손을 스르륵 놓았다.

“저기, 난 괜찮으니까 그만 가 보세….”

“앗! 황자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녀가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본 한 주임은 반사적으로 계단에 냅다 주저앉았다.

아……. 하필이면 지금 마주칠 건 또 무어란 말인가.

비단을 바른 고풍스러운 벽에 지대한 관심이라도 있는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부드러운 음성이 나직이 내려앉는다.

“여기서 뭐 해.”

계단을 내려오던 야닉이 한 주임을 발견하고 다가왔다가 그녀의 차림새를 보고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수업 첫날이었을 텐데, 무슨 교육을 어떻게 한 건지 로브 아래로 보이는 까만 바지가 온통 흙을 털어 낸 흔적으로 얼룩덜룩하다. 어디 넘어져서 다친 건 아닌가 하는 시선이 그녀를 빠르게 훑었다.

한 주임은 그제야 야닉을 발견한 것처럼 연기하다가 그의 바로 뒤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는 중년남성을 발견하고는 획 고개를 돌려 버렸다.

‘로엘에서 온 상단주라고 했었는데.’

흔치 않은 일이지만 이름이 순간 기억나지 않아서 인사도 하지 않고 그녀는 다시금 이글거리는 눈으로 벽을 바라봤다.

“어…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가던 길 가세요.”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변명이었지만 이미 튀어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그녀는 팔짱을 끼고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지나가. 제발.’

중앙 계단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고심에 빠진 모습을 희한하게 바라보던 야닉이 이내 흠, 하고 헛기침을 한다.

한 주임은 이제 그 기침이 무슨 뜻인 줄 알고 있다. 백이면 백, 웃음을 참을 때의 버릇인 것이다.

당장이라도 손으로 비단 벽지를 찢고 돌벽을 부숴서 뚫고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해 고뇌에 빠진 사람을 연기했다.

차라리 야닉 혼자만 있었다면 이 정도로 창피하진 않았을 텐데, 상단주 뒤로도 처음 보는 아저씨들이 기차처럼 줄지어 서서는 자라처럼 머리를 내밀고 기웃거리는 걸 언뜻 봤기 때문이었다.

“시에나.”

야닉의 부름에 계단 행렬의 맨 끝에서 따르던 하녀장이 잰걸음으로 빠르게 내려왔다.

그녀는 잽싸게 상황을 간파하고 튼튼한 팔뚝으로 한 주임을 일으켜 세운 뒤 그녀를 데리고 옆으로 비스듬히 비켜섰다.

풍만한 몸을 앞세워 한 주임을 슬쩍 가리자 야닉이 저를 따르는 이들을 데리고 마저 계단을 내려갔다.

덕분에 힐끔거리는 낯선 남자들의 시선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지만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안면이 숯불처럼 열렬히 타올라 후끈거렸다.

시에나의 든든한 시중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온 한 주임은 로브와 부츠, 장갑, 바지를 순서대로 벗어 바닥에 허물처럼 떨어뜨리고는 곧바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몸과 정신이 닳도록 닳아서 옷을 정리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카펫 위에 올라가 있는 신발을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밑창에 낀 돌가루라도 털어 놔야겠다 싶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미엘라에게 부탁할까.’

늘어지는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놓으며 잠깐의 유혹에 둘러싸였다가 곧 고개를 내저었다.

직조실 출신답게 옷을 짓는 솜씨가 뛰어난 미엘라는 틈나는 대로 직공들을 도와 방한복과 가죽 신발을 짓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다른 사용인들 역시 겨울을 날 준비로 요새 전체가 들썩거리고 있는 요즘이었다.

일꾼들은 창고 다섯 개를 가득 채울 만큼 장작을 패서 산더미같이 쌓아 올리고 마구간지기는 겨우내 말들에게 먹일 건초와 여물을 주문했으며, 오래된 성벽 틈 사이사이 서리가 끼지 않도록 석공들은 틈틈이 회반죽을 바르는 작업에 몰두했다.

주방 사람들도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생선은 상하지 않도록 얼리거나 절임으로 만들고, 도축한 고기들은 훈제해 두거나 건조해서 육포로 만들었다. 남은 가죽은 대장간에서 양피지를 만드는 데 쓰일 것이다.

사제들은 마지막 포도 수확이 한창이고, 여자들은 밀랍과 고래기름으로 성을 밝힐 고급양초를 잔뜩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안팎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한 주임은 혼자만 속 편하게 늘어져 있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옷이라도 스스로 정리하려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야.

야닉의 목소리였다.

한 주임은 순간 상의 아래로 허전한 맨다리를 깨닫고 재깍 구름 같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드, 들어와.”

왜 말은 더듬고 난리람…. 그녀는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은 채로 웅얼거렸다.

작은 소리를 용케 들었는지 곧바로 문이 열리고 훤칠하게 잘생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닉은 들어오다가 발에 차이는 신발을 보고 자연스레 한쪽 벽에 바로 세웠다. 그러고 나니 몇 걸음 앞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바지가 보인다.

한 주임은 귀까지 달아올라 그가 바지까지 주워들기 전에 얼른 말을 걸었다.

“손님들이랑 밥 먹으러 간 거 아니었어?”

“식당에 안내만 해 주고 왔어. 딱히 접대까지 할 귀족들은 아니고, 조합 상인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는 바지를 주워 의자에 걸어 놓고 벽난로로 걸어가 불을 지폈다.

불쏘시개로 장작을 몇 번 뒤적여서 활활 타오르게 만든 다음, 스툴을 들고 와 침대 근처에 내려놓았다.

미엘라가 여기저기 잘 쏘다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방에 불도 미리 안 때 놓고, 주인이 돌아왔는데도 코빼기도 안 비치다니. 야닉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가 의자에 앉아 손깍지를 무릎 위에 얹으며 짐짓 삐딱하게 물었다.

“이번엔 어딜 다쳤는데.”

사실대로 고하라는 올곧은 눈동자에 한 주임은 시선을 피하려 눈을 굴렸다.

두 시간 동안 다리만 줄곧 찢다가 돌아온 것뿐인데 혼자 심각해져서 물어보는 게 좀 재밌기도 하고, 실은 약간 웃기기도 했다.

그녀는 이불을 조금 더 끌어 올려서 호선을 그리고 있는 하관을 가렸다.

“다친 건 아니고… 그냥 근육통.”

입을 가린 채 웅얼거리는 소리가 작았는지 그가 응? 하며 얼굴을 바투 붙였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그에게 가까이 가면 어딘가 볕에 바삭하게 말린 이불 같은 내음이 난다. 얼굴을 파묻고 비비고 끌어안고 싶어지는 향기.

햇빛에도, 태양에도 냄새가 있다면 이와 같지 않을까 한 주임은 잠시 생각했다.

야닉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이따금 무척이나 집요한 구석을 드러내곤 했는데, 그것이 어쩐지 마냥 싫지만은 않아서 한 주임은 구구절절한 진실 대신에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굳이 안 다친 걸 확인해 보겠다고 이불을 들춰내려는 그의 손을 드세게 밀어 내다가 이내 붙잡혀서는 장난처럼 맞잡은 두 손으로 오늘 분의 마력도 나누어 받았다.

마력이 길고 진득하게 빠져나갈 때면 들을 수 있는 야닉의 깊고 아득한 한숨이 귓가에 간지럽게 걸렸다.

“배는 안 고파?”

그가 눈을 감은 채 던지는 질문에 한 주임은 음, 하고 가늠하다가 조그맣게 ‘고파.’ 하고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번쩍 눈을 뜬 야닉이 의자에서 곧장 일어났다.

“방으로 준비하라고 하지.”

일말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으로 문으로 나가던 야닉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입고 있었던 바지를 자신이 손수 의자에 걸어 두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다른 옷을 가져다줘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드레스룸으로 몸을 돌렸다.

자동으로 웬만한 상점보다 더 많은 드레스로 빽빽이 가득 찼던 세레나의 옷 방을 상기하며 안으로 들어섰던 그는 이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드레스룸으로 사용하는 곁방이 이렇게나 작았었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다음에는 뭐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놀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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