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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84화 (84/155)

84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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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벌써 며칠째 그칠 줄을 모르고 밤낮으로 휘몰아쳤다.

내린다기보다는 거대한 눈 폭풍 속에 요새가 통째로 휩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성이나 건물 안에 고립되어 긴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매년 겪는 눈 난리가 익숙한지 각자의 공간에서 옷을 뜨거나, 공예품을 만들거나 여러 가지 소일거리를 하며 지겨운 폭설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이방인들만 신나서 잔뜩 껴입고 밖으로 나돌아다니기 일쑤였다.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운 눈보라를 헤치고 그들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한 이동줄을 붙잡고 돌아다니면서 공터에 사람 키만 한 눈사람 여러 개를 만들어 냈다(한 시간이면 눈사람은 그저 눈 덮인 산이 되어 버렸지만).

이방인들이 마법으로 눈을 녹여 길을 내어 놓으면 몇몇 사용인들은 그 길을 따라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트라야누스 용병들이 머무는 숙소에서도 눈보라를 뚫고 험난한 길을 나선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이한율과 블라산코 두 사람이었다.

단단히 껴입은 두 사람이 본성으로 가는 길은 이한율이 앞장서서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쌓인 눈을 헤치면 블라산코가 바짝 뒤를 따르는 식이었다.

“매번 당신 덕분에 편하게 가네.”

“저도 단장님한테 수업받으러 가는 길이라서요.”

사람 좋게 웃으며 큰 걸음으로 걷는 이한율의 등을 블라산코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현자님은 제인도 없는데 용병단에는 왜 붙어 있어? 그냥 다른 이방인들처럼 본성에 계속 있지?”

슬쩍 꺼내 본 말인데, 이한율은 잠깐 멈칫하는 듯하다가 재차 발을 놀렸다.

“…처음에는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요, 마법 말고도 검술이나 체술을 배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흐응. 현자님이 욕심도 많으시네. 그래서 마법은 많이 배웠고?”

“단장님이 가져다주신 책도 다 읽고 틈나는 대로 연습했어요. 실드는 이제 할 줄 알고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가 바람에서 열기를 거두고 실드를 전개했다.

바람을 압축하고 또 압축해서 실드를 구성하는 원리야 금방 깨우쳤다. 집중력이 부족하거나 마력이 적으면 견고한 실드를 만들 수 없다.

이한율은 높은 마력과 고도의 집중력을 가진 이방인이었고, 그가 만든 실드는 쌓인 눈을 거침없이 양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블라산코가 휘둥그레한 눈으로 믿기 어려운 것을 보는 사람처럼 수선을 떨었다.

“이건 그물이 아니라 거의 방패 수준이잖아!”

눈도 모자라 꽝꽝 언 흙바닥까지 함께 실드에 긁혀 나가는 것을 본 블라산코가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이한율은 불도저로 밀고 나가듯 거침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한 주임과 함께 원정을 나갔다가 돌아온 다음부터 혼자 숙소에 틀어박혀서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했더니, 이를 갈고 마법에 열중했던 모양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는 모두가 휴식을 취하는 계절에도 매일같이 본성을 드나들며 포라킨을 귀찮게 굴었다.

‘왜들 저리 필사적이지? 이방인 특성인가…?’

한 주임을 가르치는 그로선 당연하게 든 생각이었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진 공터에서 이방인들이 폭설 속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싸움을 하고 노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겨울 해는 짧았고, 시간은 그만큼 빠르게 흘렀다.

한 주임은 뽀얗게 서리가 낀 유리창을 소매로 문질러 선명해진 바깥을 확인했다.

장장 한 달간의 눈보라가 휩쓸고 간 요새는 사방천지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새하얀 세상뿐이었다.

그녀는 창문을 조금 열고 코끝까지 시린 찬바람을 느끼며 허리에 파우치 벨트를 둘러맸다. 동시에 머나먼 성공에서 괴조가 포효하는 소리가 길게 메아리쳤다.

마침내 굶주린 짐승들이 몰려오는 시기가 온 것이다.

“주임님! 방에 계시라니까요!”

따끈하게 데운 포도주를 들고 온 미엘라가 무장 중인 한 주임을 보고 식겁해서 소리쳤다.

“조금 있으면 마물들이 사방에서 들이닥칠 거예요. 작년에 오신 사자님들은 각자 방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들으셨잖아요!”

“알아요. 안 나가요. 그냥 준비만 하는 거예요. 혹시 모르니까….”

미적지근한 변명에 미엘라가 못 미더운 얼굴로 술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꼼꼼하게 쳤다. 그러자 촛대와 벽난로 불빛만 남은 방 안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와이번은 머리가 나빠서 괜찮다지만, 운 나쁘게 그리핀이라도 날아오면… 그놈들은 똑똑해서 창문부터 뚫고 들어온다고요.”

이번에는 눈보라가 좀 이르다 싶더니, 눈이 그친 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적의 침공을 알리는 올리판트 소리가 영지에 크게 울려 퍼졌다.

최전선 망루에서 날아온 전서구 다리에서 양피지 조각을 빼낸 로하겔 경이 재빨리 내용을 확인했다.

“올해는 수가 좀 많군. 트롤이 열다섯 구에 아이스 웜까지….”

“아이스 웜도 있다고? 이거 귀찮게 됐구만. 다른 놈들이야 위에서 찍어 내리면 그만인데, 아이스 웜은 땅을 파고 안으로 들어올 텐데.”

로하겔에게서 쪽지를 빼앗듯이 가져간 스캄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꿍얼거렸다.

성벽 위에서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던 야닉이 굳은 얼굴로 걸어와 명령을 내렸다.

“열다섯이 아니라 열여섯이다. 스캄, 용병들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오는 벌레들을 맡아. 시가지로 한 마리라도 파고드는 놈이 있으면 각오하고.”

“나 참, 곡괭이를 들고 나가야 할 판이잖아. 알겠수다!”

스캄이 곧장 군마에 올라타서 성벽을 달려 나가고 로하겔 경은 비장하게 검을 빼 들었다.

“기사단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맡겠습니다. 헥토르, 발리스타 준비는 끝났나?”

“넵, 단장님! 다리마다 배치 완료했고 고위기사들과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는 사자님들이 대기 중입니다.”

로하겔의 고갯짓에 종기사 헥토르가 제 위치로 달려 나갔다.

야닉이 이번에는 다위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소 뿔이 박힌 강철 투구를 쓰고 양손에 브로드 엑스를 든 다위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늠름한 자태로 코웃음을 쳤다.

“땅은 이 다위에게 맡겨라. 아무리 괴물 같은 네놈이라도 몇 마리 정도는 놓치는 게 있겠지.”

“한… 천 마리쯤 날아오면?”

한껏 거만한 언사에 다위가 한껏 인상을 쓰고는 혀를 찼다.

“슬레이어 앞에서 잘난체하기는! 네놈이 슬레이어가 뭔지는 아냐?”

“전장에서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한 자들의 명예로운 칭호지. 안타깝게도 나는 따뜻한 침대 위에서 죽었으면 해서 말이야.”

지지 않고 내려다보며 이죽거리는 야닉에게 다위는 바닥에 침을 뱉는 것으로 응수했다.

야닉은 피식 웃다가 몸을 돌려세웠다.

방벽 다리를 따라 다섯 구역으로 요새를 나누어 기사와 용병을 배치하고, 가장 외곽에는 브레고와 포라킨, 그리고 이한율을 보냈다.

본성이 있는 중앙에는 이방인들을 집중시켰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활이나 마법 완드를 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이방인들이 줄지어 통로 위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님!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잡을 것도 좀 남겨 주시고요?”

사람들은 겨우내 중단된 훈련으로 찌뿌둥해진 몸을 이리저리 풀면서 밝은 얼굴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는 루의 모습도 보였다.

야닉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눈을 마주치자 루는 괜히 혼자 찔려서 손에 든 활을 치켜들었다.

“용병 아니고 의병! 의병으로 우리 아버지랑 같이 온 거야! 아버지는 아래에 계셔, 진짜야.”

근신 처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섰다고 혼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라니.

평소 같으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갔을 텐데, 일순 껄끄러운 심사가 비집고 들었다.

‘…제인은 갈비뼈가 부러져서 죽다 살아났는데 말이지.’

그는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일그러뜨렸다.

루가 이 정도로 막무가내였나?

“야닉도 알다시피 내가 검만큼 활도 잘 다루잖아? 그러니까 야닉이랑 같이 여기 있으면 도움이 될 거야.”

늘 자신만만한 태도 역시 좀 기고만장해 보이고.

평소와는 다른 묘한 반응을 살피려는 노력도 없이, 루는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좌우를 살펴댔다.

“그 여자는 없네? 하긴,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실전에 투입하겠어. 어차피 있어 봤자 도움도….”

“선을 긋지 않은 내 잘못인가….”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으니 그제야 선명해진다.

야닉은 이 왈가닥이 사리 분별 못 하고 까부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의 탓도 있었다는 걸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막 아크만에 와서 정신없는 와중에 쪼끄만 게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신경 쓰여서. 어린 나이에 모친을 잃고 식당에 드나들며 아버지를 돕는 게 안쓰러워서.

고사리손으로 설거지하던 애를 데려와 검을 가르치고 예뻐한 세월만 10년이었다. 안하무인 아가씨로 자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루가 품은 마음이야 그 나이대 소녀들이 한 번쯤 겪는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세레나와 결혼했던 당시에도 울고불고 난리 쳤다가 잠잠해졌길래 포기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루는 어느새 아이에서 여자가 되어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자신을 돌아봐 주기만을 내내 기다리면서.

그는 진작에 루를 붙잡고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확실히 선을 그었더라면 한 주임이 다치는 일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미적지근한 태도는 예의가 아니라 무례에 가깝지.’

이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루가 도르륵 눈을 굴렸다.

야닉은 습관적으로 루의 머리를 헤집으려다 관두고 진중하게 눈을 맞췄다.

“이따가 가게에 가 있어. 할 말이 있으니까.”

“뭔데? 나 근신 풀어 주는 거야?”

무어라 대꾸를 하려다가 번뜩 위화감을 느낀 그가 일순 동작을 멈추고 저 멀리 눈 덮인 산등성 위로 날아드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루, 자리로 돌아가서 대기해.”

그가 발견한 와이번 무리는 어림잡아도 예년보다 두 배는 더 많았다.

야닉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사람들 앞으로 가서 소리쳤다.

“푸른 와이번이다! 창에 불을 붙여서 장전해!”

날카로운 명령에 발리스타에 달라붙은 병사들이 쇠 닻에 고리를 끼워 창을 매단 줄을 팽팽히 감기 시작했다.

창끝에 돼지기름을 바르고 와이번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길 기다리는 동안 궁수들은 성가퀴에 매달려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자세를 잡았다.

머지않아 망루 위에서 와이번 떼를 발견한 신호병이 재차 올리판트를 불었다.

땅과 하늘, 두 군데서 구름떼처럼 마수들이 몰려들었지만 이를 맞이하는 요새는 긴장보다는 기대감에 고취되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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