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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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자로는 고개를 돌려 한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기아스께서는 머지않은 날 하늘이 먼지로 뒤덮이고 땅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면 세상에 삿된 존재들이 나타난다고 예언했다.”
포라킨은 그것이 마물을 의미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뻑뻑한 두 눈을 벅벅 문질렀다.
“대 마물 전쟁을 말하는 거로군요…….”
“역시 벌어진 일이었나 보군. 예언대로라면 요정들과 인간들이 멸망할 정도로 큰 전쟁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사는 인간들의 지혜와 힘을 빌려야 했다. 그것이 바로 신의 사자. 너희 말로는 이방인들이다.”
포라킨 못지않게 긴장한 한 주임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자로의 다음 말을 전하기 전 그녀는 물 한잔을 급하게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지?”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는데, 돌연 자로가 한 주임을 향해 물었다.
“……저요?”
“나와 말이 통하는 것을 보니 이방인이잖은가. 처음 통역을 했던 남자도, 이곳의 의원도, 그리고 당신까지. 아직 소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야.”
“아, 네. 4년에 한 번씩 계속 소환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최근에 왔고…….”
자로의 눈에 번쩍 빛이 돌았다.
갑자기 생기 넘치는 얼굴을 한 그가 성급하게 다가오자 지척에 있던 병사의 창끝이 자로의 목에 곧장 겨눠졌다.
“물러서라!”
“자, 자로 님, 조금만 뒤로 가 주세요.”
당황한 한 주임이 손을 뻗어 만류하자 자로는 반걸음 물러나면서도 한껏 들뜬 얼굴을 했다.
“소환진을 손본 것인가? 우리 때는 5년에 한 번씩 소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게다가 제대로 돌려보내는 법도 불완전해서 이렇게, 이렇게 나처럼 술사의 몸에 식을 새기는 것으로 보강했다.”
자로는 블리오를 머리 위로 벗어던지고 제 몸에 그려진 고어를 손으로 가리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포라킨이 벌떡 일어나 자로와 한 주임을 번갈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자가 지금 문신에 대해서 말하는 거죠? 빨리 물어봐 주세요! 그게 무슨 뜻이고 어디에 쓰는 건지, 또….”
“이 시대의 소환 방법에 대해 알고 싶다. 나 때는 기본적으로 소환술사 한 명과 보조술사 세 명이서….”
“잠깐, 잠깐만요!”
서로 떠들어 대는 탓에 혼돈에 빠진 한 주임이 다급히 소리쳤다.
자로도 마법사라고 하더니, 전공 분야가 나오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포라킨과 똑 닮아 있었다.
마법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이런 건가, 한 주임은 아연실색해서 자로와 포라킨을 동시에 쳐다봤다.
일단은 대화 순서를 정해야 했다. 한 주임은 최대한 대화가 오가는 횟수를 줄일 방법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자로 님은 지금 시대의 소환 방법을 궁금해하세요. 단장님이 먼저 알려 주시면 자로 님 시대의 방법을 물어볼게요.”
“문제없습니다. 바로 그려서 보여 드릴게요.”
포라킨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병사에게 양피지와 깃펜을 부탁했다.
아래층으로 뛰어간 병사가 금방 가지고 올라오자 포라킨은 둘둘 말린 커다란 양피지를 바닥 위에 펼치고 주저앉아 커다랗게 원을 그렸다.
“갈록 님이 기간을 단축할 방법을 찾아내라고 하도 닦달을 해서 소환진 연구에만 한참을 매달렸습니다. 이제 소환진은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예요.”
원 안으로 고대어를 적어 내려가는 손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한 주임이 사용했던 물컵까지 바닥에 대고 원을 그려 가며 포라킨은 한참을 집중했고, 자로는 그것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10분 정도가 지나고 원 안이 빼곡히 채워졌다.
이 복잡한 걸 다 외웠다고? 온갖 기호들과 뜻 모를 글자로 가득한 양피지를 한 주임은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포라킨이 다 되었다는 듯 펜을 내려놓자 자로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유심히 살핀다. 포라킨은 날카롭게 자로의 표정을 주시했다.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린다든가 코앞까지 얼굴을 가져다 대고 들여다본다든가, 제법 오랜 시간을 살피던 그가 병사의 부축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다른 세계의 사람을 이쪽으로 불러들이는 데는 무척이나 큰 힘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자연으로부터 얻었고, 그 힘이 다시 축적되기까지 다섯 해의 기다림이 필요했지.”
자로는 원 안에서 특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런데 여기엔 ‘자연’이 아니라… ‘인간’으로 적혀 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왠지 모르게 딱딱한 말투에 눈치를 보며 통역하자 포라킨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
포라킨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금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자연의 힘이 약해진 탓에 아무리 기다려도 이방인을 소환할 만큼 축적이 되지 않았고, 오웬 1세는 그 방법을 사람에게서 얻는 것으로 찾아냈다고 배웠습니다.”
“사람? 어떻게 말이지?”
“사형수들을… 제물로 썼습니다.”
날벼락 같은 이야기에 말을 전하던 한 주임이 놀란 얼굴로 포라킨을 보다가 떠듬떠듬 간신히 통역했다.
아무리 사형수라고는 하나, 제가 이곳에 올 때 누군가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충격일 수밖에 없다.
“그렇군……. 그래서 기간을 단축할 수 있던 거였어. 그런 방법도 있었다니, 놀랍다.”
자로는 턱을 매만지며 예상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옛날에는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좀 더 강했기 때문에, 이자에게는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 겁니다.”
포라킨이 멋쩍은 얼굴로 한 주임에게 자로의 태도를 설명하자 그녀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다. 일반적인 상식이란 내 기준일 뿐이야.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려 부단히 곱씹었다. 그런 한 주임의 반응을 의식한 듯 포라킨은 슬쩍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의식이 시작되면 사형수들은 소환진에 서서히 생명력을 빼앗겨서 잠들듯이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산채로 목이 잘려 나가는 극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관대한 처사예요.”
“…저는 괜찮아요. 말해 줘서 고마워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억지로 입매를 끌어올려 대꾸하자 그제야 포라킨이 고개를 돌렸다.
실험에 필요한 머릿수가 부족했을 때는 사형수가 아닌 중범죄자, 간혹 아무런 연고가 없는 잡범 부랑자까지 목숨을 잃어야 했다는 사실까진 아무래도 말할 수 없었다.
갈록이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시한 일을 마탑 소속인 포라킨으로선 따르는 수밖에 없었으나, 양심이 떳떳지 못한 일임은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 따위는 일절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소환진을 흥미롭게 훑어 나가던 자로가 질문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방법도 발전한 건가. 그렇다면 이방인을 돌려보내는 방법도 바뀌었나? 귀환석이 너무 작아서 부족한 술식은 나처럼 술자의 몸에 새기는 것으로 보강했는데.”
“자로 님의 몸에 새겨진 건 어떤 술식인가요?”
한 주임은 야닉이 보여 주었던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크기의 작은 돌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물었다.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소환을 할 때는 소환술사와 세 명의 보조술사가 필요하다. 보조술사는 각각 시간, 공간, 기억을 관장한다. 그중 내가 맡은 것은 ‘시간’이었다. 이방인들이 소환된 시점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것.”
“…….”
한 주임은 기억을 더듬어 소환되었을 당시 주변 상황을 반추했다.
바닥에 크게 그려진 포라킨이 그린 것과 같은 모양의 소환진, 사무실 사람들을 둘러싼 근위병들, 그리고 소환술사 갈록.
‘보조술사 세 명은… 없었는데.’
자로는 멍하니 있는 한 주임은 상관없이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소환되었던 장소 그대로 되돌리는 ‘공간’, 이곳에서 경험한 것들을 모두 잊게 해 주는 ‘기억’. 이 세 가지는 기아스께서 손수 이방인들을 위해 추가한 것들이다. 귀환석을 만든 페어리들은 그런 것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거든.”
“저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 주임이 끼어들었다.
“소환될 때 보조술사 세 명이 없으면 어떻게….”
“모든 기억을 가지고, 여기에서 지낸 기간만큼 시간이 흐른 상태로 돌아가겠지. 어디로 가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당연한 것을 물어본다는 듯 답하는 자로의 얼굴에 물음표가 드리워졌다. 왜 그런 것을 물어보지? 자로의 눈에 이방인은 거의 넋이 나간 듯 보였다.
대화에서 홀로 유리된 포라킨만 답답해 죽을 맛이었다.
“뭡니까? 저한테도 말씀 좀 해 주세요.”
“아…….”
한 주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내용을 읊었다.
자신이야 돌아갈 일이 없으니 이토록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건가 싶어서 말을 하면서도 속이 불편했다.
생선 가시를 삼킨 듯 껄끄러운 것은, 어쩌면 돌아갈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전할 것인지 말지에 대한 갈등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돌아가면 다시 안 볼 사이인데, 그냥 아무 말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다가도 금방 그건 비겁한 생각이라고 질타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포라킨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먼저 돌아가는 방법부터 물어보죠. 돌아갈 방법이 없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포라킨의 말이 맞았다. 한 주임은 걱정은 잠시 접어 두고 다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이어지는 질의에 아득한 기억을 계속해서 끄집어내는 것이 슬슬 무리가 왔는지, 자로는 급격하게 피곤해하기 시작했다.
그가 침대로 가서 털썩 주저앉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귀환석… 술식 부분에 피를 바르면 활성화되고… 그런 다음에 시동어를 말하면, 그것을 지닌 자는 피의 주인이 태어난 세계로 이동한다.”
“혼자만요?”
“돌 하나에 사람 하나다. 여럿은 불가능해…. 이제 잠이 온다. 그만 쉬고 싶어.”
“시동, 시동어는요?”
천천히 누운 자로는 대답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수마에 빠져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활기찼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급격히 수척해진 모습에 포라킨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도 그만 가죠.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가리킨 창문 밖으로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한 주임은 조금 전부터 바깥이 소란스러운 걸 깨달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