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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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납치를 당한 처지인데 마땅히 피해보상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의문은 빠르게 강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차피 돌아갈 거 빈손인 것보다는 뭐라도 챙겨 가는 것이 좋겠지.
박 차장의 눈앞에 어린 아들의 성장 과정이 빠르게 스쳤다.
영어 유치원, 사립 초등학교, 특목고에 외국 대학까지 보내려면 남편 벌이로는 빠듯한데…….
‘하도 많아서 몇 개 정도는 티도 안 날 텐데, 뭐.’
그녀는 이제 보석들을 가방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턴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쓸어 담다가 이번에는 바닥에 널브러진 금화들을 주워 담았다.
막판엔 구석에 세워져 있던 커다란 은촛대까지 끙끙대면서 집어 들었다가 그제야 이성이 돌아와 다시 내려놓았다.
어느새 가득 차서 울퉁불퉁해진 가방을 보다가 부피가 큰 것들은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보니 제가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박 차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는 묵직한 가방을 들쳐 메고 방으로 돌아갔다.
담당 하녀에게 앞으로 옷장은 건드리지 말라 엄포를 놓아야겠다고 생각한 뒤 잠자리에 누워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듣기론 보석은 히스토리가 있어야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는다던데…….’
현대의 세공 방식이 아닌 것들이니 어떻게 살을 붙여서 경매에 내놓을까 따위의 고민으로 눈이 말똥말똥했다.
한참을 현금화할 생각만 하다가 문득 귀환석이 떠올라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다시 가방을 꺼냈다.
귀환석은 금은보화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미쳤지, 이걸 깜빡하고 있었다니!
박 차장은 두리번거리다가 옷장에 걸린 제 핸드백 안, 속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고 지퍼를 닫았다.
* * *
요새 안은 며칠간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한 주임은 여전히 아침 산책로에서 만나는 로기아 후작에게 인사를 건넸고 오전에는 사원에서 글공부를, 오후에는 블라산코에게 검술 수업을 받았다.
눈보라가 일기 직전이라 외국 상인들도 전부 자국으로 돌아가고, 근방 토벌까지 마친 지금이 일 년 중에 가장 한가한 시기라고 미엘라가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었는지 이전처럼 야닉이 늦은 시간까지 정무를 보는 일은 드물어졌다.
야닉과 한 주임은 요즘 매일같이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어쩐지 드넓은 식당 안에는 두 사람만 있는 듯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 다른 사람들은 서로 눈만 굴리며 밥 먹는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그는 귀환석을 보여 준 날 이후로(원래도 그런 편이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거나, 종종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는 짓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때마다 한 주임은 펄쩍 뛰면서 귀까지 벌게져서 도망치기 일쑤였고 포라킨은 오만상을 쓰며 대놓고 혀를 찼다.
“저 정도면 거의 치한 수준 아닙니까?”
“아슬아슬한 단계긴 하죠.”
하랑이 맞장구를 치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막 식사를 마친 루이자가 두 사람이 빠져나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한 주임님 연기력이 제법 훌륭하군요. 우리끼리만 있는 자리에서도 저렇게 질색팔색을…….”
리넨으로 입을 닦으며 말하는 루이자의 얼굴에는 한 치의 농담도 섞여 있지 않았다.
포라킨은 ‘연기가 아니라 원래 저러신 분’이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어쨌든 황자님이 여성에게 들이대는 장면은 신선하긴 하네요. 매번 반대 상황만 봤었잖아요.”
“제 말이요! 세레나 공주님한테도 엄청 사무적이셨다면서요.”
하랑이 심상히 꺼낸 말에 루이자가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황자님께서는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셨어요. 그건 누가 뭐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명예롭지 못한 짓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앗! 부정한 건 아니고요. 저도 안하무인 공주님 이야기는 질리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세레나의 실종 이후에 요새에 입성한 하랑은 사용인들의 경험담만 들은 것이 전부였다. 무안해진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자 포라킨이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한 번 툭 걷어찼다.
세레나의 횡포에 어찌 보면 가장 많이 시달린 사람이 집사장인 루이자였기에 그녀 앞에서 세레나를 두둔하는 언사는 절대 금물이었다.
“그나저나 봄이 오려면 적어도 두세 달은 더 있어야 하는데, 황자님이 얌전히 기다릴 수 있을지가 제일 걱정이네요.”
포라킨이 얼른 화제를 바꿔 아무 말이나 뱉은 말에 루이자는 제법 진지하게 반응했다.
“눈이 녹아야 전령들이 통행할 수 있으니 기다려야죠. 설마 직접 간다고까지 하시겠어요.”
이번에는 하랑이 속으로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데….’ 하고 꿍얼거렸다.
루이자는 허리에 손을 짚고 날카로운 눈으로 상황을 직시했다.
“황실에 재취 허가를 구하고 델피온에는 마지막 배상금을 전달할 일만 남았군요. 둘 다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겁니다.”
“황제 폐하 성정에 곧바로 다른 혼처를 들이밀 게 뻔하고, 델피온은 마지막으로 크게 한탕 뜯어내려 발악을 하겠네요.”
포라킨은 제 고향 험담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조국을 떠나 살아온 그녀에게 델피온은 그저 태어난 곳 외엔 별 의미가 없는 듯한 발언이었다.
루이자는 복잡한 심경으로 집무실로 향했다.
앞으로가 더 첩첩산중인데 입이 귀에 걸려서 돌아다니는 황자를 보고 있자면 가끔은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제 친동생이었으면 벌써 열댓 번은 등짝을 후려쳤을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야닉의 손에는 상인 조합 목록 중 보석상만 추려 놓은 리스트가 들려 있었다.
“아. 루이자, 이리 좀 와 봐. 반지를 만들려는데, 이쪽 분야는 그대의 안목이 낫겠지.”
안 물어봐도 뻔한 반지의 용도에 루이자가 달갑지 않은 걸음으로 다가갔다. 야닉은 양피지를 넘겨 반지 종류가 잔뜩 그려진 페이지를 들이밀었다.
“세레나 때는 대충 구색만 맞췄는데 이번에는 그럴 순 없고…. 종류는 뭐가 좋을까. 그녀는 붉은색이 잘 어울리는데, 역시 루비가 좋겠지? 세공은 다위에게 맡기면 되니까 모양새 좀 봐 줘.”
“결혼반지는 한 주임님과 상의해서 결정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심드렁하게 답변하자 야닉이 양피지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여상히 대꾸했다.
“그건 그렇게 할 거야. 이건 프러포즈용 반지라서.”
“프러포즈… 용이요?”
난생처음 들어 보는 용도라 루이자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야닉이 가볍게 웃으며 문 너머로 잠시 시선을 옮겼다.
“김유정이 조언을 해 주더군. 그들 세계에서는 프러포즈는 무척이나 중요한 과정이니 절대로 맨입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고. 프러포즈에 돈을 쏟아붓는 게 애정의 척도라 그랬어.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가장 성대한 걸 준비해야지.”
그러다가 퍼뜩 떠오른 듯 얼른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공개 장소에서는 절대 금물. 단둘이 있을 때 가장 화려하게. 그게 포인트라고도 했지.”
“모범 학생이시네요.”
“내가 좀 그런 편이지.”
비꼬는 말에도 능청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리던 야닉은 팔짱까지 끼고 깊은 고심에 빠졌다.
루이자는 저 빤질한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꾹꾹 억눌렀다.
“폐하가 결혼을 허락하실까요? 뤼시크 가문을 견제하려고 다른 부호의 딸을 들이밀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건 문제없어. 내가 직접 궁에 다녀올 계획이거든. 시즈와 이야기도 좀 해야 하고. 그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느새 차분한 어조로 말하는 주군의 모습이 순간 낯설어서 루이자는 몸을 굳혔다. 이따금 보이는 상냥함 뒤에 숨겨진 위압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절대로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우두머리 특유의 카리스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길 없는 황금색 눈동자.
생경한 경외와 호기심이 동시에 든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음 질문을 이었다.
“델피온에서 마지막 배상금을 과하게 요구한다거나 황자님의 재취에 트집을 잡는다면요?”
야닉은 픽 웃으며 가죽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얌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줘야지.”
* * *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자로. 자로 할슈타드.”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나이는요?”
“서른다섯이 되던 날 어머니께서 빵과 가룸을 만들어 주셨다.”
“가룸이요?”
“가룸…. 그래, 굴로 만든 젓갈인데… 고급 음식이라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양승원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양피지 위로 바쁘게 손을 놀렸다.
진료를 마치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포라킨에게 그가 미소를 담뿍 머금었다.
“인지는 많이 돌아온 것 같고… 이 정도 회복 속도면 조만간 일상생활도 가능할 것 같네요.”
환자나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듯한 습관적인 어투였다.
“딱히 불안증세도 안 보이고 호흡, 맥박 전부 정상이에요. 음, 빈혈기가 좀 있는데 아마 영양실조가 원인일 거고요. 잘 먹고 잘 쉬면 차차 나아질 겁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건 문제 없습니까?”
포라킨이 묻자 양승원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말을 많이 걸면 정서적으로 안정감도 들고 기억이 돌아오는 데도 도움이 될 거예요. 다른 이방인들과도 대화 좀 시켜 보세요.”
다른 이방인이라…. 포라킨은 곧바로 한 주임을 떠올렸다.
자칭 고대인이 어느 정도 기억을 찾았으니 슬슬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참이었는데, 그중에는 이방인들의 귀환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민한 주제인지라 어떤 내용에도 동요하지 않을 이방인이 필요했다. 통역이 필요하니 안 부를 수도 없는 일이고, 현시점에서 포라킨이 믿을 수 있는 이방인은 임철우와 한 주임 두 사람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호위 기사들과 함께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곧장 본성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레이트 홀을 지나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한 주임의 방문에 노크하려는 순간, 등 뒤로 목소리 하나가 불쑥 날아들었다.
“어라, 단장님 아직 모르셨구나! 주임님 다시 검술 수업 시작하셨어요. 연회장으로 가 보셔요.”
빨랫감을 한 아름 들고 지나가던 미엘라가 포라킨을 발견하고 건넨 말에 그녀는 제 귀를 의심했다.
몸이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수업을 재개한단 말인가, 혀를 내두르며 발길을 돌리다가 불현듯 우뚝 멈춰 섰다.
“……연회장? 연무장이 아니라 아래층에 있는 연회장이요?”
“네! 야닉 님이 밖은 너무 춥다고 실내에서 수업을 받으라 하셨거든요. 성에서 가장 넓은 곳이 연회장이니. 그곳이 이제 연무장이 된 셈이죠?”
미엘라는 해맑게 웃으면서 총총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