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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58화 (58/155)

58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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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큰 옷장을 열었더니 지난 임식당 환영식 때 입었던 자색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엔 미엘라가 ‘수선 전’이라는 메모를 붙여 놓은 오프숄더 드레스 두 벌이 보였다.

이 세 벌의 옷이 한 주임이 가진 드레스의 전부인 것이다.

미간을 좁히며 열어 본 다른 옷장에는 훈련용 가죽조끼와 어두운색의 바지 몇 벌이 끝이었다.

마지막 칸에는 후드가 달린 로브(황궁에서 지급받아 여행길 내내 줄기차게 입었던 그것)와 평민들이나 입는, 게다가 끄트머리가 해져서 실오라기가 잔뜩 튀어나온 누더기 같은 외투 한 벌이 다소곳이 걸려 있었다.

돈을 주고서라도 버려야 할 것 같은 이런 건 도대체 어디서 났단 말인가. 소각장이나 축사 바닥에 깔려 있어야 할 것들이 왜 옷장에 떡하니 걸려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놓인 커다란 함을 쳐다보고는 곧바로 눈썹을 찌푸렸다.

성이 오래되긴 했어도 내부는 어느 정도 신식으로 교체를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서랍식 옷장도 아니고 족히 백 년 전에 만들었을 법한 낡은 함이 아직도 있었다니.

그는 뚜껑을 슬쩍 열었다가 내의로 입는 하얀 튜닉과 네글리제를 보고는 묵묵히 도로 닫았다. 쓰고 있었네.

야닉은 문득 박 차장과 김유정의 옷장 상태가 궁금해졌다.

루이자 말로는 세레나의 옷이 하도 많아서 이방인들에게 몇십 벌씩 나누어 주고도 한참이나 남는다고 했던지라 별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는 금화 열 개씩 지급도 됐을 터였다. 영지에 나가서 쇼핑하지 않았나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황녀들을 비롯해 그가 아는 여자 중에 쇼핑을 싫어하는 여자는 결단코 한 명도 없었기에 그의 기준으로선 합당하게 드는 생각이었다.

갑자기 옷 방에 들어가서 뭐 하는 거지, 하고 한 주임이 목을 길게 빼고 보다가 퍼뜩 생각이 났는지 얼른 소리쳤다.

“나 바지 하나만!”

그녀의 명령에 멋이라고는 한 치 관련이 없어 보이는 시커먼 바지를 꺼내 든 야닉이 이리저리 옷을 살피다가 한 주임에게 건네며 슬쩍 물었다.

“이런 거는… 산 건가?”

“황궁에서 가져온 건데, 견습 기사 옷. 그냥 가져도 된다고 그래서.”

심지어 남성용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쩐지 발끝까지 오는 여성용 블리오가 아니라 짧은 걸 입고 다닌다 싶더니만, 한 주임은 지금까지 계속 남자 옷을 입고 다녔던 것이다. 황실에 여성용 전투복이 있을 리가 만무했으니.

왜? 하는 멍청한 물음은 이내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평균 여성보다 신장이 큰 편인지라 기성복 중에는 맞는 것이 없었던 거다. 당연히 맞춤으로 옷을 지어 주어야 했는데, 그것까지 생각지 못한 자신은 그야말로 무심함의 대명사가 아닐 수 없었다.

야닉은 씁쓸한 얼굴로 한 주임을 돌아봤다.

꾸물거리면서 이불 속에서 바지를 주워 입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는 서운함이라고는 일절 비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왠지 착잡해져서 야닉은 창가로 다가가 문을 조금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틈새로 스미자 그제야 머리가 돌아간다.

“내일 포목상이랑 재단사를 부를 테니 오후 수업은 쉬고 옷을 좀 맞춰 둬.”

그 말에 한 주임의 얼굴이 곧장 화사하게 밝아졌다.

야닉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으려다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다시금 복잡한 심경이 되어 버렸다.

“그럼 바지를 몇 벌 더 맞춰야겠다. 지금 건 미엘라가 매번 바느질을 해 줬거든.”

한 주임은 진심으로 반가운 얼굴로 해맑게 말했다.

기장에 맞춘 옷들은 전부 허리가 벙벙했는데, 재단사가 온다니 몸에 맞는 운동복을 제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녀는 단숨에 흥분상태가 되어 침대 아랫바닥에서 작은 함을 꺼내 들었다.

“아직 뭐 한 것도 없는데, 월급 받은 거로 옷 사면 되겠다. 야닉도 하나 맞춰 줄까? 원래 첫 월급은….”

신이 나서 상자를 열어 금화를 꺼내려는데, 커다란 손이 그것을 제지하고는 도로 닫아 버린다.

야닉의 입 밖으로 낮은 한숨이 깔렸다.

“옷은 추가 수당. 그러니까 이건, 그대가 쓰고 싶은 다른 일에.”

단호한 손길로 뚜껑을 닫은 야닉이 허리를 숙여서 함을 제자리에 놓다가 커다란 상자 하나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이건 뭐지?”

긴 팔을 뻗어 기어이 그것을 꺼내 들자 곧바로 한 주임의 얼굴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아, 그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뚜껑을 밀어내자 까만 광채로 빛나는 매끈한 활대가 드러났다.

야닉은 잠시간 말없이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한 주임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위가 아무에게나 무기를 두 개씩 만들어 주는 위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보나 마나 검은 보조고, 활이 진짜라는 소리다. 그런데 주무기가 봉인되다시피 방치된 모습이 조금 의아했다.

“일단 검술부터 배우고 활은 나중에 쓰려고…….”

수상하게 말끝을 흐리는 한 주임을 물끄러미 보던 야닉은 침대 아래 상자를 고이 돌려놓았다.

“드워프의 안목은 보통 사람과는 달라. 다위가 활을 만들어 주었다는 건 그대에게서 궁수의 자질을 봤다는 거겠지.”

띄워 주는 말에도 한 주임은 모종의 이유로 뿌듯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올라가는 입매로 대충 웃음 지으며 얼버무렸다.

“아!”

그러다가 퍼뜩 해야 할 말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야닉의 팔을 덥석 잡았다. 눈썹을 들어 올리는 그에게 그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오늘 아침에 사원 앞에서 영주님을 뵀는데….”

“아성의 유령을 봤어?”

“음…….”

짐짓 농담조로 웃던 그가 어딘가 심상찮음을 눈치채고 깍지를 껴 오던 손을 풀었다.

한 주임은 본인이 짐작한 것을 떠듬떠듬, 그러나 신중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믿지 않으면 말짱 허사가 될 일이라 생각하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만히 경청하던 야닉은 턱을 몇 번 만지작거린다든가, 이마를 짚어가며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한참의 침묵이 이어진 후에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구병호’라는 자가 있긴 했지. 4년 전에 황실 기사들을 따라 수도로 떠났고. 궁에서 하사한 저택에서 지낸다는 서신을 받은 뒤로 연락이 끊겼어.”

“그럼 그 사람은 지금….”

불안하게 저를 바라보는 담갈색 눈동자에 야닉은 노크하듯이 가볍게 이마를 톡 건드렸다.

“따로 알아볼 테니 걱정하지 마. 후작에게는 아직 말하지 말고. 알겠지?”

한 주임은 그의 손이 닿은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대는 밥부터 먹자.”

사용인을 부르느라 밖으로 나가는 야닉의 뒷모습을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찌 됐든 간에 사실을 알렸으니 홀가분해야 하는 게 맞는 건데, 퍽퍽한 빵을 꾸역꾸역 삼킨 듯 갑갑했다.

영주님 때문이 아니라 활 때문이야. 한 주임은 그렇게 정의했다.

성을 살 수도 있을 만큼 귀한 물건을 침대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는 사실이 새삼 양심을 콕콕 찔렀다. 롱소드처럼 건드렸다가 덜컥 각인이라도 될까 싶어 함부로 만져 본 적도 없다.

잘 보관하고 있다가 정말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 홀가분하게 넘겨줄 수 있다면 차라리 좋을 텐데. 한 주임은 의식적으로 바닥에 둔 시선을 거두고는 그대로 풀썩 누워 버렸다.

끔뻑끔뻑. 오래지 않아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 몸과 마음이 온통 바빴다.

저도 모르게 깜빡 선잠이 들었다가 식사를 가지고 들어온 하녀의 인기척에 다시 일어났을 땐 야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식사를 끝낸 상인들과 함께 다시 집무실로 가셨다는 하녀의 말에 그녀는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나 때문에 괜히 밥도 못 먹었네.’

베이컨이 한 움큼 들어간 양파 수프를 깨작거리면서도 연신 문 쪽으로 눈이 돌아갔다.

혹시라도 회의를 끝낸 그가 저 문을 열고 다시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최대한 천천히 식사를 이어 나갔지만,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질 때까지 그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중간에 한 번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빛보다 빠르게 대답했다가 문을 열고 들어온 미엘라를 보고 한 주임은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미엘라는 낙심한 얼굴로 스푼을 들고 있는 제 주인을 보고 갸웃거렸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에요.”

그가 끼니를 걸렀다는 사실이 유난스럽게도 마음에 걸렸다.

* * *

며칠이 더 지나고 내리 흐린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함박눈을 쏟아 낼 것 같은 잿빛 하늘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쓸쓸하고도 스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한 주임은 고개를 돌려 단단히 여장을 마친 종자들과 거대한 군마들, 그리고 자신 앞에 서 있는 용병들을 둘러보며 긴장된 숨을 들이마셨다. 코끝이 얼얼해지는 추위에도 그녀는 자세를 곧추세우고 정면을 향해 집중했다.

도열의 맨 앞에서 헤바투스 위에 올라탄 야닉이 토벌대를 두루 살피고 있었다.

“다들 단단히 껴입었어?”

새하얀 명마 위에 올라탄 그의 자태는 원정을 나가는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호버크나 강판 갑옷 따위로 무장하고 그 위에 두꺼운 로브나 모피를 두른 단원들과는 달리, 야닉은 강변에 봄나들이라도 나가는 사람처럼 가볍디가벼운 차림새였다. 갑옷은커녕 비단으로 짠 블리오 위에 두른 먹색 맨틀은 누가 봐도 겨울용이 아니었다.

용병대의 관사 소속 하녀들은 바람에 옷자락이 나부낄 때마다 슬쩍슬쩍 드러나는 그의 날씬한 복부를 곁눈질로 훔치기 바빴다. 그나마 허리춤에 찬 바스타드 소드 한 자루가 그가 검사라는 것을 알려 주는 듯했으나, 그마저도 옷차림 때문인지 허리띠에 달린 장식품쯤으로 보이기 일쑤였다.

계절감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야닉의 복장에 식겁한 이들은 새로 뽑은 용병들뿐이었다.

신입인 그들은 이번 토벌에서 열외였던지라, 병영 한구석에 모여서 정신 나간 복장으로 원정을 떠나는 대장을 보고 당연하다는 듯 수군거렸다.

개중에 가장 아연실색한 사람은 거인족 미르였다.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펄쩍 뛰었다.

“저러고 설원을 달린다고? 트라야누스 대장은 발가락이 여덟 개쯤 달려 있어서 동상으로 몇 개 정도는 떨어져 나가도 괜찮은 거야?”

절반은 진심인 듯한 미르의 말에 수인족 폰이 뾰족한 귀를 쫑긋거리며 눈살을 구겼다.

“대장이 마물도 아니고 발가락 여덟 개가 웬 말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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