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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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가족들은 다 함께 사냥을 나갔어.
그 나이대 소년들이 으레 그러하듯 형제들은 누가 더 크고 멋진 걸 잡는지 내기를 했지. 아이들은 호기롭게 어른도 없이 숲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어.
셋째는 사냥이 내키진 않았지만, 어머니가 따라가 보라고 한 탓에 미적미적 형제들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어.
셋째는 한참 후에야 으슥한 곳에서 그들을 발견했는데, 넷째가 흙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봤어. 둘째가 살피고 있었고 첫째는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하면서 서 있었지.
셋째는 나서지 않고 가만히 그들을 지켜봤어. 섣불리 끼어들었다가는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았거든.
둘째는 첫째를 한참이나 다그치더니… 결국 둘이서 넷째를 들어 가파른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어. 그러고는 뒤를 밟던 셋째를 발견했지.
사실 셋째도 은근히 넷째 어머니를 싫어했기 때문에 나서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던 참이었어. 비겁한 변명이긴 하지만 말이야.
넷째 어머니는 우리… 아니, 셋째 어머니의 흉도 곧잘 봤거든. 그녀의 피부색이 남들보다 조금 더 짙다는 이유로 거리낌 없이 모욕을 줬으니까.
아무튼, 고민하는 셋째 앞에 둘째가 길을 막아서더니 자기 이야길 들어 보라고 소리쳤어.
사건의 전말은 넷째가 먼저 첫째에게 달려들다가 저 혼자 넘어져서 바위에 머리를 부딪친 거라더군. 몇 번이나 흔들었는데도 숨을 쉬질 않더래.
셋째는 사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넷째는 제 어머니를 닮아 다혈질에다가… 정말이지 몸 쓰는 일엔 젬병이었거든.
그래서 아예 입을 다물기로 했지. 쓸데없는 오해를 사기도 싫었고.
집은 한바탕 난리가 났어.
넷째 어머니는 졸도하고 비명 지르는 걸 매일같이 반복하면서 첫째가 범인이라고 난동을 부렸어. 그녀의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이 온통 깨지고 부서지는 나날이 이어졌지.
첫째와 넷째 두 사람 사이가 나빴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 다른 사람들은 넷째 어머니가 그걸 빌미로 패악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어. 참으로 안일하게도 말이야.
그런데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서 이웃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가 되자, 방관만 하던 아버지는 넷째 어머니더러 남은 아이들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으름장을 놓게 돼.
아버지는 그녀가 고향에서 마음을 추스르면 나아질 거라 여겼는데, 불행히도 그건 아주 완벽히 잘못된 생각이었던 거야.
넷째 어머니는 웬일로 얌전히 돌아가는가 싶더니 이듬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어. 고작 열 살에 불과한 다섯째가 집안을 이어야 한다면서.
그동안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하더니 몰래 뒷공작을 준비했던 거지.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충성을 맹세한 지방 가신들이 많은 곳이었는데, 아마도 이번 기회를 틈타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이었을 거야. 거기다가 아버지가 못살게 굴었던 작은 나라들까지 동맹을 맺고 합세하자 정말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어.
아버지는 고심에 빠졌어. 당시로선 그만한 규모와는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거든. 병력도, 자금도 말이야.
첫째 어머니는 유서 깊은 가문이긴 하지만 고고한 학자 집안이라 세력이랄 게 없었고, 외국인이었던 셋째의 어머니는 누구의 편도 아니었어.
셋째는 이때 자신의 어머니가 의외라고 생각했어. 첫째 어머니와 잘 지냈는데 왜 도와주지 않는 걸까 하고.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뜻을 알 수 있었지. 대놓고 아버지의 편에 섰다가 넷째 어머니가 이기게 되면 그야말로 참혹한 결과를 맞이할 테니까. 그렇다고 넷째 어머니에게 붙자니, 그녀가 이긴다고 해도 자리를 위협하는 남의 아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란 걸 아셨던 거야.
셋째 어머니가 가운데서 시간을 끄는 동안, 아버지는 결국 기가 막힌 해결책을 찾아냈어. 첫째 아들의 약혼을 파하고 커다란 상단을 운영하는 대부호의 외동딸과 하루아침에 결혼을 시켜 버렸지.
상인은 지킬 것이 많으니 거느리는 사병이 무척이나 많았거든. 거기다가 용병들도 아주 많이 고용할 수 있는 돈도 있었고.
사실 처음에는 혼처를 물색 중이었던 둘째와 결혼을 시키려고 했는데, 상인이 첫째가 아니면 안 된다고 강수를 두는 바람에 못마땅해도 별도리가 없었어.
그렇게 집안싸움은 몇 달이나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첫째 어머니가 독살을 당했어. 내부에 첩자가 있었던 거야.
셋째 어머니는 그때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친정으로 피신을 했는데, 불행히도 셋째는 함께 가지 못했어. 아버지가 남아서 집을 지키라 하셨거든.
어머니의 나라로 떠난 건 셋째가 아니라 다름 아닌 첫째 부부였어. 셋째는 남겨진 둘째와 함께 죽을힘을 다해 싸웠지.
길고 힘든 공방 끝에 결국에는 이겼고, 넷째 어머니는 어린 다섯째, 여섯째와 함께 사이좋게 목이 잘렸어. 이들의 목은 제국 곳곳에 효시 됐는데, 제위를 넘보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본보기나 다름이 없었지.
상인의 딸은 미천한 출생에 이혼 경력까지 있고, 거기다 첫째보다 네 살이나 많았지만, 그녀의 뒷배경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기지 못했을 거야.
상인은 이를 빌미로 모든 대소사에 참견하기 시작하면서 집안을 자기 사람으로 채워 나가기 시작했어.
아버지는 곧바로 새장가를 드는 것으로 대응했는데, 그게 바로 일곱 번째 아들을 낳은 분이지.
사실 일곱 번째 아들은 아버지가 이전부터 몰래 감춰 뒀던 아이였어. 말하자면 정계 싸움의 희생양이 될까 봐 남겨 둔 최후의 보루였던 셈이랄까. 그 아이를 드러낼 정도로 아버지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거야.
둘째도 서둘러서 결혼을 시켰는데, 많이 급했는지 한 번에 부인을 둘이나 붙여 주더군.
아무래도 상인을 견제할 만한 다른 세력이 필요했거든. 상인이 어느 날 갑자기 집주인 자리를 탐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다행히 셋째는 어머니가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어서 그때 당시에 팔리듯이 결혼을 하진 않았어. 뭐, 나중에는 결국 하긴 했지만.
상인은 자연스레 불만이 생겼지. 가뜩이나 이 집안은 장수하기로 유명한데, 첫째 하나만 믿고 가장이 되기를 기다리는 건 너무나도 위험한 도박이었거든.
어느 날 갑자기 첫째가 덜컥 죽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모든 투자가 날아가는 꼴이잖아.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꾸역꾸역 자식을 늘려 가는데, 정작 상인의 딸이 아이가 없자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했어. 이혼 경력까지 있는 여자니까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귀족 회의에서 자꾸만 첫째의 후계 문제가 불거지자 상인은 고민 끝에 차라리 둘째와 셋째를 없애기로 하고, 날이면 날마다 은밀하게 자객을 보내고 독살을 시도했어.
그 사실은 안 셋째 어머니는 아버지를 압박했어. 셋째가 죽으면 자신도 넷째 어머니처럼 변할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아버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결국 셋째를 북쪽 변방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지.
그렇게 먼 곳이라면 암살의 위험도 적고, 원체 춥고 험한 곳이니 사고사를 당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셋째 어머니도, 상인도 둘 다 납득이 될 만한 조건이었던 거야.
그렇게 셋째가 떠나기로 한 전날, 둘째가 찾아와 은밀하게 말했어.
‘너와 나는 어머니가 다르지만, 서로의 등을 맡기고 함께 싸웠으니 친형제나 다름없다.’
저를 버리고 도망간 첫째는 이제 형제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면서, 북부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첫째를 몰아내고 자신이 집안을 잇겠다고 했지.
…그런 뒤에 셋째를, 나를 부른다고 했어. 시즈가 말이야.”
말을 마친 야닉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어느새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한 주임을 향해 보드랍게 웃었다.
“숙면에는 역시 지루한 이야기가 제일이지?”
아이처럼 새근거리는 여자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는 문득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넷째는, 정말로 혼자 넘어져서 죽은 걸까.
마지막 말은 입 안을 맴돌다가 흐트러졌다.
궁에 갈 때마다 계속 늘어나 있는 시즈의 부인들은, 어느 순간부터는 황제가 아닌 그 스스로가 앞장서서 들였다고 했다.
거기다가 먼저 나서서 이든을 낳은 황비와도 동맹을 맺었지.
시즈는 마치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한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정말로 단순한 사고에서 비롯된 우연일까.
* * *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에 잠에서 깬 한 주임은 몽롱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머리 위로 이층 침대의 아래 판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아침인지 아직 새벽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방으로 들어온 포라킨이 다가와 묻는 소리에 정신이 맑아졌다. 한 주임은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괜찮아요.”
사실은 약간 결리긴 하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이 정도면 어제보다는 확실히 괜찮은 편이긴 하지.
자세를 바로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자 그제야 창밖으로 해가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구름에 가려지고 우중충한 날씨였지만 체감적으로 아침은 이미 지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루는 맞은편 침대에서 신명 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황자님은 아직 일찍 떠나셨고, 저희는 여기서 쉬다가 요새로 돌아가라고 하셨어요. 너무 늦게 일어나면 하루쯤 더 묵고요.”
야닉이 떠났다는 소리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포라킨은 옷가지들을 가방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요새로 돌아가면 주임님은 뼈가 제자리에 잘 붙었는지 확인해야 하고, 저는 루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루는 당분간 근신 처분이 내려져서 집으로 보낼 겁니다.”
“아… 황자님은 그럼 언제 돌아오세요?”
“열흘 정도는 걸릴 거예요. 근방까지 마물이 다가오지 않으면 숲으로도 들어가시거든요, 보통은.”
열흘이라니, 그렇게 오래… 하다가 퍼뜩 눈이 커다래졌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저는 다른 사람에게 마력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생각과 동시에 문밖에서 남자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주임님, 일어나셨어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아, 한율 씨. 잠깐만!”
한 주임은 놀란 닭처럼 푸드덕거리며 이불을 들춰 내고 신발을 구겨 신었다. 루가 배까지 드러내 놓고 대자로 뻗어서 자고 있는지라 함부로 방에 들일 수 없었다.
벽에 걸린 로브까지 대충 두르고 밖으로 나가자 어딘가 상기된 얼굴의 이한율이 보였다.
“단장님한테 말씀 들으셨어요? 저희는 성으로 돌아갈 거에요.”
“방금 들었어. 루가 아직 자고 있는데…. 지금 몇 시야?”
그의 손목시계에 시선을 두고 묻자 이한율이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
“기계식이라 정확하진 않은데 대충 열한 시요. 늦지는 않았으니까 여기서 점심 먹고 출발하면 저녁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숙녀분들은 기상하셨나?”
그때 아래층에서 브레고가 소리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