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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73화 (73/155)

73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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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자는 멈칫했다가 한껏 낮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제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사랑에 빠진 남자들은 종종 어리석은 행동도 서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정부를 집에 끌어들였다가 전 재산을 위자료로 빼앗기고 이혼을 당한다든지 하는 일 따위를… 말입니다.”

본인의 과거까지 밝힌 탓에 자연히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녀는 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본론으로 돌아왔다.

“…황자님의 재산은 웬만한 제후들보다 많은 편이고, 델피온 왕국은 호시탐탐 그것을 노리고 있지요. 도의적 책임을 물어 황실에 압박도 가능할 테고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왕족들입니다.”

한 주임은 그제야 루이자가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단순히 떨어지라는 말이 아니라, 저로 인해 야닉이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오로지 그 생각에만 몰두하느라 불행히도 루이자가 말한 ‘사랑에 빠진 남자’라는 전제는 머릿속에 남아 있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저 때문에 제국이 난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들었어요….”

그녀는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 애썼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사실을 알게 되어 천만다행이라고 여길 정도로 루이자가 고마웠다. 계속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문제가 생긴다면 그땐 자괴감에 빠져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루이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황자님이 안 계실 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비겁하다는 건 압니다. 한데 도통 제 말을 듣질 않으시니 저로선 최후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주시면….”

“아니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집사장님 아니었으면 아마 문제가 터질 때까지 저는 몰랐을 거예요. 변명같이 들리시겠지만 제 개인적인 문제로도 정신이 없어서 그런 방면으로는 전혀 신경 쓰질 못했거든요.”

말 그대로 하루하루 마력을 받고, 수업을 듣고, 야닉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느라 제대로 사고할 여유가 없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짓인지…….

루이자의 감람색 홍채가 크게 번졌다. 말해 줘서 고맙다고? 진심인가? 하는 눈이었다.

한 주임은 정말로 자책하는 것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연기? 아니면, 진심?’

어릴 때부터 집사교육을 받는 전문인들에 비할 바는 아닐지라도 루이자는 웬만한 사람들보다는 비상하고 눈썰미가 좋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한데 눈앞의 이방인은 단박에 파악하기가 어려워 자연히 눈매가 가늘어졌다.

전남편이든, 상단주든, 외교관이든 간에 자신의 이익만 좇는 부류만 상대해 왔으니 습관을 넘어서 병적으로 의심부터 들 수밖에 없었다.

한 주임은 숨이 막혀 있던 사람처럼 호흡을 길게 토해 내더니 손을 내렸다.

“…제가 주의를 할게요. 그렇지만 황자님이 저를 가까이하는 건, 제가 그분의 마력을 흡수하기 때문이기도 해요.”

“알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서로에게 필요한 관계겠죠. 그것과는 별개로 주변 상황이 안 좋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쯧, 역시 황자님 탓으로 돌리는 건가 싶어서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데 실망할 틈도 없이 이방인은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엉뚱한 소릴 했다.

“차라리 황자님이 저를 따라다니고, 제가 거부하고 있다는 소문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예?”

순간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천박한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한 주임은 눈치를 보는 와중에도 조곤조곤 제 할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요지는, 저와 황자님이 아무 사이도 아니면 되는 거잖아요. 제가 거부하고 있다면 외도가 성립되지는 않죠…. 그럼 마력도 전처럼 주고받을 수 있고, 델피온에서도 딱히 문제 삼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한 주임 말대로 외도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아내도 없이 외로움에 지친 남자가 여자 뒤꽁무니 좀 쫓았기로서니 그걸 가지고 바람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억지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냉정하게 따지자면 제국에서 고작 델피온 같은 소왕국의 눈치를 보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가능한 한 시끄러워지지 않게 하려고 야닉이 고분고분한 척을 했을 뿐.

“여기 분들은 왠지 가십, 아니 소문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그건 사실이었기에 루이자는 반박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방인이 왔던 첫날부터 황자가 뺨을 맞았다는 헛소문도 벌써 델피온까지 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국경을 넘나드는 상인들의 정보력이란 그 정도로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다가 금방 명료해졌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한 주임은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무척이나 끌리는 방법입니다.”

델피온이 무력으로 항의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나라도 아니고, 황실에 항의 서신을 보낸다고 해도 그 오웬 3세가 북방 약소국 따위에 진지하게 반응할 리 없다.

오히려 3황자가 또 철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오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할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잘만 하면 이쪽에서도 억측을 주장하며 델피온에 반격할 거리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회로가 그렇게 돌아가자 절로 마음이 급해져서 깍지 낀 손가락 사이가 금방 뜨거워졌다.

델피온이 정말로 트집을 잡고 늘어지면 이쪽에서는 단칼에 일축하고 불쾌함을 내비치는 것만으로도 입장우위를 다질 수 있다.

성공만 한다면, 매번 피해자 타령을 하며 돈을 요구하는 델피온의 입을 어느 정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도 안 되는 과장된 소문을 내야 더욱 유리할 법일 터였다. 그 또한 문제없었다. 소문 퍼뜨리기 정도는 걱정하지 말라는 하녀장과 어린 말괄량이들이 벌써부터 눈에 빤했으니.

루이자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고 한 주임을 향해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갑자기 할 일들이 떠올라서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부디 몸조리 잘하고 계십시오.”

“네?”

난데없이 무섭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 당황스러워서 되묻는데, 급하게 발을 놀리던 루이자가 우뚝 멈추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제국법상 실종 이후 5년이 지나면 사망으로 간주합니다. 사실 그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죠.”

“…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세레나 공주님이 실종된 지 5년이 됩니다. 두 분 다 그때까지만 참아 주시면 됩니다.”

“……네?”

제 할 말만 속사포로 쏟아 내고 큰 보폭으로 사라지는 루이자는 걷는 모양새였지만 거의 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속도로 멀어져 갔다.

복도에서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본 하인들이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좌우로 흩어졌다.

* * *

누워만 있는 채로 며칠이나 더 지났다.

식사도, 볼일도 아무런 문제 없이 가능했고 몸을 움직이는 데도 불편함은 없었다.

양승원은 다른 문제는 없어 보인다며 일상생활을 해도 좋다는 진단을 내렸지만, 한 주임은 쉽사리 침대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아직도 추우세요, 주임님?”

미엘라가 소매로 이마 땀을 훔치며 벽난로에 장작을 몇 개 더 던져 넣고는 걱정스레 물었다.

이미 사우나 같은 열기로 방 안이 가득 찼건만 한 주임은 여전히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좀 나아진 것 같아요. 이 정도면 괜찮으니 미엘라는 그만 가 봐요.”

턱까지 솜이불을 끌어 올린 채로 하는 말치곤 신빙성이 없었지만, 더 있다가는 익어 버릴 것만 같은 공기에 미엘라가 얼른 인사를 하고 밖으로 후다닥 나갔다.

한 주임은 이가 딱딱 부딪치는 한기를 느끼며 마력을 받지 않고 있는 날짜를 헤아렸다.

‘5일째, 다리에 힘이 풀려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거동이 불편해지는 수준.’

나중에 수첩에 적어 놔야겠다고 생각하며 파르르 떨리는 몸을 옹송그렸다.

그러고 보니 올 때가 됐는데, 문을 힐끔거리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도 벌컥 열렸다.

“흐엑. 이게 무슨 일이야! 주임님, 안 더워요?”

꿀을 탄 레몬주스를 들고 들어오던 김유정이 경악하며 목청을 높이는 뒤로, 염 부장이 바지춤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따라 들어왔다.

“임 사장이랑 빙어 낚시 가기로 했는데. 이야, 한 주임이 많이 컸다. 으른을 오라 가라 할 줄도 알고.”

간만에 듣는 염 부장의 염병은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다. 한 주임은 피식 웃으며 넉살을 부렸다.

“두 분이 저 좀 봐주세요….”

“엥…. 주임님, 진짜로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안 하던 말까지 하는 걸 보면.”

한 주임답지 않은 대사에 김유정이 옴팡 울상을 짓자 염 부장 역시 속으로 수긍했다.

뻣뻣하기로 제일가는 부하 직원이 약한 소리를 다 하다니.

포라킨이 운영팀더러 돌아가면서 마력을 나누어 주라고 했을 때는 다른 이방인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나한테 그러나 싶었는데, 막상 와서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는 반쪽이 된 한 주임을 보니 염 부장의 마음도 제법 불편해졌다.

‘하긴. 저 외골수가 생면부지인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할 리가 있나.’

그러면서도 나머지 세 명이 보이지 않자 염 부장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아니, 박혜진이랑 공 대리는 그렇다 쳐도 이 사원은 왜 코빼기도 안 비쳐?”

“박 차장님이랑 공 대리님은 남에게 줄 정도의 마력은 아니고, 한율 님은 혹시 모르니 요새 방비책으로 아껴 두려고요.”

한발 늦게 방으로 들어온 포라킨이 문을 꼭 닫으면서 말했다.

전자는 사실이지만 후자는 거짓말이었다.

이한율에게 마력 받는 것을 꺼렸던 한 주임에게 포라킨이 그럼 이렇게 말을 맞추자며 제안한 것이다. 한 주임은 덥석 좋다고 했다.

“세 분한테는 죄송하지만, 비밀로 해 주시죠. 받아들이기에 따라 기분 나쁘실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 말까지 완벽한 핑계가 되었다.

다행히 수긍이 된 모양인지 김유정과 염 부장은 별말이 없었다.

“먼저 부장님부터 이쪽으로 오세요. 주임님은 장갑 벗으시고요.”

한 주임은 털장갑을 벗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야닉이 아닌 다른 이에게 마력을 받는 것이 알리온 주교 외에는 처음이라 걱정이 앞섰다. 그때는 야닉의 것으로 대부분 채우고 알리온에게는 아주 조금만이었으니까.

“손가락부터 시작해 보죠. 염 부장님은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손을 떼 주세요.”

한 주임은 포라킨의 감독하에 염 부장과 검지를 맞붙였다.

전달되는 양은 닿아 있는 면적과 비례하므로 손가락 끝으로만 흘러 들어오는 것은 미미했지만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어어, 이제 어지럽다.”

염 부장이 금방 손을 거두고 눈치를 보자 포라킨이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아직 10초도 안 지났습니다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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