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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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라킨이 여상히 대꾸하며 오른쪽 끝에 있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한 주임은 따라 들어가며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귀족은 보통 용병이 아니라 기사가 되지 않나요?”
“폐하께서 아크만 기사단의 인원 충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요. 결원이 아닌 이상은 서임을 허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트라야누스에 입단한 거예요. 본인이 기사가 되고 싶었으면 아크만을 떠나면 될 걸, 굳이 여기에 있겠다고 자처한 멍청이죠.”
포라킨이 이 정도까지 막말을 서슴지 않는 상대는 처음 보는지라, 어지간히 브레고가 못마땅한가 싶었다.
가감 없이 신랄한 평가에 한 주임은 입술을 모으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브라우니들이 방금까지 지키고 있던 집은 방 역시도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누워도 될 크기의 2층 침대에는 하얗고 깨끗한 시트가 빳빳하게 깔렸고, 도톰한 이불 역시 가지런히 개인 채 놓여 있었다.
다만 나무로 지은 집 특성상 벽난로가 없었는데, 그 때문인지 아래층에서 하인들이 분주히 숯을 담은 화로를 방마다 들이는 중이었다. 그녀들의 방에도 시커먼 화로를 가져온 하인이 양 침대 사이 바닥에 묵직하게 내려놓으며 주의사항을 전했다.
“주무시기 전에는 뚜껑을 꼭 닫으셔야 합니다. 집요정들이 새벽에 돌아다니다가 불씨를 보면 놀라서 도망치거든요. 브라우니들은 불을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니까 부디 조심해 주세요.”
“알았으니까 볼일 다 봤으면 숙녀들 방에서 얼른 나가요.”
어느새 들어온 건지 루가 쀼루퉁한 얼굴로 불쑥 끼어들었다.
한 박자 늦게 들어온 걸 보니 야닉을 따라갔다가 방에서 쫓겨난 것이 분명하다고 포라킨은 어렵잖게 짐작했다.
루는 짜증이 꾹꾹 배어 나오는 걸음으로 침대 위에 모피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 벌러덩 누워 버렸다. 이쪽 침대엔 아무도 오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한 주임과 포라킨은 반대편에 있던 침대에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2층 침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포라킨을 보고 한 주임은 제가 먼저 1층에 짐을 풀었다. 어쩔 수 없이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포라킨의 얼굴은 조금 들떠 있었다.
가벼운 휴식 시간이었다. 화로에서 피어난 열기가 방안을 데우자 곧바로 노곤함이 밀려들었다.
말을 타느라 뻣뻣해진 다리를 주무르며 앉아 있는데, 맞은 편에 부츠도 벗지 않은 채 침대 밖으로 뻗어 나온 루의 다리가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괜히 쳐다보지 않으려고 한 주임은 차라리 밖으로 나왔다.
“방은 마음에 들어?”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있는데 등 뒤로 목소리 하나가 울렸다.
돌아본 곳에는 허리께까지 오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서 묻는 야닉이 있었다. 순간 마음이 들썩여서 한 주임은 괜히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응. 첫날부터 이렇게 좋은 데서 잘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
그녀의 말에 그가 콧잔등을 보기 좋게 찡그렸다.
“어쩌지. 내일은 노숙인데.”
“괜찮아.”
아. 방금은 너무 딱딱했나. 괜히 찔려서 쳐다보는데, 야닉은 아예 대놓고 몸을 돌려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인.”
“응?”
발음 때문인지 그가 가끔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면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한층 깊게 울려서 귀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전부 다 간지러웠다. 자르르한 통증이 명치끝에 걸려서 답답하기도 하고 손끝이 이유 없이 저리는 것도 같았다.
“여기서 지내는 건 좀 어때? 원래 있던 곳이랑 비교하자면 물론 불편할 테지만….”
그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자 한 주임은 저의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야닉은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재차 물었다.
“내 곁에 있어 달라고 하면 그대는, 남아 줄 수 있을까?”
“아, 4년 뒤를 말하는 거야? 수도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남지 않을까?”
그러다가 문득 그에게서 마력을 받지 못하면 4년 뒤고 뭐고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내 생사를 쥐고 있는 사람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거 알면서.”
이대로 그가 아크만에 머물면 저도 따라 머물고, 그가 수도로 가면 따라가야 살 수 있을 터였다.
야닉이 없어도 이한율이 있다지만 그에게 부담을 주긴 싫고 기대기는 더더욱 싫었다.
날이 갈수록 이한율이 점점 어려워지고, 불편해지고 있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손윗사람의 체면 때문인지 뭔지 어쨌든 간에 원초적인 거부감이 내면에 단단히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답변이 뭔가 핀트가 어긋났는지 야닉은 작게 고개를 젓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마력 문제는 따로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어려워도 쉽게 포기는 하지 말고.”
“…응. 고마워.”
“그것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배고파 돌아가시겠네!”
“배고파, 아니….”
엉겁결에 브레고의 말을 따라 하던 야닉이 황당한 눈빛을 보내자 방문을 박차고 나온 그가 멀뚱히 서서 턱을 긁적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대장님.”
잠시간 어이없어하던 야닉이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한 주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밥 먹으러 가자.”
어둑해진 오두막 곳곳에 촛불을 켜두고 하인들은 테이블 위에 분주하게 음식을 차렸다.
성에서 가져온 빵과 치즈, 우유와 포도주가 네모난 식탁 위에 올라오고, 오는 길에 사냥한 토끼 두 마리가 금방 통으로 구워져 접시 위에 기름을 툭툭 떨어뜨렸다.
당연하게도 귀한 토끼구이는 야닉의 테이블과 기사들의 테이블 위로 각각 한 마리씩 올라갔다.
첫날부터 내내 말을 몰다가 오후부터 마물 해체로 중노동을 했건만 아크만의 기사들과 용병들은 여전히 활력이 넘쳐흘렀다. 귀환길에 동행했던 황실기사단은 딱히 마물을 상대하지 않아도 저녁 무렵이면 항상 초주검 상태였는데, 그들과는 체력 자체가 차원이 달라 보였다.
한 주임은 시끌벅적한 사이에서 오도카니 앉아 테이블 위를 망연히 쳐다봤다.
머리만 없을 뿐이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토끼 통구이를 보고 있자니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이 자리에서 오로지 혼자만 거북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군침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차마 이 상태의 고기는 못 먹겠다고 할 수도 없고, 그녀는 이제 식은땀마저 날 지경이었다.
오늘의 식사를 담당한 하인이 자랑스럽게 자신의 작품 앞에 서서 커다란 나이프와 집게를 들어 올렸다. 하인은 나이프로 얇게 저민 토끼고기를 차례대로 접시에 덜어 주며 입꼬리를 만족스럽게 끌어올렸다.
안 돼. 주지 마. 그 말이 한 주임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어디 불편하세요?”
한 주임은 포도주만 홀짝거리다가 자신을 향해 묻는 이한율을 보고 짐짓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식욕이 급격하게 떨어진 터라 다른 음식들도 대강 먹는 둥 마는 둥 앉아 있는데, 주방에서 작은 냄비 하나를 가져온 하인이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브라우니가 만든 스튜라니! 이런 건 전설에서나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그의 말에 순식간에 사람들이 자리로 몰려들었다.
한 숟가락만 먹어도 하얗게 센 머리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두 숟가락을 먹으면 1년은 잔병치레를 거른다는 요정의 스튜는 모두의 부푼 기대와는 달리 엄청난 악취와 모양새로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으악! 썩은 거 아니야?”
누군가가 코를 틀어막고 뒷걸음질 치며 뱉은 말에 동시에 모든 이들의 안색이 식어 내렸다.
표면 위로 걸쭉한 기포가 퐁퐁 터지는 스튜는 아까 오두막에 들어올 때 밟았던 진흙땅과 얼추 비슷한 색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의 고약한 냄새가 공간을 가득 메우자 차라리 고블린의 잔해가 묻은 로브를 뒤집어쓰는 게 이보단 향긋할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까 분명히 스튜가 유명하다고 했는데….
망발을 했던 야닉을 보자 이미 멀찍이 의자를 물리고 앉아 있던 그가 검지로 코 아래를 막고는 어깨를 으쓱한다.
‘유명하다고 했지 맛있다고 한 적은 없는데.’ 하는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냄비를 들고 온 하인만이 흥분으로 달뜬 얼굴이었다. 그는 비어 있는 접시 하나를 들어 기어이 국자 한가득 정체불명의 액체를 따르고는 야닉의 자리에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단 두 입만 먹어도 건강해진다는데, 한 접시를 다 먹으면 아마 100년은 끄떡없으실 겁니다.”
“…한 입만 먹어도 이 자리에서 죽을 것 같은데.”
야닉이 중얼거리며 옆에 앉아 있던 브레고를 향해 접시를 스윽 밀었다. 접시조차 만지기 싫다는 듯 조심스러운 동작에 브레고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진다.
“독이 있는지 먼저 먹어 봐야지, 난 제국의 황자잖아.”
뻔뻔한 언사에 아연한 표정을 짓던 브레고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일순 자리에 긴장된 침묵이 감돌았다.
“대장님 혹시 저 싫어합니까? 아니면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애절하게 말하는 브레고를 야닉은 깨끗하게 무시하며 접시를 향해 턱짓했다. 결국 무언의 압박을 못 이긴 브레고가 한 손으로 코를 막고 한 스푼 떠서 눈을 질끈 감고 덥석 입에 넣었다.
그 순간 자리에 모인 전원은 그가 과격하게 한술 뜨는 척하면서 대부분 바닥에 흘렸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으나, 부러 지적하지는 않았다. 지목당한 그에게 동정심이 일 정도로 지독한 냄새였기 때문이다.
“……응?”
반은 포기 상태로 꿀떡 삼킨 브레고가 갸웃하더니 갑자기 쩝쩝 소리를 내며 귀족답지 않게 요란스레 입맛을 다셨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주시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브레고 경, 지금 혼자만 당하기 싫어서 장난치는 거죠?”
수습기사가 하는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기어이 한 숟갈 가득 떠서는 재차 입에 넣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경악에 찬 입을 떡 벌렸다.
브레고는 찬찬히 음미하듯 몇 번이나 곱씹으며 계속해서 스튜를 떠먹었다. 이윽고 한 접시를 텅 비운 그가 스푼을 탁, 내려놓으며 리넨으로 입을 닦았다.
“막상 먹으면 오묘한데? 은근히 담백하기도 하고.”
그의 말에 반신반의하던 용병들이 접시에 묻은 것을 하나둘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 보더니 어리둥절한 눈빛을 주고받는다.
한 주임은 포라킨마저 먹어 보라고 권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다.
웬만하면 시늉이라도 하겠는데 이건 도저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가만 보니 야닉도 그렇고 끝까지 먹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기는 했다.
루와 수습기사 두 명도 하나같이 세상 기괴한 것이라도 보는 표정으로 스튜를 먹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빈 바닥을 드러낸 냄비가 텅! 하고 테이블 위로 요란한 소리를 냈다.
한 주임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포라킨을 따라 얼른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도망치듯 올라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