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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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율 역시 소리가 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의 시야에 고르곤의 눈에 롱소드를 찔러 넣고 있는 한 주임이 떡하니 들어왔다.
“뭐 하세요, 주임님!”
이한율이 곧장 사색이 되어 달려가자 거의 검 손잡이까지 깊게 박고 있던 한 주임이 고개를 들었다.
“응? 확인 사살.”
의아한 얼굴로 눈만 끔뻑거리던 한 주임이 검을 살짝 비트는 것까지 잊지 않고 마무리 짓더니 천천히 뽑아냈다. 그러곤 잎이 굵은 수풀을 하나 뜯어 가지고 와서는, 뇌수가 뚝뚝 떨어지는 검신을 길게 닦아 내고 다시 벨트에 차는 것이다.
그 모습을 얼빠진 얼굴로 보고 있던 것은 비단 이한율뿐만이 아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하던 루 역시 입을 떡 벌렸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남자들이 알아서 떠받들어 주게 생긴 얼굴로 지금 뭐 하는 거야?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루가 뻐끔거렸다.
‘어지간히 야닉한테 잘 보이고 싶은가 보지?’
비틀어진 심사가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 뒤엔 절로 안면이 일그러졌다.
생각과 동시에 한 주임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괜히 혼자 찔려서 움찔거렸다. 두리번거리던 한 주임이 곧장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저 여자가 남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루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덕거렸다.
“그것 좀 빌려주실래요?”
코앞까지 다가와 불쑥 꺼내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리자 한 주임이 손가락으로 루의 허리께를 가리켰다.
“단검이요. 잠깐만 쓰고 돌려드릴게요.”
그제야 두툼한 모피 아래 두른 파우치 벨트의 존재를 자각한 루가 반사적으로 가죽 검집에서 손바닥만 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공손히 손잡이 방향으로 건네주는 짓까지 잊지 않았다.
“고마워요.”
검을 받아 든 한 주임이 무척이나 고상하게 인사를 하고는, 길고 쭉 뻗은 다리를 자랑하듯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루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단검을 빌려 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브레고가 했던 것처럼 왼손으로 뿔을 잡고 오른손으로 그 주위를 도려내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진지하게 말이다.
거죽이 질긴 듯 이를 앙다물고 칼질을 하는 이방인에게서는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칼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오롯이 뿔 채취에 몰두해 있는 걸 보면서 루는 손바닥을 들어 천천히 눈두덩을 문질렀다.
‘…내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나?’
불행히도 이어진 다음 장면에서 그럼 그렇지, 하고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이방인이 칼질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한율과 야닉이 동시에 달려와 말리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한 주임이라는 이방인은 머리가 비상한 불여우가 틀림없었다. 숨 쉬는 것 하나하나조차 모든 것이 계획적인 게 분명했다. 빠드득 어금니가 절로 맞물렸다.
한 주임은 거의 반강제로 이한율에게 단검을 빼앗기고, 야닉의 손에 이끌려 벌판 위로 덩그러니 내몰렸다.
그녀는 황당함을 억누르며 저를 구석으로 데려온 야닉에게 차분하게 항의했다.
“나 구경만 하자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 아니야.”
“알아.”
무심히 툭 돌아오는 답변에 미간에 절로 실금이 그어진다.
“아는데 왜….”
“굳이 당신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니까.”
그녀는 납득이 안 된다는 얼굴로 설명을 요하듯 눈을 맞췄다.
‘네가 걱정된다고, 험한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야닉은 고집스러운 한 주임의 표정을 보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원래 하려던 말 대신 에두르는 걸 택했다.
“시커먼 놈들이 잔뜩 있는데 그대가 나서서 힘든 일을 할 필요는 없잖아.”
한 주임에게는 부족하고 불친절한 이유였다.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자면 끝도 없이 길고 지루한 공방을 이어 가야 한다.
느낌표가 아닌 서로 물음표만 던지는 도돌이표 같은 대화. 뭐든지 확실한 것을 선호하는 그녀의 성격에 그의 어중간한 태도는 오히려 괴로울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와 연인, 그 사이 어디쯤 있는 어중간한 관계라도 계속 이어 가려면 어물쩍 넘어가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또한 안다.
언제라도 야닉은 ‘소꿉놀이는 이제 그만하자.’라며 그와 저 사이에 이어진 가느다란 실을 끊고 돌아설 수 있는 입장이었고, 자신은 째깍거리는 시한폭탄이 터지길 벌벌 떨면서 기다리고 있는 ‘을’에 불과했다.
불안정한 관계라도 계속 붙잡고 싶은 것은 오로지 욕심이었다.
남의 것을 호시탐탐 노리는 비겁자. 그럼에도 끝낼 용기 따윈 없는 겁쟁이.
스스로를 향한 혐오가 하루하루 착실하게 쌓여 갔다.
동시에 무수한 고민을 담고 있는 갈색 눈동자가 침잠하는 것을 본 야닉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낮게 읊조렸다.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고 있어.”
“알고 있다니, 뭐를….”
“대장님!”
한 주임은 순간 성큼성큼 걸어와서 훼방을 놓고 있는 브레고의 입을 당장에 꿰매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한 주제에 천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던 브레고가 다 끝났는데요, 하고 불쑥 내뱉었다.
야닉은 쓴 입맛을 다시며 결국 돌아서서 가 버렸다.
한 주임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자신도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채취한 뿔들은 종자들이 챙겨 온 거슬거슬한 광목자루 안에 모아 담고, 타다 만 고르곤의 사체들은 토막 내어 바닥에 넓게 펼쳤다. 대기 중에 피와 고기 냄새가 섞이자 야닉은 의도적으로 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토벌대는 커다란 바위와 수풀 속으로 나뉘어 몸을 숨긴 후 다음 사냥감을 가만히 기다렸다.
“저녁에 바비큐 해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저렇게 다 미끼로 써도 되나요?”
한 주임이 걱정스레 포라킨에게 묻자 그녀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칠색 팔색했다.
“당연히 농담이죠! 마물 고기를 어떻게 먹습니까? 브레고 엘다가 하는 말의 구 할은 헛소리니까 알아서 걸러 들으세요.”
“아….”
한 주임은 민망함을 감추려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맞은편에서 경계 중이던 브레고가 돌연 매서운 눈으로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먼 서쪽 하늘을 향해 손을 가리켰다. 굵직한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자연히 돌아간 시선들이 이쪽으로 곧장 날아들고 있는 새 떼를 발견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숨을 죽였다. 멀찍이 까만 점처럼 보이던 새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형체를 키우며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 주임은 어느새 서쪽으로 한 움큼 기울어진 해를 피해 눈을 가늘게 떴다. 역광 때문인지 어두운 실루엣만 드러내고 있어서 좀처럼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다들 머리를 가려. 됐다고 할 때까지 눈뜨지 말고.”
이번에도 야닉이 혼자 일어나더니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한 주임을 포함한 일부 사람들이 멀뚱히 있자, 브레고가 얼른 제 머리 위로 털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는 소리쳤다.
“대머리 되기 싫으면 대장 말대로 해!”
그제야 후드나 모피를 머리 위로 끌어올리는 사람들이 보였으나 한 주임은 마지막까지 야닉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새들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한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상공에서 불꽃이 터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사위가 온통 붉게 변하더니 작은 폭탄이 여기저기서 터지듯 펑! 펑! 하는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한 주임은 하늘에서 불티들이 눈처럼 쏟아 내리는 광경에 허겁지겁 후드를 눌러쓰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머잖아 뒤통수와 등허리 부근에 뜨끈한 열기가 내려앉았다.
이명 같은 마물들의 괴음이 고막을 찢어발길 듯이 울리고, 눈꺼풀 위로 비치는 빛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묵직한 것들이 공중에서 바닥으로 하나둘 쿵쿵 추락하고, 파생된 땅 울림이 발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익은 고기 냄새를 맡고 날아든 와이번 떼가 전멸한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잔열로 인해 타닥거리는 소리가 튀기자 기사들과 용병들은 슬그머니 머리를 들어 올렸다.
땅은 온통 마물의 사체들과 붉은 피, 시커먼 잔해로 처참한 광경이었으나, 그 가운데 그림처럼 서 있는 사내의 자태는 사뭇 이질적이었다.
저녁놀이 지는 풍경 아래 남아 있던 불티들이 바람을 타고 그의 주위를 꽃씨처럼 날았다.
칠흑의 머리칼이 노을빛에 붉게 물들고, 돌아보는 찬란한 눈동자엔 은은한 광채가 감돌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땐, 한 주임은 마법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현실감 없이 눈부신 남자였다. 한순간 그가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존재인 것처럼 꼭 낯설었다. 박 차장과 김유정이 얼굴을 붉히며 새된 소리를 내질렀던 판타지 드라마 속 주인공을 목도한 것 같기도 했다.
거기에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계의 황자라는 거리감이 생경하게 더해지자,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보잘것없이 느껴진 탓이었다.
“브레고 경, 마무리해 주셔야죠.”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포라킨이었다. 그녀는 지독히도 무표정한 얼굴로 브레고의 등허리를 지팡이로 꾸욱꾸욱 누르고 있었다.
그제야 수그리고 있던 상체를 일으킨 브레고가 아차차, 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박쥐처럼 마디 사이가 갈퀴로 이어진 날개를 가지고 있던 마물 역시 흉악스럽기 이를 데 없는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터럭 하나 없이 매끈하고 축축한 피부는 꼭 파충류의 그것을 닮아 있었고 보랏빛 피부 사이사이 들쭉날쭉한 검은 얼룩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거의 한 아름드리만 한 굵기의 목을 베어 내는 일은 비교도 할 수 없이 힘든 작업이었다.
와이번은 고르곤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단단하고 질긴 가죽을 두르고 있었기에, 브레고를 제외한 수습기사들은 같은 자리에 몇 번씩 검을 내리치면서 힘겹게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나마 잔뼈가 굵은 용병들이 합세해서 덩치만큼 커다란 무기로 짓뭉개듯 숨통을 끊었다.
이번에도 루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관망 중이었으나 딱히 그것을 지적하거나 거슬려하는 이는 없는 것 같았다. 포라킨과 이한율 역시 딱히 힘쓸 생각은 없는 듯했다.
몸이 달아 있는 사람은 한 주임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가 나설 틈 없이 포라킨이 앞을 막아섰다.
“보라색 와이번은 냄새가 지독하니 가까이 가지 마세요. 죽은 고기만 먹는 놈들인지라, 썩은 내가 몸에 배면 사흘은 갈 겁니다.”
한 주임은 이번에는 얌전히 포라킨의 말을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