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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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 대원들만 있는 토벌대에서 유일하게 베테랑인 그가 남아 있다니, 한 주임은 절로 낯빛을 흐렸다.
“브레고 님은 황자님과 같이 가신 게 아니었나요?”
걱정스럽게 묻는 그녀의 질문에 브레고는 과장되게 허리를 굽혔다.
“이 브레고 엘다가 영광스럽게도 숙녀분들의 ‘무사 귀가’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됐죠.”
“그럼 황자님은….”
포라킨도 여기 있어서 만약에 다치기라도 하면 치료도 못 받을 텐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신뢰가 가기 어려운 인원 구성인지라 절로 수심이 가득 찼다.
“대장님만 있으면 일곱 살짜리 어린애들만 있어도 아무 문제 없어요. 어제 직접 봤잖습니까. 어떨 때는 마물한테 동정심마저 들 정도라니까요.”
브레고는 미간을 한껏 좁히고 있는 한 주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얼굴로 씩 웃었다.
“대장님 걱정하실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제 목을 걸어도 좋아요. 저희는 식사나 먼저 할까요?”
그녀는 마지못해 고갤 끄덕였다. 이한율을 따라 미적미적 내려가면서 보니 브레고 말고도 다른 수습기사 한 명과 세 명의 종자가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한나절만 말을 타고 가면 되는 길에 다섯 명이나 붙여 주다니.
괜히 따라와서 짐 덩어리가 된 것만 해도 무안해서 죽을 지경인데, 출정 하루 만에 요새로 복귀하게 된 그들 앞에 차마 얼굴을 들고 있기가 민망했다.
거기다가 음식도 성에서 챙겨 온 사과 파이와 훈제 고기였다. 양도 제법 많아 보여서 우리한테 이걸 다 주면 야닉은 바깥에서 사냥한 동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토끼 통구이는 정말이지 끔찍해서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였으니까.
한 주임은 몇 입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결국 찻물로 입 안을 헹구고 브레고에게 말했다.
“올 때 보니까 요새까지 그렇게 멀지도 않고 위험하지도 않던데, 그냥 저희 넷만 돌아갈 테니 브레고 님은 다른 분들과 같이 황자님께 가시는 건 어떨까요?”
저와 포라킨, 이한율과 루 이렇게 넷이서만 돌아간다는 이야기였다.
마음 같아선 이한율도 데려가라고 하고 싶지만, 그놈의 마력이 문제였다.
야닉이 돌아올 때까지 열흘이나 되는 시간을 제가 버틸 수 없을 테니까. 포라킨 역시 해주 과제를 받았으니 어쩔 수 없고.
얼마 먹지도 않은 점심이 곧장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내서 한 말인데, 브레고는 포크와 나이프로 날렵하게 고기를 자르며 여상히 대꾸했다.
“안 그래도 모셔다드리는 대로 바로 돌아가서 합류할 겁니다. 간 김에 아예 눌러앉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우리 대장님이 절 너무 좋아해서요.”
그가 푸념 같은 자랑을 늘어놓을 때 짐을 싸서 내려온 포라킨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분간은 이게 제 마지막 식사가 될 것 같으니 아무도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돌아가면 곧장 탑에 틀어박혀서 온갖 저주와 맞서 싸워야 하니까요.”
포라킨은 잔뜩 저기압인 얼굴로 투덜거렸다.
“힘내, 미네. 그런데 우리 사고뭉치 아가씨는?”
“안 먹겠대. 말 걸지 말라니까!”
돌연 버럭 하는 포라킨이 낯설어서 이한율과 함께 눈치만 보고 있는데, 브레고는 익숙한 일인 듯 콧잔등을 찌푸리며 킬킬거렸다.
* * *
원정 하루 만에 요새로 다시 돌아온 그들 주위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달라붙었다.
성으로 복귀하기 전 루를 임식당 앞에 고이 내려놓은 브레고는 엄한 상관의 얼굴로 명했다.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무기한 자택 근신 처분이다. 따라서 용병대 관사는 물론, 본성 출입도 제한한다.”
“왜 저만 근신인데요? 이방인은요?”
대뜸 반발하는 루에게 브레고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방인은 우리 대원이 아니라서 내 권한 밖의 질문인데. 아, 그러고 보니.”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기자 한 주임은 긴장된 얼굴로 침을 꼴깍 삼켰다.
“이방인은 치료 잘 받고, 밥도 잘 먹고 있으라고 하시더군.”
그의 말에 한 주임이 바람 빠진 얼굴로 고갤 돌렸다.
당사자보다 더 실망한 얼굴의 루는 인사도 없이 가게로 들어가더니 문이 부서져라 쾅 닫아 버렸다. 그 모습에 포라킨은 혀를 차며 말머리를 돌렸다.
어느새 말에 올라탄 브레고가 바짝 가까이 오더니 귓속말하는 시늉을 하며 속닥거렸다.
“대장님이 돌아오면 할 말이 있으니 잘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해 달랍니다.”
한 주임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랴! 하고 앞으로 치고 나가는 브레고의 등을 잠시간 멍하니 바라봤다.
기다리는 거면 기다리는 거지, ‘잘’ 기다리는 건 또 어떻게 하는 거람. 괜히 웃음이 나려는 걸 참다가 얼른 뒤를 따라 달렸다.
불행히도 군사용 의료병동에 도착해서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병원이 자리한 곳 특성상 주로 외상 환자를 다루는 사제와 그들을 보좌하는 부제들은 대체로 날이 서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말도 죽어라 듣지 않는 거친 용병들을 다년간 상대하다 보면 절로 쌓이게 되는, 어찌 보면 당연한 태도였다.
“나무망치로 옆구리를 얻어맞으셨다고요.”
하얀 의복을 입고 있던 치료 사제가 의무적으로 하는 질문에 괜히 위축되어 한 주임은 조그맣게 네, 하고 대답했다.
사제는 지독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 주위에 커튼을 드리웠다.
“침대에 누워서 옷을 위로 올리고 있으세요. 선생님이 오셔서 봐주실 겁니다.”
할 말만 마치고 밖으로 나가 버린 사제는 밖에 있던 포라킨과 무어라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뚜벅뚜벅 어디론가 멀어져 갔다.
한 주임은 빳빳한 시트 위에 누워서 멀거니 회색 천장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커튼이 조금 열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한국분이시구나.”
한 주임은 익숙한 억양이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피부과 양승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가운을 입고 있는 중년남성이 있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스툴 의자에 앉았다.
“고향 분들 앞에서는 제가 가운을 잘 안 입는데, 하필 피부과가 소환이 돼 가지고 참. 그래도 의사 면허는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마시고요.”
농담 섞인 상투적인 말투에 한 주임은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허구한 날 뼈 부러진 환자들만 볼 줄 알았으면 차라리 정형외과로 갈 걸 그랬어요. 이런 곳에서는 사실 외과나 내과 선생님이 더 필요하잖아요.”
자조적으로 웃으며 그가 얇은 면장갑을 꼈다.
한 주임은 무어라 대꾸하려다 관두고 배만 깐 채로 누워 있었다.
“CT를 찍을 수가 없으니 저한테 증상 설명을 잘해 주셔야 합니다. 촉진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요.”
양승원은 그녀의 자세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팔을 들었다 놨다, 똑바로 세웠다가 눕혔다가를 반복하며 반응을 살폈다. 아무래도 팔다리도 아니고 흉부인지라 그도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이것저것 불편한 것은 없는지 묻던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 사람들은 마법이라는 편리한 능력 때문인지, 안전 불감증도 심하고 몸을 너무 함부로 다뤄요. 뼈가 부러져도 마법으로 뚝딱 붙이면 되는 줄 알고 있고요. 듣자 하니 오늘 말을 타고 오셨다죠?”
“넵.”
순간 의기소침해져서 자그맣게 대꾸하자 양승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부터는 마법으로 치료를 받아도 곧바로 움직이지 마시고 바로 병원으로 오세요. 기왕이면 들것에 얌전히 누워서요. 만에 하나라도 부러진 뼛조각이 다른 곳에서 말썽을 일으키면 그때는 마법으로도 어쩔 수가 없어요. 수술로 제거해야 하는데, 이곳에서 외과수술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제 말뜻을 아시겠어요?”
진지하게 충고를 하는 그의 얼굴에 새삼 겁이 났다.
단순히 얻어맞았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 갑자기 생생하게 와닿는다.
가운을 입은 현대 의사가 하는 말의 무게감이란 실로 현실적이고 두렵기까지 했다.
양승원은 여느 진료실 안의 교수님들 같은 표정으로 진단을 내렸다.
“일단 며칠은 여기서 주무시면서 경과를 보도록 하죠. 만약에 숨쉬기가 어렵다거나 소변보는 데 이상이 있으면 바로 사제님들한테 말씀해 주시고요.”
그는 끄트머리를 끈으로 엮은 양피지 꾸러미를 몇 장 넘기더니, 포켓에서 꺼낸 만년필로 무어라 빠르게 적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부과라고 해서 의사 말 안 들으시면 안 됩니다?”
마지막 말은 양승원이 이곳에 와서 겪었던 고충들을 함축하고 있었다.
뒤이어 들어온 부제들이 한 주임이 누운 침대를 질질 끌고 경사로를 올라 위층으로 그녀를 옮겼다.
다인실로 지어진 병동에는 한 주임 말고 다른 환자는 없었다. 부제들은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핀 뒤 등잔을 몇 개 켜둔 채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지고 창문을 통해 들어온 붉은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졌다.
멀뚱멀뚱 누워 있던 한 주임은 조금 심심해졌다.
양승원이 겁을 준 탓에 함부로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점심에 밥도 멀쩡히 먹고 말도 탔는데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뜨문뜨문 들었다.
“주임님, 접니다.”
슬쩍 몸을 일으켰다가 문밖에서 들리는 포라킨의 목소리에 그녀는 얼른 도로 누웠다.
“네!”
문을 열고 들어온 포라킨이 곧장 한 주임에게 가지 않고 입구에 서서 입원실 내부를 스윽 둘러보았다.
양승원의 요청으로 새로 지은 건물인지라 깨끗은 하다만, 아무리 봐도 안락함이나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응급상황 시 대처가 어렵다며 귀족과 평민실을 구분 짓지 않아 언제든 야인을 포함한 평민들이 한 주임과 함께 방을 쓸 수도 있었다.
포라킨은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야닉이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본다면…….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오셨어요.”
한 주임이 먼저 말을 꺼내자 포라킨은 그제야 침대로 다가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제가 1차로 치료를 했으니 이방인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환자 인수인계’라는 것을 해야 한다더군요. 양 선생님의 지침이라서 들렀습니다.”
“아….”
가만히 고갤 끄덕이는 한 주임에게 포라킨은 약간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
“겁주기는 양 선생님 주특기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분은 못에 손가락만 찔려도 죽을 수 있다고 하시는 분이라서요.”
한 주임은 입을 들썩이다가 그만두었다. 포라킨 앞에서 굳이 아는 체를 하고 싶진 않았다.
“오늘만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은 본성으로 옮기시죠. 부제님들에게 전달해 놓겠습니다. 진료는 왕진으로 받으시고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사양하려다가 한 주임은 그것 역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미엘라나 김유정이 수시로 와서 조잘대는 제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포라킨이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