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77화 (77/155)

77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작품입니다. 저자와 발행처의 허락 없이 본 저작물로 무단전재,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 시 민사 및 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영지의 가장 바깥 구역에서 울린 신호라 토벌대가 본성까지 당도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했지만 한 주임은 이미 안뜰을 건너가고 있었다.

그가, 야닉이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고작 일주일 안 봤을 뿐인데, 수개월은 떨어져 있던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할 말도 아주 아주 많았다.

‘네가 쓰던 장신구에서 마력을 받았다고 하면 넌 어떤 얼굴을 할까. 다행이라고 웃을까, 아니면 놀라서 입을 크게 벌릴까.’

자기 없이도 생각보다 멀쩡해 보인다고 섭섭해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한 주임은 이런저런 상상으로 추운 줄도 모르고 입김을 하얗게 뿜으며 달려 나갔다. 이번에는 내성에 당도함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자 기대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편자를 박은 말발굽이 포석을 요란하게 짓쳐 대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라리 황자님이 저를 따라다니고, 제가 거부하고 있다는 소문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하얀 말이 보이자마자 루이자에게 했던 말이 스치듯 떠올랐다.

벌건 대낮에 원정을 다녀온 황자를 버선(?)발로 마중 나간다면 본인 입으로 지껄였던 소문 내기 계획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꼴이 된다.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한 주임은 왔던 길을 서둘러 돌아가다가 입술을 깨물면서 두리번거렸다. 뜀박질 속도면 금방 토벌대에 발각될 것이다.

그녀는 마침 눈에 띄는 샛길로 쏙 빠졌다. 흉벽을 감싸고 있는 덩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자세를 낮추자 제가 생각해도 감쪽같았다.

수십 마리의 군마가 다리를 구르는 진동이 발바닥으로 전달되고, 요새로 귀환한 대원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말소리가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한 주임은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동시에 제가 왔던 길에서 아크만 기사단의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 하나가 날렵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토벌대는 길 한복판에 멈춰서서 성채에서 달려 나온 기사를 맞이했다.

급하게 속도를 줄인 말들이 성난 울음소리를 내며 앞발을 치켜들자 선두에서 달리던 야닉이 훌쩍 바닥에 뛰어내렸다.

말에서 내린 기사는 투구를 벗을 틈도 없이 야닉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바투 다가가 무언가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깨어나긴 했는데, 상태가… 임철우 님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있는데도 투구 속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한 주임은 귀를 쫑긋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차라리 야닉의 모습을 한가득 시야에 담았다.

밖에서 일주일이나 지낸 사람답지 않게 멀끔하다 못해 눈부시기까지 한 남자는 바람에 흐트러진 까만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리며 보고를 받고 있었다.

대화 내용에 심각해진 얼굴이 심각하게 잘생겨 보여서, 구경하는 사람마저 따라서 심각해질 지경이었다.

길지 않은 보고가 끝나고 기사가 묵례하며 물러났다. 야닉이 브레고에게 손짓해서 무어라 명령을 내리자 이번에는 브레고가 선두에 서서 대원들을 이끌었다.

혼자 남겨진 야닉이 굳은 얼굴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가만, 이쪽이라고? 한 주임은 갈 곳 없는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굴렸다.

“다녀왔어.”

“……응.”

하여간 나무 뒤든, 덩굴 안이든 귀신같이 찾아내는 남자다.

내민 손을 홀린 듯이 스르르 잡자, 야닉이 다른 손으로 나무줄기를 이리저리 헤쳐서 그녀를 앞으로 끄집어냈다.

어깨에 붙은 마른 가지까지 털어 낸 다음에는 입으로 손가락 끝을 물어 자신의 장갑을 벗었다. 그런 다음엔 손을 뻗어 발갛게 튼 한 주임의 볼을 감쌌다.

“방에 있으면 내가 갔을 텐데. 몸은 좀 어때.”

추운 곳에 혼자 나와 있는 것이 마뜩잖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 인상부터 구기긴 싫었다.

“양승원 선생님이 봐주셨어. 문제는 없어 보인대…….”

한 주임은 따스한 온기에 기대어 커다란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차가운 장신구 따위보다 실제로 닿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만족스럽고, 더없이 행복했다.

그녀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보고 싶었어…….”

“……!”

입 밖으로 나온 마음의 소리에 반응한 금색 홍채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마력을 받아들이며 천사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하는 말이 분명했으나 내색하면 한 주임은 곧바로 떨어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는 말없이 한 주임의 얼굴을 한껏 눈에 담았다. 원정을 끝내고 돌아온 그에겐 선물처럼 호사스러운 광경이었다.

제 손바닥 안에 온전히 들어오는 말간 얼굴을 마음 같아선 온종일 지켜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지만, 일단은 몸이 온전치 않을 그녀를 데려가는 것이 먼저였다.

야닉은 겨우 인내하고는 한 주임을 헤바투스 위에 앉혔다.

이번에는 안장까지 내던지고 그도 뒤에 올라타자, 바닥에 덩그러니 나뒹구는 고급 안장을 본 한 주임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 저거를…….”

“놔두면 누가 주워 오겠지.”

가볍게 말을 자른 그가 허리를 한번 짓치는 것으로 명마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신은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지하에 좀 들렀다가 저녁에 갈 테니.”

“지하?”

한 주임은 다그닥거리는 말 위에서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앞뒤로 나란히 앉은 터라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 내심 아쉬웠다.

“저번에 하랑이 데려왔던 남자, 오늘 새벽에 정신을 차렸다는군.”

머리 위로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황실 갑옷을 입고 온몸에 기이한 문자가 그려진 빼빼 마른 남자가 자연히 떠오른다. 계속 궁금했던 것을 드디어 물을 수 있게 된 참이라 마음이 절로 들떴다.

[내용은 기밀이라서요. 나중에 황자님한테 한번 여쭤보세요.]

포라킨이 말한 대로 정말로 야닉이 말을 해 줄까? 기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단장님이 그 사람 몸에 새겨진 고대어를 해독했다고 그랬는데.”

여기까지만 말해 놓고 입을 다물었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니 말의 의도를 모를 리가 없다.

예상대로 야닉은 으음,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시간’에 관련된 내용이라 보고 받았어. 고대어는 항상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모호한 표현을 써서 후대인들이 해석하는 데 골머리를 앓거든.”

그는 포라킨과 알리온 주교가 함께 찾아와 이야기했던 것을 차근차근 되짚어 주었다.

[세월, 귀가, 원본. 이게 제가 해독한 내용이고요. 주교님께서는…….]

[시간, 돌아가다, 본래의 것. 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비슷하지만 서로 다르지요.]

야닉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물었다.

[문장화하면?]

포라킨은 어림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글이면 얼추 뜻을 유추할 수 있는데, 그 사람 몸에 있는 건 어떤 술식의 일부예요. 앞뒤를 다 잘라먹은 내용으로는 문장화할 수 없어요. 한다고 해도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올 겁니다.]

야닉의 회상을 전해 들은 한 주임이 입술을 모으고 갸우뚱했다.

“세 음절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다. 어쩐지 이방인 소환과 관련된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렇게 생각했지?”

야닉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동일한 답을 유추한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다.

동글동글한 뒤통수에 입술을 갖다 대며 말하자 한 주임이 어깨를 살짝 떨었다.

“어, 아. 단순하게 ‘원래 시간으로 돌아간다’라는 문장으로 만들면, 우리 얘기잖아. 소환된 이방인들.”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

그는 봄날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주위 공기를 덥혔다. 차가운 바람 한 점 그녀에게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안뜰로 마중을 나온 하인들에게 한 주임을 맡기고 야닉은 다시 헤바투스에 올랐다.

내심 데려가 주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그는 칼같이 돌아서서 멀어져 갔다. 아쉬워도 별수 있나, 그녀는 다시 시작될 검술 수업 준비에 몰두하기로 했다.

* * *

빠른 속도로 지하동으로 진입한 야닉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캄을 포함한 용병 몇 명과 합류했다.

“심문실에 침대를 들여놓긴 또 처음이오. 돌바닥에 눕히면 그대로 저세상 갈 상태라.”

스캄이 인사 대신 경쾌한 목소리로 전했다.

“안에 누가 있지?”

“보초병들이 그자가 깨어났다고 보고하자마자 로하겔이 먼저 들어갔고, 이제 막 포라킨 단장이랑 임 사장이 간 참이우.”

야닉은 조그맣게 임 사장? 하고 되뇌다가 말에 박차를 가했다.

지하 감옥과 연결된 통로에 말들을 묶어 놓고 아래로 길게 이어진 계단을 밟아 나가길 한참, 횃불이 기다랗게 이어진 복도 끝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순간 그를 발견한 보초병들이 절도있게 경례를 하고는 길을 터 주었다.

무쇠로 만든 철창 안에는 손발이 쇠사슬에 묶인 채 작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가 잿빛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철창 밖에서 남자를 지켜보던 일행들이 곧바로 야닉을 발견했다. 포라킨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우리 말을 이해할 수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라 했는데, 계속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임 사장님을 모셔 왔습니다.”

“아, 그랬군. 잘했어.”

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인가 싶었는지 임철우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야닉은 야인 대원 둘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고갯짓을 했다.

“들어가서 재갈을 풀어. 이상한 주문을 왼다 싶으면 헤르미네, 그대가 바로 대응하고.”

“예.”

“혹시 모르니 제가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로하겔 경이 검을 뽑아 들고 용병들 뒤에 섰다.

그들은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 침대 양쪽에 서서 건틀릿을 낀 손으로 재갈을 잡아 턱 아래로 내렸다. 둥그런 쇠공이 입에서 떨어지자 남자는 헉헉 밭은 숨을 내쉬더니 다 쉬어 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쥐어 짜냈다.

“이… 이레……. 이레.”

뜻 모를 말이 나오자 자연히 임철우에게 시선이 모였다.

“아, 물이라고 하네요.”

금방 알아들은 임철우가 조심스레 전달하자 로하겔이 보초병에게 서둘러 물을 가져오라 명했다.

머지않아 물을 가져온 병사가 야인들에게 건네고, 야인 두 명은 생선 가시처럼 비쩍 마른 남자의 몸을 일으켜 앉혔다.

손이 양쪽으로 묶인 남자는 야인들이 떠먹여 주는 물을 게걸스럽게 받아 마셨다.

제법 많은 양이었는데도 한 잔을 다 비우고도 계속해서 이레, 이레, 하는 탓에 커다란 병을 거의 다 비울 때까지 그는 연거푸 물을 들이켰다.

갈비뼈가 선명히 드러난 몸 위로 후드득 쏟아질 만큼 격정적으로 물을 마신 남자는 가래가 섞인 기침을 한참이나 하더니 겨우 목을 가다듬었다.

“미야세 홈… 임비……?”

“여기가 어디냐는데요.”

임철우가 통역한 말에 포라킨의 눈빛이 일순 오묘해졌다.

스캄이 걸걸한 목소리로 위협적인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먼저 네놈이 누구인지부터.”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