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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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루는 한 주임이 물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왠지 하녀들은 쉬쉬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마력이 없는 이방인이라는 소문은 벌써 성안에 허다하게 퍼져 있었다. 따뜻한 실내에서도 허구한 날 끼고 있는 장갑만 보더라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능력은 쥐뿔도 없는 게, 뻔뻔하게 야닉 옆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좀 벅차다 싶으면 밖에 우물이 있으니 길어다 와도 되고. 난 잠깐 방에 가서 옷이랑 비누를 가져올 테니까 물만 받아 놔.”
자존심 때문에라도 멍청한 이방인은 우물로 갈 것이 뻔했다.
루는 조금 뒤 펼쳐질 미래를 떠올리며 자꾸만 비뚜름하게 올라가는 입매를 소매로 가렸다. 웃음을 참으니 이번엔 어깨가 절로 들썩였다.
코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주방을 나가려는데, 갑자기 어깨를 잡아 돌리는 힘에 루의 몸이 대번에 휘청였다.
무슨 여자가 힘이 이렇게 세? 돌아보는 얼굴에 쓰여 있는 표정이었다.
“…미안한데 나 물 못 만들어요. 단장님이나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 봐요. 난 밖에 안 나갈 거예요.”
한 주임은 어딘가 음울한 목소리로 통보하고는 힘없이 손을 떨궜다.
‘이런 것도 오랜만이네.’
시답잖은 장난질을 치고 뒤돌아서 킥킥대는 짓궂은 웃음들. 너무도 익숙한 것들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알아서 차라리 눈치채지 못했으면 하는 것들.
감독님이 호출한다기에 갔더니 텅 비어 있던 휴게실, 인터뷰 시간에 음료수 심부름을 시키던 선배들, 로커에 발라져 있던 순간접착제나 길이가 제멋대로 잘려 나간 화살은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선발전까지 이를 물고 버틴 건 괴롭힘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적이 좋으면 뭘 하나. 뒷배 없고 친구도 없던 혈혈단신 10대 소녀는 감독님에게 우는소리를 할 수 있는 성격도 못 됐다. 남에게 기대거나 어리광 피우는 것 따위 배운 적이 없어서 차라리 독종이 됐다.
나이 먹고 잊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고작 열아홉 살짜리의 같잖은 수작에 꽁꽁 묻혀 있던 불쾌함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팽팽했던 십 대도 아니고 야생의 사회생활에 물씬 젖은 어른이었다. 밤톨만 한 어린애가 까불어 대는 건 우습게 넘길 줄 아는 나이가 됐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기분이 울적해지는 것은 차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 주임은 자조적으로 쓴 입맛을 다시며 몸을 돌렸다.
“자, 잠깐 기다려 봐!”
당황해서 팔을 붙드는 손을 단호하게 끌어내렸더니 루의 얼굴이 단박에 험악해졌다.
“야. 사람이 말하는데 어딜 가?”
“…소리 좀 낮춰요. 다들 깨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야’라니.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황당함을 억누르고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별안간 뒷문이 벌컥 열렸다.
[성실한 브라우니는 문을 고쳐야 해!]
양손에 나무망치와 돌쩌귀를 하나씩 들고 발로 문을 연 집요정이 주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을 보고 입을 크게 벌렸다. 한 주임과 루도 그 자리에 서서 굳어 버렸다.
[지, 집주인이다!]
놀란 브라우니가 주춤거리다가 뒷걸음질을 치자 루가 펄쩍 뛰었다.
“너 때문에 다 망쳤잖아!”
제 성질에 못 이겨 멋대로 휘두른 손을 한 주임이 가볍게 피하자, 선반 언저리에 걸쳐져 있던 냄비의 기다란 손잡이가 대신 턱! 걸려 버렸다.
냄비는 미처 손쓸 새도 없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와장창!
낡은 냄비가 마룻바닥에 곤두박질쳐지는 소리에 도망치던 브라우니가 우뚝 멈춰 섰다. 천천히 돌아보는 까만 동공이 아래로 향하자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린다.
관성으로 바닥을 팽그르르 구르던 냄비가 움직임을 멈추고 흠칫 놀란 루의 왼발이 찰박, 잔해를 밟았다.
브라우니가 머리 위로 망치를 들고 내달린 것은 그때였다.
[야아아! 내 스튜!]
놀란 루가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자 브라우니가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한 주임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망치를 든 손을 붙잡고 몸으로 밀어 넘어뜨리자 두 인영이 달라붙은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쁜 인간! 놔라! 놔!]
브라우니는 작은 체구로 맹렬하게 버둥거렸다. 망치를 놓친 손으로 마구 휘두르는 주먹을 눌러 막으니 이번에는 커다란 발을 이리저리 굴렀다.
퍽! 퍽! 하고 복부와 옆구리에 가해지는 충격에 그녀가 이를 악물고 다리를 잡았다. 브라우니는 이번에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얼굴을 때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타를 당한 느낌은 아프기보단 얼떨떨했고, 그다음엔 울분이 치솟았다.
“그만, 진정을… 사람 좀 불러 줘요, 루!”
얼굴 중앙부가 얼얼했지만 한 주임은 애써 이성을 유지하려 소리쳤다. 루는 충격을 받은 듯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 정말로 ‘젠장’이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망할! 젠장!]
한 주임이 할 욕을 브라우니가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구르고 머리를 쿵쿵 찧어 가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집요정은 도무지 진정할 줄을 몰랐다.
참다 참다 내지른 주먹이 기어이 브라우니의 안면으로 날아가고 그의 코에서 선혈이 터졌다. 브라우니는 볼을 타고 옆으로 흐르는 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그녀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한 주임도 지지 않고 손을 뻗었으나 잡히는 건 앙상한 터럭 한 줌과 축축한 두피뿐이었다. 그거라도 동아줄이라도 되는 마냥 드세게 움켜쥐었다.
주먹질과 발길질이 난잡하게 뒤엉켰다. 그러다가 바닥에 떨궈진 망치에 브라우니가 손을 뻗자, 망치가 빠르게 날아와 손에 잡혔다.
그는 그걸로 망설임 없이 인간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아윽…!”
이제까지와는 격이 다른 통증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하게 온몸으로 퍼졌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맙소사! 이게 무슨…….”
가장 먼저 달려온 이는 아래층에서 자던 종자들이었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황망한 광경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뒤이어 잠옷 바람으로 검만 들고 달려온 기사들과 속옷 바람의 용병들도 잠시간 눈을 의심했다.
오밤중에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얼이 빠져 있는 그들의 어깨를 거칠게 제치고 나온 이는 야닉이었다.
“뭣들 해! 당장 떨어뜨려!”
주군의 서슬 퍼런 명령에 그제야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마치 한 몸인 듯 엉겨 붙어서 드잡이를 하는 브라우니와 한 주임의 팔다리를 잡아채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몸부림치는 그녀의 뾰족한 팔꿈치에 턱을 얻어맞은 용병 하나가 억, 하고 나가떨어지자 잡아끌던 힘들이 자연히 억세졌다.
우락부락한 남자들에게 붙잡힌 곳이 고통스러워서 한 주임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터졌다.
“한 주임은 놔!”
야닉이 노기 어린 음성으로 소리치며 그녀의 뒤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단번에 위로 끌어올렸다.
허둥지둥 손을 놓은 용병들이 이번에는 브라우니의 팔다리로 달라붙어 움직임을 봉쇄하자 분노에 찬 그르렁대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열려 있던 뒷문 밖으로도 동족의 목소리를 듣고 모인 까만 그림자들이 서성거렸다.
[브라우니 경이 위험해!]
[그렇지만 주인이잖아.]
고민하는 대화 소리에 검을 든 기사들이 바짝 날이 선 채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들이 들이닥치는 순간이 곧바로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일 것이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팽팽한 전운이 감도는 사이로 악에 뻗친 한 주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리고, 구석에서 떨고 있던 하인들이 불안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정신 차려! 제인!”
야닉이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돌려세워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옭아매듯 강렬하게 저를 응시하는 노란 눈동자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든다. 동시에 콧속에 뜨끈한 것이 고였다.
“……야닉?”
“미치겠네.”
야닉이 엄지손가락으로 코 아래를 훔치자 그의 손에 붉은 것이 묻어났다. 코피가 났다는 사실에 그녀의 어깨가 흠칫 움츠러들었다.
그는 그대로 하체를 감아 올렸다. 다리가 공중에 들리는 불안감에 한 주임이 그의 머리를 반사적으로 감싸 안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자마자 갈비뼈에서 시작되는 지끈한 격통이 온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숨 쉴 때마다 수천 개의 바늘이 폐를 찌르는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읏…….”
“쉬. 가만 있어.”
한 손으로 너끈하게 안고 다른 손으로 쉴 새 없이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한 주임은 두 눈을 꾹 감았다.
고통과 서러움이 동시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감정적인지 생리적인지 모를 눈물이 차올랐다가 금방 사그라졌다.
머릿속이 터진 만두소처럼 난리가 난 와중에도 냉정하게 돌아가는 사고는 한 가지 사실만 계속해서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집요정들은 한 번 도망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대형 사고를 친 게 틀림없다.
망했다. 진짜로 망했다.
아무래도 미친 게 분명했다. 사람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갈 때렸다는 사실이 소스라치게 두려웠다.
손에 닿았던 살가죽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식어 내리는 피와는 반대로 심장은 강렬하게 요동쳤다.
머리를 안은 팔이 파르르 경련하는 것을 느낀 그가 이번에는 불안정하게 널뛰는 심장 박동에 쯧, 혀를 찼다.
“브레고, 여기 정리해.”
야닉은 짤막하게 명령을 내린 뒤 빠르게 주방을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 브레고가 얼빠진 목소리로 예? 하는 것을 무시하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머잖아 다급하게 층계를 내려오던 이를 보고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이한율의 눈빛은 당혹감과 살기를 동시에 띠고 있었다.
이 순간 구구절절 설명할 인내심이나 친절함은 없었기에 야닉은 무시하고 지나쳤다.
“뭐 하는 거냐고 묻잖아요.”
이한율이 뛰듯이 계단을 올라 다시 길을 막았다.
한 주임의 헝클어진 머리와 미처 닦지 못한 혈흔에 눈이 돌았다. 그는 야닉이 원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에서 불길을 일궜다.
“난 괜찮은… 하아….”
두 남자 사이에서 넘실거리는 적대감에 한 주임이 숨 가쁜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야닉이 등을 토닥이는 탓에 그녀는 금방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괜찮은지 봐야 하니까 가만히 있어. 헤르미네! 일어나!”
긴장 상태가 아니면 유난히 잠귀가 어두운 포라킨을 부르는 외침은 무척이나 조급했다.
“너는 가서 사람들을 도와. 나중에 부를 테니.”
그의 말에 이한율이 상황을 직시한 듯 소란스러운 아래층으로 눈길을 돌렸다.
일단은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이가 갈렸지만, 우선은 황자의 말을 듣는 것이 나았다.
이한율이 옆으로 비켜서자 야닉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걸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