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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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이 드리워진 방 안에서는 미엘라가 타오르는 벽난로 불빛에 의지해 광목천을 차곡차곡 개고 있었다.
한 주임은 얌전히 앉아서 착실하게 손을 놀리는 미엘라를 보다가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소음들 때문이었다.
괴물의 울부짖음이나, 사람들의 성마른 외침이 벽을 타고 넘어와 그대로 피부에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포도주를 물처럼 들이켜도 계속해서 목이 타고 가슴은 불안하게 두방망이질을 쳤다.
“별로 걱정하실 것도 없어요. 매년 겪는 건데요, 뭐. 몇 년간은 아마 사망자도 없었을걸요?”
미엘라는 켜켜이 쌓여 가는 천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무심히 종알거렸다.
“아크만은 다른 영지에 비해 세금이 훨씬 싼데도 매년 마물이 몰려오는 땅이라 원체 사람이 적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마물보다 부패한 귀족이 다스리는 땅이 더 살기 힘들다는 걸 깨닫고는 점점 이곳으로 모여들면서 커지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 병사도 많아졌고요.”
“그렇군요….”
“여기는 날씨랑 마물만 조심하면 되는데, 악덕 영주 아래에서는 일 년 내내 착취를 당하니까 당연히 아크만이 낫죠. 우리 영지는 앞으로도 점점 더 커질걸요?”
“미엘라는 여기서 나고 자랐는데도 아는 게 참 많네요.”
진심 어린 감탄에 그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히죽 웃어 보였다.
“다른 귀족들을 모시다가 아크만까지 흘러온 하녀들이 꽤 되거든요. 저희야 수다가 일상이니까요.”
미엘라에게 지금 바깥 상황이란 그저 조금 짓궂은 날씨겠거니 하는 정도로만 체감되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바짝 굳어 있던 어깨가 한결 느른해진다. 한 주임은 서성이는 것을 멈추고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다.
점심 식사를 권유하는 미엘라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먼저 먹으라 내보냈는데,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엘라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주임님,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사자님들도 전부 밖으로 나오시래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한 주임은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나 문을 나섰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라 별다른 준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복도로 나오자 어리둥절해서 서 있는 박 차장과 김유정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다위가 만들어 준 각자의 무기를 들고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뭐야? 우리까지 필요한 거야?”
기다란 아틀라틀을 끌어안고 두리번거리던 박 차장이 본능적으로 한 주임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김유정은 제 상체만큼 커다란 도끼를 아연하게 바라봤다.
“이제 겨우 실드를 배운 참이라, 무기 훈련은 아직 시작도 못 했잖아요.”
두 사람은 한 주임이 당연히 답을 아는 것처럼 물어 오고 있었다. 늘 야닉과 붙어 다니니 뭐든 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나가 봐요.”
한 주임은 아래층에서 그들을 데리러 온 위병을 보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미적거리며 방에서 나온 염 부장과 공 대리까지 합류하자 병사는 그들을 데리고 본성과 연결된 회랑 복도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성벽 위로 모셔 오라는 황자님의 전갈입니다. 밖에서 몰려든 마수들은 외부 방벽에서 아직 교전 중이고, 상공은 진압 마무리 단계입니다.”
몇 발자국 앞서 걸으며 병사는 간단히 바깥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본성 쪽으로 날아온 와이번들은 황자님께서 대부분 태워 없애셨습니다. 다른 방향도 기사단이 제압하고 있어서 위험한 상황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까부터 쿵쿵거리면서 땅이 울리던 진동은 와이번이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발생한 모양이었다.
소리나 진동으로 봐서 결코 독수리 수준의 크기가 아니란 걸 짐작한 운영팀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회랑을 지나 방벽 통로로 들어서자 공중에서 커다란 날개를 퍼덕거리는 용 한 마리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저, 저게 뭐야? 익룡? 익룡인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염 부장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와이번을 처음 본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와이번은 드래곤의 하위 종답게 악어를 연상시키는 길쭉한 머리에 몸통은 점액질로 뒤덮여 반들거렸다. 갈퀴로 이어져 양쪽으로 길게 뻗은 날개는, 좌우 길이만 4m에 다다라서 앞에는 어두운 그늘이 질 정도였다.
날개와 몸통 여기저기 칭칭 감긴 쇠사슬을 벗어나려 극렬하게 몸부림치던 와이번이 하늘 높이 괴성을 뿌렸다. 소리에 놀란 박 차장이 뒤로 넘어지려는 것을 한 주임이 순발력 있게 잡았다.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내지르던 와이번은 아무리 울어도 날아오는 동료가 없자 화가 난 듯 거친 입김을 불규칙적으로 뿜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놈들은 이미 대부분이 머리가 날아가거나 온몸에 창과 화살이 박혀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상태였다.
지금 붙잡고 있는 개체가 사지가 멀쩡한 마지막 한 마리였다.
이윽고 차갑고 축축한 등 가죽 위로 용병의 갈고리 하나가 더 날아와 상체를 단단히 옭아맸다.
“헤르미네 말로는 실드를 배웠다던데?”
와이번을 등지고 야닉이 태연하게 운영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한 주임은 무의식중에 그가 다친 곳은 없는지 빠르게 살폈다.
다행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쩡해도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한순간 고장 난 것처럼 팔다리를 덜그럭거렸다.
‘……루와 같이 싸운 건가.’
야닉 옆에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루를 보자 삽시간에 뱃속이 불쾌하게 울렁거렸다.
전투의 여운이 남아 한껏 상기된 얼굴을 한 여자아이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밉살맞아 보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신 처분이 풀린 건가 싶어서 속이 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제가 용병도 아니고….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니 급속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실전에 한번 써 볼까. 와이번 주위를 실드로 감싸고 움직임을 봉쇄해 봐.”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닉은 포라킨을 대신해서 운영팀을 지도하려는 듯 느긋하게 걸어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 주임의 어깨에 손을 두르더니 그녀를 데리고 옆으로 비켜선다.
야닉은 운영팀에게 길을 내주고 난 뒤에도 어깨에 올린 손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한 주임의 몸까지 휘청일 정도였다.
별거 아닌 행동 하나에 옹졸했던 마음의 벽이 한순간에 둑 무너지듯 와르르 쏟아졌다.
그런데도 조금 전까지 그가 루와 함께 싸웠다는 생각에 금방 부아가 치밀어 한 주임은 어깨를 비틀어서 품에서 빠져나왔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심경이었다. 혼자 뿌듯했다가, 질투했다가, 다시 붙잡아 주길 바란다니.
야닉은 그녀가 부끄러워서 피한 걸로 생각했는지, 아무렇지 않게 운영팀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희 실드… 배우자마자 눈보라 때문에 수업을 계속 못 받았는데…….”
“실드는 혼자서도 연습할 수 있다고 헤르미네가 말하지 않았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밑밥을 까는 박 차장에게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고 물었다.
김유정은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박 차장은 왜 사서 욕을 먹나 하는 표정이었다.
당연히 포라킨은 수업 마지막 날 각자 자습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김유정의 예상으론 정말로 열심히 연습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거 뭐 까짓거 해 보지, 뭐.”
괜히 찔린 염 부장이 헛기침을 하며 주춤주춤 앞으로 나왔다.
운영팀 네 사람은 와이번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손을 뻗어 실드를 전개했다.
흉측한 이를 드러내며 와이번이 거친 소리를 내자 갈고리를 붙잡고 있는 야인들의 팔에 불끈 힘줄이 솟았다. 실드의 압박감을 느낀 마수가 더욱 격렬하게 몸부림쳤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야닉이 눈썹을 찌푸렸다.
“물리력을 더 높여서 압박해. 사슬이 느슨해질 때까지.”
점잖게 강요하는 목소리에 운영팀이 이를 악물었다.
크게 뻗어 있던 와이번의 양 날개가 실드에 의해 점차 구겨지듯 모이고 있었다.
“…드워프가 활도 만들어 줬다며?”
경직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돌연 목소리 하나가 툭 끼어들었다.
한 주임은 저도 모르게 제 옆에 야닉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 그쪽 말이야.”
“말버릇이 그게 뭐지, 루?”
야닉이 냉담한 얼굴로 이름을 부른 탓에 한 주임은 그제야 루가 저에게 말을 걸었단 걸 알았다.
“한 주임…님 말이에요.”
입을 한 보따리 내밀고 하는 말치곤 제법 온순해서 한 주임은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드워프가 만들어 준 활은 든 적도 없다던데 사실인지 궁금해서…요.”
“…그게 왜 궁금한데요?”
예상외의 날카로운 반응에 야닉이 더 의외인 얼굴을 하고 한 주임을 쳐다봤다.
그녀는 입매를 일자로 굳히고 싸늘한 눈으로 루를 직시하고 있었다.
말해 놓고도 오히려 당황한 쪽은 루였다.
“네, 네? 아니, 그게…….”
“내가 활을 쏘든, 검을 들든 무슨 상관이라고요.”
루의 얼굴이 단박에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한 주임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몰골이었다.
그녀는 로브 아래로 주먹을 말았다. 성질대로 뻗대기에는 야닉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활은 별로… 자신이 없나 봐요?”
예상대로 한 주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미끼를 덥석 문 자의 예의 그 표정인 것이다. 루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하긴. 드워프라고 해도 신은 아니니까, 가끔은 실수할 때도 있겠지.”
이번에는 눈썹이 비틀렸다.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꾹 누르고 루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보니까 검술 연습을 되게 열심히 하던데, 활 쏘는 법도 그렇게 연습하면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중간은 가지 않을까요?”
이제는 예의를 차리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던지고 뒤돌아서면 한 주임은 무조건 낚일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힘내라고요. 그걸 뭐라고 하더라? 맞아. 격려! 그냥 격려해 주고 싶어서요.”
이걸로 타라 늪지대 여관에서의 앙갚음은 어느 정도 한 셈이었다.
그 일로 난생처음 대원들한테 눈초리를 받고 근신 처분까지 받았으니, 그 뒤틀린 심사에 응어리가 지는 건 루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이랴, 브라우니한테 얼토당토않은 저주까지 받은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울화가 치밀어 머리를 쥐어뜯었다.
다위가 한 주임에게 활도 만들어 줬다는 말을 전해 준 종기사 헥… 뭐시기가 저주를 풀 방법으로 나무를 심으라 했던 것은 깡그리 무시했다. 별 시답잖은 소리였다.
기세를 몰아 한껏 비아냥거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야닉이 철썩 달라붙어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 정도로 봐주는 게 좋을 성싶다.
예상대로 한 주임은 낚싯줄에 꼼짝없이 낚인 물고기가 되어 돌아서는 루를 붙잡았다.
“……활. 한 번만 빌려줘요.”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