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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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손을 떼자 망연자실해 있던 루가 브라우니의 어깨를 부여잡고 강하게 흔들었다.
“저주라니?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
브라우니는 맥없이 흔들리면서도 무덤덤한 눈으로 루를 바라봤다.
[그래서 아주 조금만이라고 했잖아, 잡종 주인아.]
“이방인, 아니 한 주임은 축복이라고 했잖아. 네 얼굴을 때렸는데도 축복을 줘 놓고는 나는 왜 저주냔 말이야!”
[그래서 브라우니가 갈비뼈를 박살 내줬지. 계산은 그걸로 끝.]
“그런 게 어딨어! 차라리 똑같이 저주를 주든가!”
안에서 심상찮은 목소리가 이어지자 브레고가 문에 대고 소리쳤다.
“이봐 수습 아가씨,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도움이 필요한 거야?”
“필요 없어요!”
“집요정의 성질을 너무 건드리지는 말라고, 그렇게 되면 아주 곤란해지니까.”
뒤에 한 말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도 용케 알아들은 브라우니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비소를 흘렸다.
[그래, 브라우니 경의 성질을 건드리면 아주아주 곤란해질 거야. 가만 보니… 잡종을 넣은 스튜도 꽤 맛이 좋을 것 같은데.]
그의 눈이 음험하게 번득거리고 벌어진 입에서는 맛있는 간식을 목전에 둔 사냥개처럼 군침이 흘렀다.
루는 순간 오금이 저렸다. 저주고 뭐고 일단은 도망이 우선이었다.
브라우니는 정말로 그렇게 할 것처럼 한걸음 떨어져서 루를 위아래로 유심히 훑고 있었다.
“아, 아무튼 나는 사과했어!”
사색이 된 루가 도망치듯 말을 던지며 문으로 달려 나갔다. 벌컥 열자 아니나 다를까,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다가 또 한 번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포라킨!”
다급하게 찾은 마법사는 화로 안에서 타다 남은 수면 약초를 주섬주섬 골라내고 있었다. 루는 단박에 포라킨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저주! 저주를 풀어 줘, 지금 당장!”
안 그래도 주방 안에서 루가 고래고래 목청을 드높인 탓에 대강의 사정은 다 들렸을 터였다. 포라킨이 난감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못 합니다. 브라우니는 요정 중에서도 상급이라, 저주를 건 당사자 외에는 푸는 방법이 없어요.”
“뭐라고?”
우악스럽게 어깨를 잡았던 손이 무의미하게 툭 떨어졌다.
루는 이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포라킨을 쳐다봤다. 개인적인 감정이야 어떻건 간에, 포라킨은 정말로 해주가 불가능했다.
상급 요정의 주술을 풀 수 있는 건 당사자 아니면 그보다 강한 힘을 가진 요정이어야 하는데 동급인 엘프나 드워프, 페어리는 당연히 불가하고 그나마 가능한 건 ‘요정들의 신’ 정도는 되어야 했다.
하지만 전설 속 존재와 같은 그들이 자신의 실체를 인간 앞에 드러냈다고 한 역사는 기록에서 본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브라우니에게 싹싹 빌어야 한다는 뜻이다.
루는 상황 파악이 끝나자마자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나 이미 텅 비어 버린 주방을 확인하고 나온 브레고가 안타깝게 고갤 저었다.
“틀렸어. 벌써 떠났어. 어이! 다들 이쪽으로 모여 봐라.”
그의 말에 루를 제외한 기사들과 용병들이 주섬주섬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집을 지키는 요정들은 이미 떠나 버리고 없었다. 브레고는 골치 아픈 뒷머리를 긁적이며 정문과 뒷문에 경비를 각각 두 명씩 배치했다.
아직 동이 트려면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했기에 순번을 정한 대원들이 장비를 챙기기 위해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얼굴엔 성가신 기색이 여실했다.
“이 밤에 무슨 난린지. 어휴.”
누군가 혼잣말처럼 툭 던진 말이 루의 뒤통수로 날아와 따끔하게 꽂혔다.
원래 이런 눈총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 이방인이었는데.
“주임님한테 허튼수작 부리지 마세요. 임선희 씨.”
거기다가 이한율까지 다가와 고개를 숙이더니 귓가에 스치듯 속삭이고는 지나쳐갔다. 루는 순간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어지는 걸 느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포라킨마저 약초꾸러미를 챙겨 들고 사라지자 비워진 자리에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하인이 놓고 간 촛대에서 음울한 빛이 아른거리며 썰렁한 공간을 힘겹게 밝히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북적거리던 곳이 금세 선득한 기운으로 가득 메워졌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낯설고 무거운 기운에 그대로 잠식당하는 것만 같았다.
루는 집요정에게 저주를 받았을 때보다도 더욱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한동안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 * *
야닉은 방으로 돌아와 하인을 시켜 침대 시트를 갈게 하고 포라킨에게 부탁해 한 주임의 옷을 갈아입혔다.
회복마법 덕에 외양은 아무 문제 없이 말끔한데 그녀는 잠든 내내 괴로운 얼굴로 신음하고 있었다.
[수면 약초에는 통증을 완화하는 효능도 있는데 이상하네요. 마법도 더 들지 않고요.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좀 더 지켜보시죠.]
포라킨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침잠한 눈으로 한 주임을 바라보았다.
미간을 좁히는 그녀의 이마를 손등으로 가만히 쓸자 고여 있던 숨이 물꼬를 트고 나온다.
“하아.”
한결 편안해진 숨소리로 몸을 뒤척인 그녀가 잠결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야닉은 곧바로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일일구… 전화…….”
“응?”
다시 들어 봐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라 그저 머리만 쓰다듬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한 주임의 잠꼬대는 어딘가 서글픈 모양새였다.
“아무도 없으니까….”
“내가 있잖아.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손을 잡자 안심이 되었는지 가느다란 손가락을 얽어 온다. 하루가 멀다고 잡아 왔던 손이건만,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뜨겁고 생경하다.
동시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연심이란 게 원래 이토록 애처로운 것이었나.
십 년이나 몸속에 불덩이를 안고 살았는데도, 그보다 더 뜨거운 것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 수 없는 힘이 생긴 후 몸은 늘 괴로웠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자신을 살아 있게 했다. 힘이 있기에 늘 위에서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관망했다.
한데 눈앞의 이방인이 나타나고 이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꽤 자주.
마력을 흡수하는 편리한 도구가 저를 돕지 않을까 봐 초조했고, 여행길에 험한 일을 당할까 봐 초조했다.
갑자기 관계를 끝내자 했을 때는 놀랄 만큼 암담해졌고 달밤에 친구가 되자 했을 때는 안심했다가도 못내 아쉬웠다.
언제부턴가 야닉은 물을 마셔도 충족되지 않는 갈증이 일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매일같이 그녀를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별거 아닌 일에도, 행동에도, 말에도 끊임없이 동조하고 안달했다.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더 괴로운 일이었다.
이방인은 끝도 없이 그를 쥐락펴락하며 구름 위까지 솟아 올렸다가도 단박에 진창으로 끌어내리곤 했다. 어디까지 몰아세울 참인지 자신도 궁금할 지경이다.
‘아마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일 테지.’
반응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더불어 세레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도.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인’이라는 여자는 기본적으로 늘 초조해 보였다.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항상 공사가 다망한지라, 가끔은 버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사람처럼.
모든 것을 주고 싶고, 또 가질 수 있는 여자는 무슨 이유로 초조한 것일까.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이자 최선의 추측이었다.
누구보다 의욕적인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애를 쓰는 것이 ‘뭐라도 열성적으로 매달릴 것이 필요해서’라면 어쩌면 가장 그럴싸한 이유가 되니까.
다른 생각이 안 나도록 몸을 굴리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일에 치여 사는 것을 도피처로 삼았을 수도 있을 법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자연스레 세레나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답이 없는 고민보다는 차라리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나을 듯싶다.
야닉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짐짓 익살스럽게 입을 열었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나 해 줄까. 별건 아니고 아주 흔한 이야기인데….”
“…….”
한 주임은 여전히 몸을 뒤척였다. 그는 그런 그녀에게 고백하듯 속삭였다.
“너무나도 지루해서 당신이 단잠에 빠져들 수 있도록.”
야닉은 바람을 일으켜 금장 촛대에 꽂힌 일곱 개의 촛불을 껐으나, 세 개가 살아남아 심지를 태우며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다시 끄려고 손을 들었다가 그조차도 번거로워서 그냥 두었다.
사실 어느 정도 충동적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한 번쯤은 들려주어도 좋지 않을까 한다.
어차피 그녀는 깊이 잠들어 있고 바깥은 아직 어두우니까.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의 시작은 항상 먼 옛날이지. 그러니까 이것도 그런 거라 치자고.”
그는 어린아이가 기도하듯 속살거렸다.
“아주 먼 옛날에 일곱 명의 형제가 살았어.”
그녀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 올리며 옛날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사실은 열세 명의 남매라 해야 하지만, 아버지가 여자 형제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거든. 형편없는 아버지지.
그래서 이 지루한 이야기는 일곱 형제만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대 같은 이방인들에게는 좀 불편한 주제인가? 그렇다면 미리 사과해 두지. 아버지가 워낙 고지식한 성정인지라.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일곱 형제는 총 네 명의 어머니가 낳은 아이들이야.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군.
첫째와 둘째가 친형제고, 셋째는 외동, 넷째부터 여섯째까지가 삼 형제,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도 외동. 이렇게 알고 있으면 돼.
여기서 네 명의 어머니들을 간략하게 소개하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으니 고려해 주면 고맙겠고.
첫째와 둘째를 낳은 어머니는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무척이나 무서우신 분이셨어. 그분이 웃는 걸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거든.
셋째를 낳은 어머니는 저 아래 남쪽 나라에서 시집온 공주님이었는데, 시와 노래를 사랑하는 낭만적인 분이셨어. 검술의 달인이기도 했고. 이건 너무 편파적인가? 어쨌든.
넷째, 다섯째, 여섯째를 낳으신 분은 불행히도 시기가 많아서 어딜 가든 늘 첫째의 험담을 일삼았어. 그 때문에 첫째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했지.
일곱 번째를 낳으신 분은 맨 끝에 잠깐 나와. 그리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이고.”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