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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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의 사체는 실어다가 움리족들에게 넘기고 부상자는 의무실로 옮긴다! 말끔하게 정리들 하자!”
“예!”
브레고가 큰 소리로 호령하자 병사들이 우렁차게 화답했다.
최전선 외벽에서 날아온 전서구에서는 지상에서 몰려든 마물들 역시 토벌 완료되었다는 내용의 쪽지가 매달려 있었다.
야닉은 자유분방한 스캄의 필체를 내려다보고 답장 대신 하늘 높이 푸른 불꽃을 쏘아 올렸다. 그것을 본 신호병이 가슴이 부풀어 오르도록 숨을 들이켜 거대한 올리판트를 있는 힘껏 불었다.
한 주임은 요새 전체에 울리는 승전보를 온몸으로 느끼며, 맑게 개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맞다. 잠깐만, 야닉.”
손에 쥐고 있던 활을 보고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는 루를 향해 재빨리 뛰어갔다.
빌렸던 활을 돌려주려는 찰나, 반대편에서 허겁지겁 계단을 올라온 용병 고르칸이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루! 큰일 났다. 빨리 내려와 봐! 임 사장님이, 너희 아버지가 좀 다치셨는데…….”
다음 말을 듣기도 전에 사색이 된 루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돌계단을 두 칸 세 칸씩 뛰어 내려가다가 눈길에 미끄러졌을 땐 어느새 뒤따라온 야닉이 잽싸게 팔을 붙들었다.
루는 헉헉대며 힘겹게 숨을 뱉어 냈다.
“야, 야닉…. 아빠가, 아빠가…….”
“진정해. 똑바로 천천히 걸어. 뛰지 말고.”
루가 매달리다시피 야닉을 붙잡고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임식당 앞이었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루는 본능적으로 파고들었다.
“아빠……?”
그녀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눈물이 차올라 흐릿해진 시야에 바닥에 누워 있는 제 아비의 모습이 한가득 들어왔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던 임철우가 루의 목소리에 다급하게 손을 휘둘렀다.
“선희야, 아빠 괜찮아. 그냥 조금 다친 거야. 여긴 왜 왔어…. 누가 쟤 좀 데려가세요, 으윽!”
사방에 낭자한 피를 본 야닉이 황급히 루의 눈을 가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악스레 아빠를 부르며 울부짖는 루를 임식당 여직원에게 맡기고 그는 임철우를 재차 살폈다.
오른쪽 발목이 있어야 할 자리엔 납작한 바짓자락과 핏물만 흥건히 바닥에 고여 있었고, 치료 사제들이 다급하게 소실된 부위를 압박하고 있는 상태였다.
사제들 뒤로는 목이 두 동강 난 와이번의 사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몸통에는 용병들이 달라붙어 배를 가르고 안을 정신없이 헤집고 있었다.
“제기랄! 죽어 가는 와중에도 씹어 삼키다니, 도대체 어딨는 거야!”
티보가 맨손으로 위장을 훑어 나가는 동안 성벽에서 내려온 포라킨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포라킨은 상황을 빠르게 살핀 후 날카로운 눈으로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
“다리는요? 찾았습니까?”
“지금 찾고 있… 가만 있어 봐, 이거, 이건가?”
위장 속에서 손에 잡히는 걸 냅다 꺼낸 티보가 난감한 얼굴로 포라킨을 돌아보았다.
누가 봐도 온전치 못한 것을 보고 포라킨은 이맛살을 크게 찌푸렸다.
“손상이 너무 심해서 복구가 될지…….”
도박에 가까운 결정이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녀는 티보가 들고 있는 신체 부위에 곧바로 회복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고통에 차 들끓는 신음을 흘리던 임철우는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포라킨을 따라 달려온 한 주임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할 말을 잊은 채 망연히 야닉을 쳐다보았다.
“…보지 마.”
앞을 막아서서 그녀의 머리를 품에 가둔 야닉의 입에서 희미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한 주임은 불안으로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양승원과 병원 부제들이 인파를 뚫고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양승원이 허겁지겁 수그려 앉아 임철우의 동공과 호흡을 확인하며 묻자, 티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죽은 줄 알았던 와이번이 갑자기 깨어나서 임 사장 다리를 물어뜯었어. 곧바로 목을 베긴 했는데, 이 망할 놈의 마물이 그새 씹어 삼켜 가지고 이 꼴이 났다.”
녹색 빛에 휩싸인 신체를 바라보며 티보가 혀를 크게 찼다.
마법을 전개하면서 그것을 안타깝게 보던 포라킨은 쓴 입맛을 다셨다.
“형태가 온전하면 도로 붙이는 건 어렵지 않은데, 일단 부위 회생부터 해 보고 성공하면 다리에 연결할 겁니다. 넝마인 상태로 붙일 순 없으니까요.”
“저희는 계속 지혈하면서 병동으로 옮기죠.”
양승원의 지시에 임철우는 일사불란하게 들것에 실려 갔다.
뒤늦게 야닉을 발견한 티보가 다른 용병에게 다리를 넘기더니 허둥지둥 달려왔다.
“여긴 임 사장 말고 다친 사람은 없어요. 아, 제기랄. 올해는 부상자 없이 지나가나 싶었는데, 다 죽은 줄 알았던 놈이 갑자기 일어나서 달려들 줄은….”
“임 사장처럼 조심성 많은 사람이 별일이군…. 정리하고 다들 데리고 관사로 복귀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좁히던 야닉은 티보에게 간결하게 명령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불안한 눈으로 저를 보는 한 주임을 향해 안심시키듯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더 심하게 훼손된 것도 살린 적 있어. 복구할 수 있을 거야.”
“…….”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던 한 주임은 슬쩍 품에서 빠져나와 들고 있던 루의 활을 야닉에게 내밀었다.
“루한테 직접 말해 줘. 그게 좋겠어.”
얼결에 받아 든 그가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 가서 쉬고 있어, 밥도 먹고. 이따 갈 테니.”
“응.”
한 주임은 부러 힘주어 대답하고 야닉의 등을 떠밀었다.
이 순간 절대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열아홉 살짜리 여자애일 것이다.
그럼에도 멀어지는 야닉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마냥 달갑지가 않아서, 그녀는 비릿한 감정을 추스르며 몸을 돌렸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언제 따라왔는지 옆에 붙어 서서 저를 기웃거리는 이한율까지 저조한 기분을 배가시켰다.
임철우가 누워 있던 것을 메마른 낯으로 물끄러미 보던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지독하게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눈이 마주치자마자 생기를 띠는 장면은 소름까지 돋을 정도였다.
부산스럽게 오가는 인파 속에 섞여 있으니 그에 대한 경계심이 어느 정도 희석되는 것도 같아서 한 주임은 무미건조하게 고갤 끄덕였다.
“…한율 씨도 싸웠어?”
로브 아래 슬쩍 드러난 무릎 보호대를 보고 건조한 음성으로 묻자 금방 화색을 띤 답변이 돌아왔다.
“단장님이랑 같이 북쪽 성벽에 있었어요. 다른 신입들도 다 같이요.”
“그래…. 관사로 모이라는 것 같던데, 가 봐.”
미르나 폰 이야기를 하면 관심을 가지면서 이것저것 물어 올 줄 알았는데, 한 주임이 앞만 보고 걷는 것을 보고 이한율은 잠깐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고 그는 재차 웃는 낯으로 뒤를 따랐다.
“주임님도 같이 가실래요? 블라산코 님 말고는 다들 한 달 넘게 못 보셨잖아요.”
“아니, 됐어.”
한 주임에게선 묘하게 쌀쌀맞은 분위기가 흘렀고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이한율이 아니었다.
그는 혼자 저만치 앞서가는 한 주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뭔가 눈치를 챘나? 그럴 리가 없는데.”
한동안 자리에 서서 의뭉스럽게 안광을 빛내던 이한율은 티보가 부르는 소리에 다시 말간 얼굴로 돌아와 눈을 접어 웃으며 돌아섰다.
* * *
방으로 돌아온 한 주임은 복잡한 심경으로 이마를 짚었다.
“미엘라, 미안한데 밖에 정리하는 것 좀 도와줄래요? 끝나면 모레까지 푹 쉬고요.”
“정말요? 그럼 저야 감사하죠!”
갑자기 이틀의 휴가를 얻은 미엘라가 신나서 밖으로 달려 나가는 것을 잠잠히 보던 그녀는 조용히 문을 걸어 잠갔다.
허리띠를 풀어 탁자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뒤 걸음을 옮긴 곳은 침대 옆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아래로 팔을 뻗으니 덜그럭 나무 상자가 손에 걸린다.
“…….”
상자를 꺼내 가만히 내려다보기를 한참, 뚜껑을 여는 데 또 한참이 걸렸다.
파르르 떨리는 손 아래 놓여 있는 활은 마치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였다.
“……예쁘다.”
다위가 만들어 준 활은 아까 루에게서 빌렸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은은한 광채가 도는 까만 활대는 만져 보지 않아도 매끄러워 보였고, 손잡이의 뒤틀림 장식은 고아하기 그지없었다.
현과 이어지는 절묘하게 둥근 각도마저 미치도록 황홀할 지경이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답고 우아한 무기가 또 있을까.
활에 의지에 이끌린 것처럼 손잡이를 잡았을 때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였다.
홀린 듯이 빈손으로 시위를 당기던 한 주임은 그대로 몸을 굳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위가 만들어 준 활은 크기, 무게, 현의 장력까지 전부 그녀가 사용했던 선수용 활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일순 감전된 것처럼 신체 곳곳이 저릿했다. 잊고 있었던, 아니 잊고 싶었던 감각이 말초서부터 정수리 끝까지 다시 피어오른다.
맨 처음 활을 잡았던 순간의 환희가 전신을 집어삼키듯 거칠게 온몸을 덮쳤다.
이토록 강렬한 경험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10점을 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 주임은 결국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기분이 왜 이러지…….’
아무래도 아까 루의 활을 빌려 쓴 것이 내재된 무언가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것이 틀림없었다.
걷잡을 수 없이 활을 잡고 싶은 욕구에 휩싸여 방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와이번을 맞춘 뒤부터는 온통 활 생각뿐이었다.
순식간에 앞이 흐릿해지면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굵은 물방울이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지르자 이번에는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흐른다.
소리도 없이 한참이나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났나, 어쩐지 그게 더 서러워져서 한 주임은 어깨가 들썩이도록 내내 숨죽여 울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