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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78화 (78/155)

78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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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우는 남자를 향해 알 수 없는 언어로 말을 걸었고,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짧게 답했다.

그는 이번에는 곧바로 통역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이어 나가며 남자와 계속해서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두 사람의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윽고 임철우가 고개를 돌리더니 알아낸 정보들을 전달했다.

“자기는 왕의 마법사랍니다. 신들의 산에서 아주 오랫동안 잡혀 있었고, 입고 있던 철 옷의 원래 주인이 자기 대신 양이 된 덕분에 양치기의 저주에서 풀려났다고 하는군요.”

스캄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다가 갑갑했는지 보초병들을 향해 성마르게 명령을 내렸다.

“당최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구만. 이봐, 가서 의자와 술 좀 가져와라.”

기나긴 대화의 시작이었다. 병사들은 감옥을 빠져나가 서둘러 탁자와 의자들을 가지고서 줄줄이 들어왔다.

포라킨은 남자가 하는 말을 가져온 양피지에 끄적이다가 어느 순간 손을 멈추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들리는 단어들을 받아 적고 있는데…. 저 남자, 왠지 고대어로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뭐? 그게 말이 돼?”

스캄이 돌연 큰 소리를 질렀다. 고대어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인가 싶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글을 해독하는 것은 가능해도 육성으로 말하는 법을 아는 이가 있을 리가 없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자라면 또 모를까.

포라킨은 심각한 얼굴로 자신이 적은 글자와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히 말했다.

“자기는 고대의 왕을 모셨던 마법사 중 한 명인데, 취발론 산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는 바람에 산 정상의 양치기를 만났다고 했어요. 저주에 걸려 지금까지 계속 양이 되어 있다가, 황실 기사가 양치기에게 말을 걸어서 자신이 대신 저주에서 풀려났다는 거잖아요. 사실이라면 말이 안 될 것도 없죠.”

“그럼 이자가 천년이 넘게 취발론에 묶여 있었다는 고대인이라는 얘긴가?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로하겔 경이 고개를 삐딱하게 치켜세우며 반문하자 포라킨은 어깨를 으쓱했다.

“양치기와 한마디라도 섞으면 그가 모는 양이 된다는 건 지금은 널리 알려진 설화죠.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전설이 사실로 입증되는 역사적인 순간일 겁니다.”

“황실 기사라고 그 이야기를 몰랐을 리 없을 텐데, 왜 양치기에게 말을 걸었지?”

로하겔의 물음은 임철우에게 향해 있었고 임철우는 고스란히 남자에게 통역했다.

남자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답변했다.

“철 옷을 입은 남자는 두 명이었고, 그들은 매우 지쳐 보였다. 아마도 산에서 몇 날 며칠을 헤맨 거겠지. 나는 그들에게 저쪽 길로 내려가라고 열심히 소리쳤지만 내 목소리는 그저 양의 울음소리로만 나올 뿐이었다. 양치기는 두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속삭였다. 나는 다른 양들과 함께 말을 섞지 말고 도망치라고 외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 끔찍하고도 소름 돋는 광경을 떠올리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두 명은 몸싸움을 시작했고 한 명이 칼을 뽑았다. 칼에 겨눠진 남자는 울면서 양치기에게 길을 물었다. 양치기는 손가락으로 출구를 가리켰다. 그리고 말을 건 사람이 모래알처럼 사라지더니 바닥에 텅 빈 갑주만 남았다. 말을 건 남자는 우리와 같은 양이 되었고, 영겁의 시간 동안 나와 함께 있던 오래된 양이 먼저 사람으로 변했다. 머릿수를 대신할 자가 생기니 처음 저주에 걸렸던 이가 풀려나게 된 것이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풀려난 거지?”

야닉의 물음에 남자가 고통스러운 얼굴을 했다.

“동료를 사지로 몰고 간 남자는 양치기가 알려 준 길을 따라 걸으면서 크게 웃었다. 양치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양치기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조심히 가라고 하니, 남자는 그만 신이 나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양치기와 단 한마디라도 나누면 그의 저주에 걸리게 된다. 결국, 그도 갑주만 남기고 사라졌고… 내가 사람으로 돌아왔다.”

임철우는 말을 전하면서 감정이 올라온 듯 깊은숨을 내뱉었다. 한동안 남자를 둘러싼 주위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먼저 풀려난 사람은 어디에 있나?”

적막을 깬 로하겔의 지적에 남자는 폐부 한가득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다가 힘겹게 입술을 들썩였다.

“양이었을 때 들었던 말로는 그자는 나보다도 훨씬 더 이전에 저주에 걸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나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나도 한동안은 머릿속이 아득해서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양으로 사는 동안 자신을 잊지 않으려 매일같이 되뇐 덕분인지 어느 정도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기억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중요하고 단편적인 것들만 생각이 난다. 내 기억은 조각조각 나 있다.”

색소가 옅은 회색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억지로 기억을 더듬어 나가던 그는 이내 지친 얼굴로 머리를 짚었다. 두통이 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가늠도 할 수 없는 진짜 사람들 앞에서 그는 조금이라도 버티기 위해 이를 사리물었다.

“…갑옷을 입혀 주고 업고서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그는 결국 죽었다. 나는 그의 지친 영혼을 위로했다. 무한한 시간을 지나 드디어 영면에 든 친우를 땅에 묻어 주었다. 다음에는 나도 따라 죽으려 했다. 그런데 목을 매는 순간 누군가가 달려와 날 밀쳤다. 그렇게 우리는 뒤엉켜서 숲을 굴렀다.”

“……그게 하랑이었군.”

야닉의 말에 스캄이 이마를 탁, 쳤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리고 눈을 뜨니 지금인 것이다.”

* * *

“그래서, 다음은?”

한 주임의 방으로 늦은 저녁을 들인 야닉은 그녀와 마주 앉아 낮에 있었던 일을 전했다. 한 주임은 눈을 빛내며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 귀환하다 실종된 기사 두 명의 말로를 들었으니 유품을 회수해서 유족들에게 전달해야지. 그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갑옷도 금방 찾을 수 있을 테고.”

“……그래야겠지.”

야닉은 닭고기를 한 점 크게 잘라 한 주임의 접시 위로 올리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직 첫날이기도 하고 그자가 너무 지친 탓에 다른 걸 물을 수가 없었어. 나오는 길에 양 선생에게 호위를 붙여 보낸 참이야. 아직 캐낼 것이 많으니 목숨은 붙여 놔야겠지.”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거야?”

걱정스러운 물음에 야닉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먼저 깨어난 사람이 죽었다고 했으니 잘은 몰라도 그자 역시 심각한 상태일 거야. 주교님이 밤낮으로 회복마법을 걸지 않았다면 영영 깨어나지 못했을 거고.”

한 주임이 심각한 얼굴로 포크를 우물거리자 야닉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자가 정말로 고대인이라면 반드시 살려내야 해. 헤르미네는 일찌감치 흥분해서 얼굴까지 벌게졌더군. 고대 마법을 알아낼 기회라면서.”

고대 마법사라면 분명히 이방인 소환에 관련된 것도 알 수 있을 법이었다. 이를테면 오웬 황정에서는 알아내지 못한 ‘집으로 돌아가는 법’이라든지…….

결국 테이블 위에 포크를 내려놓자 야닉이 고개를 기울여 한 주임을 살폈다.

“나 기다린다고 저녁도 늦었는데, 좀 더 먹지.”

“더 먹으면 체할 것 같아. 많이 먹었어.”

체할 것 같다는 이야기에 차마 더 먹으라 권유할 순 없어서 야닉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체된 분위기를 환기하려 그가 화제를 돌렸다.

“원정에서 돌아오면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브레고가 잘 전달했어?”

“아, 응. 들었어.”

엉겁결에 따라 일어나 대답하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대에게 보여 줄 것이 있어.”

그렇게 말하는 야닉의 눈은 어느 때보다 진중함이 묻어났다. 담담한 얼굴과는 달리 맞잡은 손에서 얄팍한 떨림마저 느껴졌다.

덩달아 긴장이 된 한 주임은 그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문을 나섰다. 방에서 나온 두 사람이 향한 곳은 3층이었다.

아크만에 온 첫날, 루이자가 출입을 엄금했던 바로 그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절로 주춤거렸다. 단체생활의 규칙에 익숙한 그녀로선 자연스러운 거부반응이었다.

“괜찮아. 보여 줄 게 3층에 있거든.”

주인이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한 주임은 큰일이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호흡을 가다듬고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저녁때가 이미 훌쩍 지난 밤인지라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은 없었다. 조용한 복도를 걷는 두 사람의 발소리 말고는 적막에 가까웠다.

한 주임은 처음 와 보는 본성의 3층 전경에 넋을 잃고 두리번거렸고, 야닉은 그것을 보여 주었을 때 한 주임이 보일 반응을 예상할 수 없어서 몸을 긴장시켰다.

두 사람 모두 각자 다른 이유로 집중이 흐려져 있을 때라 2층에서부터 그들을 뒤쫓아 온 박 차장의 존재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박 차장은 신발까지 벗고 맨발로 숨죽여 뒤를 밟고 있던 참이었다.

오전에 식당에서 어정쩡한 상태로 대화를 끝낸 터라 박 차장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 주임과는 확실히 앙금을 풀 작정이었다.

정확히는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 처지지만, 그녀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황자는 한 주임에게 제법 진심인 듯하고, 기사단, 용병, 성의 관리자들 너나 할 거 없이 요새의 모든 사람이 한 주임에게 호의적이다.

본래 그녀와 가장 친한 사람도 저인데, 요즘 들어 한 주임은 포라킨 단장과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제법 죽도 잘 맞아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잖은가. 그 한재인이 동성 친구라니.

게다가 이한율마저도 일편단심 한 주임뿐이라 이대로 사이가 틀어지면 손해는 백 퍼센트 자신의 몫이 될 게 분명했다.

‘재인이는 똑 부러지다가도 맹한 데가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이 옆에 있지 않으면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니까.’

박 차장은 스스로 타당한 생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느지막이 찾아가서 밤새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그 순진한 아이는 다시 예전처럼 순한 양으로 돌아오겠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 한 주임이 황자와 함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놀라서 화병 뒤에 몸을 숨기는 것은 맹세코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싶어서 다시 돌아가려던 찰나, 황자가 3층에 보여 줄 것이 있다는 말이 얼핏 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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