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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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임은 박 차장의 물고 늘어지는 집요한 성격에 적당히 넘어가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염 부장이 불안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거리낌 없이 입을 놀릴 줄이야. 그 무심함에 정신이 다 아찔해질 정도다.
“…사실은 제가 어제 염 부장님한테 마력을 받았거든요.”
“자기가? 왜? 황자님 없으면 한율 씨한테 받으면 되잖아. 자기 마력 없는 거 여기 사람들 벌써 다 알던데.”
박 차장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공 대리만 혼자 두 여자의 대화에 맞춰 눈알을 왔다 갔다 굴리는 중이었다.
식당 안에는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들이 대화를 듣든 말든 성량을 낮추지 않는 박 차장의 모습에 김유정의 눈썹이 미미하게 움찔거렸다.
“그게, 제가 좀 불편해서…….”
한 주임은 죄지은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당황한 나머지 사전에 준비했던 요새 방비책으로 이한율을 남겨 두었다는 거짓말도 못 하고 그만 사실대로 고해 버렸다.
그녀의 소극적인 태도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박 차장은 오히려 가슴을 부풀리며 목청을 높였다.
“아이고! 재인아! 얘! 내가 미쳐. 한율 씨가 남도 아니고, 연애하라는 것도 아닌데 그깟 거 좀 받는 게 불편하니?”
한 주임이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입술만 오므리자 꾸중은 더욱 거세졌다.
“많은 사람이 없는 사람 나눠 주는 게 당연한 거지, 뭐가 그렇게 불편하다고 그걸 부장님한테 부탁하고 앉았어?”
그러다 문득,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자신에게 비밀로 하려고 했다는 상황이 어이가 없었는지 박 차장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왜 나한테만 비밀인 건데? 기분이 좀 그러네?”
“차장님 말고도 대리님한테도 말 안 했는데요?”
잔뜩 감정 상한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한 주임이 아니라 김유정이었다.
김유정은 굳은 얼굴로 삐딱하게 쏘아 대고 있었다. 공 대리가 나? 난 왜? 하는 뒤로 염 부장과 한 주임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김유정을 쳐다봤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건 박 차장이었다.
지금… 김유정이 나한테 기어오른 거야? 누가 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얼굴이었다.
박 차장은 김유정이 입사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휴직을 해서, 사실상 김유정과 같이 일한 기간이 길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그저 점심 같이 먹는 부하 직원이었을 뿐이다.
맹랑한 성격인 건 대강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대든다고? 경악이 파도처럼 박 차장을 덮쳤다.
김유정은 단체로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차장님한테 얘기했으면 지금처럼 뭐라 하셨을 게 뻔하잖아요. 본인이 불편하다는데 왜 삼자가 이래라저래라해요? 솔직히 완전 X오버예요.”
“야, 김유정…….”
“네.”
이름만 겨우 부른 박 차장이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 하는 얼굴 위로 공 대리의 손이 크게 휘저어졌다.
“아, 왜들 그래요? 훠이 훠이. 싸우지 맙시다!”
“뭘 싸워요, 팩트만 말한 건데. 까놓고 말해서 차장님이 주임님한테 말하는 거, 따지고 보면 다 가스라이팅이거든요?”
김유정은 작심한 듯 박 차장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고 있었다.
한 주임은 순간 어지러워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가스라이팅이라니,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박 차장이 다소 직설적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위한 충고라고만 여겼는데, 저번 임식당 환영회서부터 느꼈던 알 수 없던 찜찜함이 남의 입으로 듣자 그 실체가 선명히 드러난 것이다.
‘……사실은 더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라.’
사무실에 있을 때도 종종 박 차장의 조언에 따라 행동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박 차장은 ‘어휴, 자긴 나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따위의 말을 늘어놓곤 했었다.
그때도 마냥 살갑고 고맙지만은 않았다. 미묘한 찜찜함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곤 했다.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았던 자신에게 늘 먼저 다가와 준 사람이었으니까.
간식도 챙겨 주고 생일에 기프티콘도 보내 주고 가끔 휴일에 쇼핑도 같이 가자 하고…….
“뭐? 가스라이팅? 가아스라이팅?”
과거를 회상하던 한 주임은 박 차장의 노기 어린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날 선 고성에 서로 눈치를 보던 사용인들이 후다닥 주방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나가자 식당 안에는 운영팀 다섯 명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아침부터 밥상머리 앞에서 뭣들 하는 거야?”
심상찮은 분위기에 잠자코 있던 염 부장마저 기어이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화살은 당연하게도 김유정에게로 향했다.
“김 사원 너,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엉?”
“부장님! 말씀은 바로 해 주십쇼. 우리 유정이도 성인인데요, 여기 애가 어딨습니까?”
공 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발하자 염 부장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야 공지욱이, 너 말 다 했냐? 이 자식이 여자에 정신이 팔려 가지고 어딜!”
의자 다리가 바닥에 거칠게 쓸리면서 염 부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박 차장도 기세등등하게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김유정, 너 가스라이팅이 뭔지나 알고 씨불이는 거야?”
“네! 차장님이 주임님한테 씨불이는 거요!”
“뭐, 뭐라고?”
곧바로 식당 안에 왁자지껄한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날 선 시선들이 무자비하게 교차하고 서로 드잡이라도 할 흉흉한 기세들로 험악한 말들이 날아다녔다.
서로를 향해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 내는 사람들은 입에 칼이라도 문 것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서 홀로 유리되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한 주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만…….”
잇새로 새어 나온 말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정처 없이 흩어져 버렸다.
한 주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들 시끄러워요!”
아마도 생전 처음으로 소리를 질러 보는 것이었다.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시장바닥과 진배없던 공간에 한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자신에게 쏠리는 이목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곱씹듯이 말했다.
“차장님이 그러셨죠, 여기 우리 말고 의지할 사람 있냐고. 그러니까 싸우지 말라고.”
“그때랑 지금이랑은 상황이….”
“제 말 아직 안 끝났어요. 끝까지 들으세요.”
박 차장은 제가 아는 한재인이 맞나 싶어 충격으로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 주임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운영팀을 한 명씩 쳐다보는 것으로 그들의 입을 전부 막아 버렸다. 정확히는 기세를 눌렀다.
“황궁에 있을 때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어요. 그때는 차장님이 옳았죠.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우리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많이 있네요? 벌써 각자 마음 맞는 사람도 찾았고요. 아, 그러면 이제 우리는 점점 더 서로가 필요 없어질 일만 남았네요.”
꼼짝없이 얼어붙어 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녀는 자못 엄중해졌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면서 각자 다른 일을 하는 우리가 언제까지 한 팀일까요? 1년 뒤 아니, 몇 달 뒤에도 우리가 ‘우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부장님은 그렇게 생각하세요?”
“어, 어? 나 말이야?”
당황한 염 부장이 버벅거리자 한 주임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다음으로 눈이 마주친 공 대리가 흠칫했다.
“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어차피 남이 될 사인데 굳이 예의를 차려서 뭐 하겠어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서로 막말도 서슴지 않는 거겠죠.”
마지막 말은 김유정을 향하고 있었다.
김유정은 정곡이 찔린 듯한 얼굴로 슬금슬금 눈을 피했다.
“여길 나가서 다른 이방인들과 같은 숙소에 머물게 되면 서로 멀어지는 건 더욱 가속화될 테고, 적응하려다 보면 처음엔 몸도 마음도 아주 바쁠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는 고향이 그리워지겠죠. 어쩌면 매일 밤.”
한 주임은 박 차장을 바라봤다.
“……부모님, 친구들, 그리고 두고 온 아이가 사무치게 그리워서 눈물로 지새우는 날이 분명히 있을 거란 말이에요.”
아이라는 말에 박 차장의 눈가가 왈칵 붉어졌다. 그 모습에 한 주임은 숨을 한번 고르고 무겁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움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의지할 곳이 필요해요. 어쩌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함께 온 동료라는 존재가 한 줌의 위로가 될지도 모르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는 그런 사람들이요.”
충분히 설득력 있는 말이라 여겼는지 운영팀은 각자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공 대리는 격하게 고갤 끄덕이며 김유정의 등을 토닥였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혼자가 아니라고 믿기 위해서요. 그런 것들이 전부 필요 없으시다면…….”
말끝을 흐리자 다시금 시선들이 모였다.
“그냥 이 자리에서 다 같이 절교해 버려요. 쓸데없이 에너지 소모하지 말고…….”
“……응?”
“…절교요?”
아. 이게 아닌가.
김유정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연달아 피식거렸다.
아무렴 어떤가. 한 주임은 무안한 것도 잊고 식전 빵을 입속에 밀어 넣었다. 싸울 시간에 한 입이라도 더 먹어야 할 정도로 그녀는 배가 고팠다.
앙금이 전부 해소되진 않았지만, 운영팀은 한 주임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얌전히 식사를 마쳤다.
누구 하나 사과를 한다든지 고운 말을 한다든지 하는 이는 없을지라도, 그들은 하나같이 상황이 더 나빠지는 걸 바라지는 않는 듯 보였다.
서로의 바닥을 드러내고 싸울 정도로 열정적이지도 않고, 이대로 틀어져서 남남처럼 멀어지고 싶지도 않은, 다분히 비겁한 어른들의 화해 방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영부영한 분위기 속에서 박 차장은 식은 우유를 조금 삼키며 한 주임을 살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 주임과는 절대로 틀어지고 싶지 않았다. 날카로운 감이 생존본능처럼 외치고 있었다.
‘둘이서만 제대로 이야기를 다시 해야겠어.’
한 주임 성격상 가스라이팅이니 뭐니, 헛소리도 귀담아들을 게 뻔했다.
남의 호의를 그따위 말로 매도하다니,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
먼저 식사를 마친 염 부장이 자리를 비우고 다음으로 공 대리와 김유정이 뒤이어 밖으로 나갔다.
식사량이 적은 한 주임이 따라 나가기 전에 박 차장은 조급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재인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다음 말을 꺼내려던 찰나, 요새 전체를 아우르는 올리판트 소리가 길고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토벌대가 벌써 돌아왔나 봐요!”
주방 안에 있던 하인들이 소리치자 입을 닦고 있던 한 주임이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나중에… 나중에요, 차장님.”
멍한 얼굴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의자 다리에 발이 걸려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런데도 아랑곳 않고 문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넋이 나가 보이기까지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