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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64화 (64/155)

64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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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 같은 열기를 스멀스멀 피워 올리고 있는 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쬐고 있던 참이었다.

아까 야닉이 하려던 말이 뭘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하인들이 노크하더니 작은 욕조와 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사자님, 목욕물입니다. 시중들어 줄 하녀가 없어서 불편하시겠지만….”

“아, 아니에요. 이것만 있으면 충분해요. 고마워요.”

벌떡 일어나서 수건을 받아 든 뒤 하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 문을 꼭 닫았다.

물동이에 든 찬물을 보고 야닉에게 데워 달라고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다행히 포라킨이 들어오더니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포라킨은 스툴 하나를 끌어와 앉고는 물동이에 지팡이를 가져다 대고 뜨거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런 날씨에 매일같이 목욕하는 것도 그렇고, 이방인분들은 가만 보면 참 부지런해요. 특별히 부지런한 사람들로만 선별해서 소환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한 주임이 조금 웃다가 입을 뾰족하게 모았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사명감? 의무감? 그런 게 아닐까요?”

“의지가 남다르다고 할까요. 그러고 보면 청결이 전염병을 예방한다는 사실을 전파시킨 것도 전부 이방인들이죠.”

포라킨의 말에 한 주임은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건 맞아요. 역사를 보면 손만 잘 씻었어도 죽지 않았을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거든요.”

가죽 가방에서 비누를 꺼내며 대답을 하는데 포라킨이 가만히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어쩌면 우리는, 주임님이 계시던 곳의 역사처럼 죽어야만 했을 사람들은 아닐까요?”

그녀의 말에 손을 멈추고 돌아봤다. 포라킨은 지팡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담백하게 말했다.

“갑자기는 아니고 전부터 가끔 생각했던 건데요.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소환하는 것이 과연 순리에 맞는 일일까요? 소환 방법이 소실됐던 시점에서 그만뒀어야 했는데 그걸 억지로 되살려 낸 거잖아요. 어떤 거대한 섭리를 깨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종류의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 하고 고개를 들어 한 주임을 보더니 밝은색 속눈썹을 위아래로 깜빡거렸다.

“주임님에게 책임을 묻는 건 아닙니다.”

“저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단장님이 소환하신 것도 아닌데요, 뭘….”

한 주임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손을 저으며 포라킨을 달랬다. 그녀는 제 손에 들린 네모난 비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원래대로라면 비누는 지금으로부터 몇백 년 정도는 더 지나야 대중화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작은 조각 하나가 과연 얼마큼의 생명을 살린 셈이 될까? 제가 만든 것도 아닌데 문득 두렵고 무거운 마음이 엄습했다.

포라킨은 이방인에게 더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고는 물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를 때까지 열풍을 불어넣는 것에 집중했다.

한 주임은 순간 알코올 생각이 간절해지고 말았다. 마음이 급해지자 목욕은 고사하고 젖은 수건으로 몸만 대강 닦아 낸 뒤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왁자지껄한 식당을 지나쳐서 주방으로 가서 포도주 한 병을 찾았다. 연결된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답답했던 숨통이 단번에 트였다.

“하아.”

그녀는 술병을 들고 다니면서 어두운 마구간 주변을 천천히 거닐었다.

술렁였던 마음이 주위의 고요함을 따라서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그러자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새삼 선명하게 느꼈다.

거리의 주정뱅이도 아니고 야밤에 병나발 불며 어슬렁거리는 꼴이라니.

서울이었으면 꿈도 못 꿔 볼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번엔 묘한 해방감이 몸을 덮쳤다.

한 주임은 이 순간 추운 것도 잊은 채 어둠 속에서 뽀얀 콧김을 뱉어 내는 말들을 벗 삼아, 밤공기를 안주 삼아, 시끄러운 잡념들을 깨끗하게 비워 냈다.

‘그래도 여기 와서 와인은 원 없이 먹어 보네. 서울이었으면 와인 살 돈으로 캔 맥주나 다발로 사고 말지.’

그녀는 이 순간만큼은 별난 세계가 주는 호사를 마음껏 누리기로 했다. 밤의 숲이 가져다주는 나른한 감각 때문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로 한다.

습기를 머금은 흙냄새, 바람이 잎사귀를 부드럽게 스치는 소리, 걸을 때마다 밑창에 달라붙는 질척한 땅.

아. 올라가면 신발부터 닦아야겠다. 이 와중에도 머릿속은 착실하게 이성적이라 헛웃음이 절로 났다.

‘그러고 보니 아직 마력을 못 받았네.’

낭만의 시간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끝나 버렸다. 오들오들 몸이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딱히 마력 고갈 때문이라기보다는 날이 차니 반사적으로 야닉 생각이 난 탓이었다. 그녀는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로브 안주머니에 병을 세워 넣고 양 주머니에 식은 손을 꽂았다.

내일부터 노숙이라고 했는데 제대로 목욕을 해 둘 걸 그랬나.

방을 혼자 쓰는 것도 아닌데 남들 잘 시간에 욕조에서 첨벙거릴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이럴 때 남자 주인공이 짠, 하고 나타나던데.’

불현듯 떠오른 상상 속에서 등장한 남자 주인공은 야닉이었다. 확실히 주연으로 차고 넘치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본인이라는 게 말이 안 될 뿐이지.

신데렐라 스토리를 꿈꾸기엔 너무 철이 들었고, 망상에 빠져서 사는 타입도 아니다. 이런 상상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답지 않았고 괜히 닭살이 돋았다.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만 해도 기함할 일인데, 여기서 신데렐라까지 된다고? 누가 들으면 ‘소설 쓰고 앉아 있네.’ 하고 코웃음을 칠 일이었다.

“여기 계셨어요?”

“아, 깜짝이야!”

한 주임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돌리자 이한율의 웃는 얼굴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이미 목소리에서 누군지 예상이 됐음에도 찰나의 순간 야닉이 아닐까 기대했다가 동시에 실망한 제 모습에 놀란 참이었다. 반동으로 솟구친 어깨를 하고 이한율을 보고 있는데, 그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위험하게 왜 혼자 나와 계세요.”

한 주임은 어스름하게 그늘진 이한율의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언젠가 이한율이 자리를 비운 사이 공 대리가 그의 뒷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정확하게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공 대리가 했던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저렇게 앞에서 점잔 빼는 애들이 뒤가 구린 경우가 많다니까.]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유정이 메시지 톡으로 ‘그러는 지는 앞도 구리면서.’라고 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마음 한구석에서 은근히 공감했기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 주임은 지금 이 순간 공 대리의 말이 갑자기 왜 떠올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불현듯 그 말이 바로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재생됐기 때문일까, 본능적인 뒷걸음질에 이한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희미해졌다.

“잠깐 바람 좀 쐬려고. 한율 씨는 왜?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그녀는 자세와 말투, 표정을 최대한 의연하게 신경 써 가며 물었다. 조금이라도 껄끄러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한율은 다시금 미소를 띠긴 했다.

“다른 건 아니고 궁금한 게 좀 있어서요. 주임님 마력이요. 그거 한 번 받으면 얼마나 버틸 수 있는 거예요?”

“아, 그거. 아마… 열흘 정도는 괜찮을걸.”

곧이곧대로 3일이라고 하려다가 말을 바꿨다. 의도하지 않은 거짓말이었다.

이한율은 읽기 어려운 표정으로 잠잠히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불안으로 널뛰는 심장 박동이 밖까지 들릴까 봐 정수리까지 꼿꼿해졌다.

“근데 그건 왜?”

자연스럽게 물을 수 있는 질문이건만, 이한율은 한 주임의 대답을 곱씹듯이 눈동자를 내리깔았다가 천천히 올렸다. 특유의 느릿한 눈 깜박임마저 이 순간만큼은 선득하게 느껴졌다.

“그냥…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요.”

“야닉이 매일 주고 있는데 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한 주임의 입에서 3황자의 이름이 나오자 이한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이윽고 그가 한 걸음 물러나더니 갑자기 볼멘소리를 했다.

“사실은 황자의 마력이 어느 정도길래 매일같이 마력을 나눠 주고도 그렇게 강한 마법을 쓸 수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현자인 저보다 강하다니 좀 열등감도 생기는 것 같고요.”

코 아래를 문지르며 민망하다는 듯이 웃는 그의 모습에는 별다른 속내는 없어 보였다. 표면적으로는.

한 주임은 피식 웃으며 눈을 흘겼다.

“한율 씨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저도 제가 이렇게 쪼잔한 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황자가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요.’

이한율은 뒷문을 열고 한 주임이 들어가는 것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때문에 앞서 걷던 그녀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굳어 있는 것은 미처 보지 못했다.

나름대로 성과가 있는 밤이라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섰던 그는 곧바로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주방에서 잇따라 나오는 두 사람 앞에 그가 가장 거슬려 마지않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닉.”

한 주임은 산소가 모자란 곳에 있다가 급격히 숨통이 트인 사람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당연하다는 듯 야닉이 손을 내밀자 망설임 없이 잡았다.

같은 세계에서 온 직장동료보다 만난 지 두 달도 안 된 사람에게서 안도감을 느끼다니, 사적으로 낯을 가리는 성격에 그녀로선 정말이지 놀라운 경험이었다.

“방으로 갔더니 헤르미네가 나갔다고 그래서. 밖에 다녀왔어?”

야닉은 이한율이 보이지도 않는 사람처럼 무시하고는 한 주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정하게 물었다. 찬바람을 먹은 싸늘한 외투를 느끼고 묻는 모양이었다.

“어. 맞다! 할 말 있다고 했지? 올라갈까?”

한 주임은 신발을 털어 낼 겨를도 없이 야닉의 손을 잡고 계단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난데없는 행동에 눈썹을 들어 올리던 그가 순순히 이끌려 가며 씁쓰름한 웃음을 흘렸다. 가까이 갈 때마다 쭈뼛거리는 주제에 이럴 때만 용기를 내는 점이 귀엽다고 할지, 안쓰럽다고 할지.

‘회피하고 싶을 때 이러는 건 이제 알겠는데.’

아무 이유 없이 그녀가 먼저 손을 잡는 일은 없으므로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한율과 같이 있던 것을 보면 그를 피하려던 건 분명했다.

이제까지 겪어 본 한 주임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어떤 일을 할 때는 반드시 명분이 필요한 사람이고 이유가 있어야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올곧고 나쁘게 말하자면 융통성이 없다. 뻣뻣해서 자칫하다가는 부러지기 딱 좋다.

도통 지위와 계급을 이용할 줄 몰랐다. 아니,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런 것을 모를 나이는 아니니 그냥 타고난 성격으로 봐야 응당했다.

그러니 고작 이런 일로 당황하고 버벅거리지.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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