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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59화 (59/155)

59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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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반문하는 폰을 뭐 씹은 얼굴로 보던 미르는 이번에는 블라산코를 향해 투덜거렸다.

“어이 검술 선생, 같은 신입인데 이한율은 토벌대에 들어가고 우리만 쏙 빠지는 건 좀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더군다나 제인은 용병도 아닌데 껴 있고 말이야.”

“저는 마물이라면 치가 떨려서 말입니다. 아늑한 요새에 머무는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요.”

블라산코가 실크 손수건을 꺼내 금방 서리가 내려앉은 콧수염을 닦아 내며 여상히 대꾸했다. 다시 차곡차곡 접어 안주머니에 넣으며 그는 토벌대 맨 뒤에 서 있는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산만 한 덩치의 남자들 사이에서 한 떨기 수선화 같은 가녀린 자태였지만 그녀의 눈은 누구보다 진지하고 결연에 차 있다. 며칠 겪어 보지도 않았건만 블라산코는 한 주임이 그간 가르쳤던 어떤 제자들보다도 진심으로 임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이노스에서 선생 노릇을 할 때 만났던 제자들은 옷이 더러워진다며 대리석 바닥에서조차 엎드리는 일을 꺼렸던 귀족 여식들이었다. 마지못해 따라 하다가도 금방 얼굴을 구기면서 검은 언제 드느냐고 닦달하기 일쑤였다.

고귀한 신분들이니 언제든 목숨 바쳐 자신을 지켜 줄 가신 기사들이 있기에 부릴 수 있는 투정이었다. 검술은 그저 예의 신부수업의 필수과정 중 하나일 뿐으로 여긴지 오래라 어찌 보면 방만한 태도는 당연했다.

우아한 자세만 설렁설렁 가르치던 그에게 있어서 한 주임은 당연하게도 가르칠 맛이 나는 욕심나는 제자였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말간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 밭은 숨으로 네! 네! 하는 그 기특한 모습이라니. 내가 황자였어도 이뻐 죽지! 어느샌가 흡족한 웃음이 얼굴에 만연해 있는 블라산코였다.

‘게다가 정말로 재능이 있단 말이야. 잘만 가르치면 아주 물건이겠어.’

그는 아주 오래간만에 의욕이 들끓었다.

토벌 원정대는 총 서른이 안 되는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아크만 기사단의 수습기사 5명과 시중을 드는 종자 10명, 트라야누스 단원 10명이었는데 그중 다섯은 루와 이한율을 포함한 수습 용병들이었다.

소대에 포함된 선임 용병 브레고는 저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는 스캄을 향해 윙크를 날리며 부러 그의 화를 돋웠다.

지루한 원정길에 여자가 둘이나 껴 있다니, 귀신같은 몰골의 헤르미네 포라킨은 제외하고 까만 콩 루도 어쨌든 생물학적으로는 여자가 아니던가. 거기다가 대장의 여자긴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운 미인 이방인까지 있으니 심심할 겨를이 어디 있을까 싶어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는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한 주임의 옆에 다가가서 불쑥 말을 걸었다.

“여기 북쪽 일대는 매년 큰 눈보라가 한 번씩 꼭 찾아옵니다.”

“네? 아, 네.”

앞만 보느라 그가 지척까지 가까이 온 줄도 모르고 있던 한 주임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브레고는 개의치 않고 신나서 속닥거렸다.

“눈보라가 그치면 사방에 눈이 사람 키만큼 쌓여서 한동안은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되죠. 사람이고 짐승이고 코빼기도 안 보이니, 숲의 마물들은 눈이 녹을 때까지 내내 쫄쫄 굶는 거예요.”

한 주임은 미엘라에게 들어서 미리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티 내지 않고 경청하는 척했다.

“그러다 보니 손가락만 빨고 있던 놈들이 날이 풀리면 눈이 뒤집혀서는, 먹이를 찾아 평소에는 발길도 않던 곳까지 내려온답니다. 예를 들면 맛있는 먹잇감이 잔뜩 모여 있는 우리 요새 같은 곳 말이에요.”

아리따운 아가씨가 새파랗게 겁에 질린 얼굴을 기대하며 말한 듯했으나, 한 주임은 금방 집중력을 잃고 앞을 힐끔거렸다. 야닉이 말에서 내려 루의 복장을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덩치보다도 커다란 모피를 두른 루는 멀리서 봤을 때 둥그런 공처럼도 보였다. 루도 멀쩡히 손이 있는데, 머리 위로 손수 후드를 씌워 주는 그가 갑자기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처럼 보였다. 자신은 루보다도 덜 껴입었는데 말이다.

‘웃기는 왜 웃어.’

쓸데없이 웃음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가 저렇게 만날 즐거운 건지.

“…그래서 요새로 습격하는 마물 숫자를 사전에 조금이라도 줄여 놓는 것이 이번 토벌의 목적… 듣고 있나요? 저기요?”

브레고가 건틀릿을 낀 손가락으로 한 주임의 어깨를 툭툭 치자 곧바로 이한율이 그의 팔을 거칠게 쳐냈다.

“건들지는 말고 말씀하시죠.”

브레고와 한 주임이 동시에 놀란 얼굴로 이한율을 바라봤다. 언제 다가왔는지 이한율이 잔뜩 굳은 얼굴로 서서 브레고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데없는 봉변에 얼빠진 얼굴을 하던 브레고가 두 손을 들어 올리더니 순순히 한 걸음 물러났다.

“이봐, 진정해. 누가 보면 내가 더듬기라도 한 줄 알겠어.”

브레고는 이한율을 향해 삐딱하게 웃었다. 항복 자세를 취하는 척하긴 했지만 녹음을 닮은 눈에 희미한 호기심이 서렸다.

‘이놈 봐라? 그렇다 이거지.’

그는 불한당 취급을 받은 것에 뒤틀린 웃음을 지으며, 가감 없이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이한율을 피해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브레고가 멀찌감치 물러날 때까지 계속 주시하던 이한율은 고개를 돌려 한 주임에게 딱딱하게 말했다.

“그냥 요새에 계시지 그러세요. 황자가 없어도 제가 마력을 나눠 드리면 되는데.”

이한율이 이런 식으로 강요하듯 말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한 주임은 제가 아는 그 이한율이 맞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짐짓 경고하듯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 사람들, 너무 믿지 마세요. 우리와는 다른 세계 사람들이고, 우리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저 외지인일 뿐이에요. 더군다나 주임님은 아무런 힘도 없잖아요.”

그는 한 주임의 양어깨를 부여잡고 지그시 눈을 맞추며 한 자 한 자 각인시키듯 천천히 말했다.

“주임님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은 저 말곤 없어요. 사무실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그 사람들도 결국엔 남이에요. 그러니까 저 말고는 아무도 신뢰하지 마세요, 아무도요.”

한 주임은 이한율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동그란 감옥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갑자기 그가 영문 모를 이야기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종자 한 명이 그녀의 말을 끌고 와서 안장을 올려 주고 고삐를 건네줄 때까지 한 주임은 혼란스러움에 빠져 있었다.

“출정!”

선두에서 외치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어 얼른 퀴버에 올라탔다.

어쩐지 아직 저를 보고 있는 듯한 시선에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황자님께서 자리를 비우시는 동안 우리는 요새 방비를 강화한다!”

야닉이 토벌대를 이끌고 성채를 빠져나갈 무렵 그의 권한을 위임받은 기사단장 로하겔 경이 매섭게 소리쳤다.

기사들과 용병들이 그의 호령에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고, 로하겔 경의 옆에 서 있던 스캄이 제법인데? 하고 이죽거리다가 정강이를 걷어차일 뻔하더니 냅다 달음질쳤다.

그는 혀를 한번 크게 찬 뒤에 성벽 너머 저 멀리 허리 안개가 내려앉은 희뿌연 산등성이를 내려다보았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희미한 습기가 서려 있다.

‘올해는 설풍이 일찍 들이닥칠 것 같군.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는 평소보다 많은 위병이 방벽 위에 포진되는 것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남청색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걸음을 돌렸다.

토벌대는 마주치는 영지민들의 가벼운 배웅을 받으면서 천천히 영지를 가로질렀다.

이 시기가 오면 영지민들은 으레 ‘벌써 그즈음인가?’ 하고 집 안팎으로 덧문과 목책을 점검하고 무기들을 손질했다. 오로지 아크만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었다.

후미에 자리한 한 주임은 앞 사람의 어깨 너머로 아까부터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야닉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용병도 아니고 마법도 쓸 수 없는 처지에 끼어든 사실만으로도 다분히 민망했던지라 자진해서 뒤에 가서 섰다. 야닉도 눈치껏 만류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옆자리는 당연한 듯 루가 꿰찼다. 헤바투스 옆에 바짝 붙어 말을 몰고 있는 루 때문에 그녀는 온통 신경이 앞으로 쏠려 있던 참이었다.

적갈색 암말에 올라탄 루는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짧은 간격으로 까르륵대는 웃음소리를 흩뿌리고 있었고, 그것이 못내 신경을 긁어 댔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멈춘 것은 내벽 관문을 통과할 무렵이었다.

“아빠!”

“선희, 아니 아니, 루야.”

눈 밑이 거뭇한 몰골로 배웅을 나온 임철우를 본 루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얼른 들어가!”

임철우는 딸에게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야닉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인석이 이렇게 멀리 나가는 건 처음이라, 제가 걱정이 돼 가지고…….”

“잘 챙길 테니 염려 말고 가서 쉬어. 보아하니 잠도 제대로 못 잤나 보군.”

야닉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따스하게 웃어 보였고 임철우는 그런 그에게 두어 번 더 굽실거리다 루를 향해 어서 가라는 손짓을 휘휘 내둘렀다.

“너 인석, 까불대지 말고 황자님 말씀 잘 듣고. 밥 잘 챙겨 먹고.”

“알았어, 알았다고! 빨리 들어가.”

잠시 멈추었던 토벌대가 다시 전진하고, 루는 설핏 임철우의 뒷모습을 보다가 뭔가가 울컥했는지 잔뜩 울상을 지었다.

“키도 작으면서 왜 저렇게 구부정하게 걸어, 진짜. 짜증 나게.”

사려 문 입에서 씨이,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야닉은 그런 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이내 앞으로 힘차게 말을 몰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행군의 속도가 빨라지고 토벌대는 너른 농경지를 달려 나갔다. 한 주임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퀴버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의식적으로 야닉과 루를 동시에 보지 않으려 시야를 좁혔지만 자꾸만 힐끔거려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기본적으로 다정한 성품인 것은 그간 겪어 봐서 잘 알고 있는데, 다정함이 향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닐 때 치미는 껄끄러운 감정을 떨쳐 내고 싶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고작 열아홉 살짜리 여자아이였다. 터무니없이 유치한 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자꾸만 합리적인 근거를 찾게 된다.

‘여기에서 열아홉이면 결혼할 나이가 아닌가? 거기다 루는 엄청 귀엽게 생기기도 했고.’

같은 여자가 봐도 매력적인데, 그는 루를 어떻게 생각할까.

잡념이 끈질기게 꼬리를 물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에 대한 마음이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갓 태어난 아기 새가 어미 새를 따르는 것처럼 보호 본능에 의해 그를 의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나만 따르던 강아지가 품을 벗어나 다른 이를 향해 꼬리를 흔들 때 느끼는 묘한 패배감이라든지.

감정의 종류는 무한히도 많다. 섣불리 짐작했다가 상처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괴로웠다.

“한 주임님! 정신을 얻다 팔고 있는 겁니까? 줄을 이탈하잖아요!”

그녀는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포라킨의 날 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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