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72화 (72/155)

72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작품입니다. 저자와 발행처의 허락 없이 본 저작물로 무단전재,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 시 민사 및 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지나가던 부제가 ‘정숙!’ 하고 뾰족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소음이 확 잦아들었다가 곧이어 요란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제인! 우리 왔어!”

블라산코의 목소리였다.

포라킨이 가서 문을 열자 블라산코와 폰, 미르가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미르에게 가려져 있던 맨 뒤에는 이한율이 있었다.

“한율에게 들었어. 브라우니랑 한판 붙었다면서? 역시 우리 동기야.”

미르가 머리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서며 말하자 블라산코가 콧대를 세웠다.

“스승이 누군데 그럼!”

“가르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스승인가.”

폰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블라산코를 올려다봤다.

한 주임은 예상치 못한 얼굴들이 보이자 반가움에 크게 입을 벌렸다.

입원 중에 면회를 받는 것은 난생처음이라 감회가 더욱더 남달랐다. 그러면서도 고작 튀어나온 말이라고는,

“제가 무슨 동기예요. 용병도 아닌데….”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대사였다. 하지만 미르는 일절 개의치 않는 얼굴로 시원스레 정정했다.

“어허. 용병은 원래 한번 동료 삼으면 고용주가 바뀔 때까지는 계속 동료인 거야. 우리 고용주가 황자인 이상, 제인은 계속 우리 동료인 거지.”

“맞는 말이다.”

폰이 격하게 고갤 끄덕였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앉을 것을 끌고 와서는 어쩌다가 브라우니와 혈투를 벌였는지 꼬치꼬치 캐물으며 신나게도 떠들어 댔다.

“…아이노스에서는 브라우니와 눈이 마주치면 백 일간은 재수가 없고, 몸이 닿으면 백 년은 행운이 따른다고 하는 속담이 있지.”

블라산코의 말에 미르가 불신의 눈으로 반박했다.

“같은 요정끼리나 그렇겠지. 백 년도 못사는 인간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속담은 아닐걸.”

“수인족은 평균수명이 50년 정도니, 우리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겠군.”

폰은 자못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그들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어 댔다. 신입들이 요새에 적응하면서 겪었던 웃지 못할 이야기를 나누고, 그다음으로 스캄의 흉도 조금 본 다음에는 황자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주임과 황자의 관계에 호기심이 날아들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온갖 무성한 소문이 하도 사용인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니까, 신입들 입장에선 전말이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미르가 먼저 거리낌 없이 포문을 열었다.

“소문으론 황자님이 제인에게 첫눈에 반했는데, 제인이 ‘어딜 감히 유부남이!’ 하면서 뺨을 후려쳤대. 그런데 사실은 제인도 황자님을 사랑하고 있어서 너무 괴로운 나머지 아침마다 죽어라 뜀박질을 하면서 잊고 있다고 그랬어.”

“그런가? 내가 들은 내용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는데, 황제의 반대가 심해서 둘이서 몰래 야반도주를 하려다가 포기했다, 이거였는데. 포기한 이유는 밖이 너무 추우니까 겨울만 지나고 도망가자고!”

미르와 블라산코가 만담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낄낄대자 이한율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되게 할 짓 없는 분들이 지어낸 말이네요. 그런 헛소문들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는 동감이다.”

폰까지 고갤 끄덕이자 이번에는 미르와 블라산코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한 주임은 난감함과 약간의 민망함에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런 주제라면 차라리 혼자 있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후회하고 있을 때 병동 부제가 구세주처럼 등장해 주었다.

저녁 식사를 들고 온 그녀가 손님들은 그만 돌아가라고 칼같이 굴어 준 덕에 그들은 미적거리면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부제는 묽은 수프를 협탁에 내려놓으며 토로하듯 당부했다.

“하여튼 용병들은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워요. 아래층까지 소리가 다 들리니까, 친구분들이 방문하시면 사자님께서 적당히 조용히 시켜 주세요.”

“넵.”

혼내는 말마저 고마운 부제가 나가고 난 뒤 한 주임은 스푼을 들다가 멈칫하고는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친구분들.”

어쩐지 간질간질한 단어에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천천히 수프를 떠먹었다. 간도 약하고 삼삼했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 * *

다음 날 포라킨이 예고했던 대로 하랑과 하인들이 자신을 데리러 왔고, 한 주임은 본성으로 돌아왔다. 정확하게는 들것에 들려서 왔지만.

창피한 나머지 얼굴 위에 손수건을 덮었다가 죽은 사람 같으니 그만두라는 하랑의 말에 그녀는 고스란히 하늘을 보면서 방까지 왔다.

하랑은 취발론에서 돌아온 이후 착실하게 쉬고 먹으며 혈색을 찾은 듯 보였다.

“사실은 원정에서 빠지려고 회복이 덜 된 척한 거죠?”

장작 사이에 관솔을 찔러 넣으며 미엘라가 눈을 흘기자 하랑이 천장으로 눈알을 굴렸다.

“아닌데요.”

“사실대로 말해 봐요. 하랑이 데려온 사람 정체가 뭐래요? 우리 사이에서는 벌써 흑마술사라는 소문이 돈다고요. 그게 정말이에요?”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던 한 주임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황실 갑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남자에 관해 물어본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미엘라의 추궁에 하랑은 대놓고 딴청을 피워 댔다.

“저는 잘 모르는 일이에요.”

그럼 그렇지, 황자의 최측근인 그가 말을 할 리가 있나. 미엘라는 괜한 기대감을 지우려 신경질적으로 부지깽이를 들쑤셨다.

한 주임은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면 하랑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불을 지피고 드디어 나가려던 미엘라가 돌연 깜짝 놀라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집사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루이자는 담담한 얼굴로 미엘라에게 고갯짓을 했다.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미엘라는 무안한 얼굴을 찌푸린 채 쫓겨나 버렸다.

“하랑도 그만 나가 보세요.”

취발론에서의 모험담을 한 주임에게 늘어놓을 작정이었건만, 평민인 하랑이 귀족인 루이자에게 반기를 들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기야 귀족도 아닌 제가 황자의 시종이 된 것부터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인지라 그녀가 예우해 주는 것만 해도 머리를 조아려야 할 판이었다. 하랑은 짐짓 아쉬운 얼굴로 방을 나섰다.

루이자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는 한 주임을 향해 손을 들고 누워 있으라는 말을 대신했다.

“대강의 사정은 브레고 경께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아직 회복 중이시니 그대로 계시죠.”

문을 닫고 걸어 들어오는 그녀의 몸짓은 한 치의 흐트러짐 하나 없이 완벽한 귀족의 그것이었다. 한 주임은 어색함에 몸을 긴장시켰다.

“한 주임님과는 황자님께서 안 계실 때 이야기를 한번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기, 의자….”

꼿꼿하게 서서 말하는 루이자가 불편할까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지만 그녀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서서 말하는 것이 더 익숙합니다.”

무안해져서 절로 입이 다물어지는 냉랭한 어투였다.

루이자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것이 불편한 주제를 꺼내기에 앞서 가지는 잠깐의 침묵이라는 걸 그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황자님께 마력을 받고 계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한 주임님의 목숨과 관련해 중요하다는 사실도 포함해서요.”

한 주임은 누워서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본론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먼저, 사적인 감정은 가문의 명예를 걸고 한 치도 없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절로 사무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루이자가 먼저 서두를 그렇게 꺼내니 한 주임으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차분한 대답이 의외였는지 루이자는 아주 잠깐 침대를 보다가 다시 자세를 바르게 세웠다.

“황자님께서는 당신의 지위에 상관없이 귀족, 평민을 가리지 않고 친근하게 대하시는 편입니다. 이방인들과 자주 소통하며 그런 면이 더욱 짙어지셨죠. 하인들이 스스럼없이 황자님을 존함으로 부르는 것도 그분의 관대한 성품 때문입니다.”

루이자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미간을 한번 찡그렸다.

아직 본론도 아니건만 한 주임은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래도 존대를 했던 것 같은데, 반말한 걸 들켰나?’

괜히 찔려서 눈치가 보였다.

“특히나 이방인분들에게는 더더욱 살가우신 편입니다.”

“…네.”

표정을 갈무리하고 대답하는데 등이 점점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그 영향 탓에… 황자님이 꽤 무르게 보였는지, 이성적으로 접근하려는 이방인도 없잖아 있었지요.”

미엘라가 벽난로에 단단히 무슨 짓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장작불이 오늘따라 거세게도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안 그러면 이렇게 땀이 날 수가 없다.

“하지만 황자님은 이미 델피온의 왕녀와 결혼을 하신 몸이죠. 중혼이 금지인 델피온에선 자식이 없을 때만 정비를 인정하겠다고 했고요.”

이쯤 되면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재벌과 연애하다가 ‘이쯤에서 물러나!’라는 대사를 읊는 시어머니 앞에 앉은, 아니 드러누운 가난한 여자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저는…….”

일말의 자존심으로 입을 열어 놓고도 뭐라 설명할 길이 없어서 입만 벙긋거리는데, 루이자가 단호히 말을 잘랐다.

“아직 이야기 중입니다.”

“…네.”

고압적인 눈빛에 절로 작아졌지만 반박할 수도 없어서 일단은 다물었다.

“미엘라가 이미 말씀드렸을 거라 예상은 하지만, 세레나 공주님은 현재 실종상태입니다. 그걸 빌미로 접근하는 여성들은 몇 명이나 더 있었죠. 로엘의 고등 귀족, 상단주의 친인척, 위장 취업까지 감행한 평민, 심지어 혼인이 금지된 사제까지….”

루이자는 보통 여기까지 말했으면 발끈해서 자기는 그들과는 다르다며 화를 내거나, 아니면 눈물을 글썽이며 도리어 피해자를 가장했던 과거의 여성 몇 명을 떠올렸다.

하지만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잠잠한 이방인을 보고 약간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황자님께선 자신에게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여인들을 제법 단호하게 무시하셨습니다.”

‘그동안은요.’

이 말은 입속에서 삼켰다. 루이자 역시 야닉이 이제껏 봐 왔던 모습과는 다른, 심지어 처음 보는 들뜬 얼굴에 경악을 마지않았기 때문이었다.

제 예상이 맞다면, 야닉은 이 이방인을 제대로 이성으로 보고 있다. 그것도 호감을 넘어서 ‘좋아하는 여자’로 말이다.

감히 윗전의 연애사에 관여한다는 건 주제넘은 일이었지만 제 윗전은 그냥 윗전도 아니고 제국의 황자였다.

외교 문제까지 불거질 수 있는 사안인 만큼 개인의 사생활로만 치부할 순 없다. 그렇기에 집사장은 물론 책사의 직책까지 맡은 자신이 무시하고 넘길 일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본인의 사명을 굳건히 다졌다.

“본인의 지위에 대해 지극히 이성적으로 자각하셨기 때문에 여자 문제는 일절 없으셨죠. 사별도 아니고, 첫 번째 부인이 실종된 상태에서 두 번째, 세 번째 결혼을 추진하는 경우는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