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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88화 (88/155)

88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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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해.”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들여다본 한 주임이 물먹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해가 질 때까지 눈물만 한 바가지 쏟아 냈더니, 진이 다 빠지고 얼굴은 퉁퉁 부어 말이 아니다.

미엘라에게 얼음물을 부탁하려다가 제 손으로 휴가 보낸 것을 깨닫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게 얼마 만에 울어 본 거지.’

펌프로 물을 끌어 올리며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당장에 기억나는 건 중학교 때 갑자기 대회 출전이 무산되었을 때였나.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나중에야 이사장 손녀가 저 대신 나가게 된 것을 알았을 때 분해서 울었던 것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선 예선에도 못 들었지. 그때는 쌤통이었는데.’

딱히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기억이 없어서 무안해진 한 주임은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그만큼 울었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우푸풉.”

세면대에 물을 퍼 담아 아무 생각 없이 얼굴을 담갔다가 파드득 몸서리를 쳤다. 한겨울의 계곡물이란 정신이 다 아찔해질 정도였다.

한 주임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주전자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미엘라가 없으니 목욕물도 손수 데워야 했다.

누가 봐도 펑펑 운 것 같은 얼굴로 밖에 나가 뜨거운 물을 가져올 순 없어서, 그녀는 출렁이는 주전자를 들고 벽난로를 향해 뒤뚱뒤뚱 걸었다.

똑똑.

“네!”

미엘라인가 싶어서 얼른 대답했더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야닉이었다.

한 주임은 바닥에 허겁지겁 주전자를 내려놓고 욕실로 뛰었다.

‘맞다. 아까 온다고 그랬는데!’

뒤에서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세면대에 얼굴을 냅다 처박았다. 얼음장 같은 물에 닭살이 다다다 올라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뭐 하고 있어?”

첨벙첨벙 물을 튀기며 우악스럽게 세수를 하는 한 주임을 보고 야닉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행위를 하는지 묻는 게 아니라, ‘왜 그러고 있어?’의 의미였다.

그녀는 부러 사방팔방 물을 흩뿌리며 그가 가까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뺨이 얼얼해질 때까지 멀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쯤 되면 그냥 포기하는 게 빠를 것이다.

한 주임은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대는 세수도 예쁘게 하는군.”

누가 봐도 이상했을 텐데 진심인가 싶어 돌아보려다가 꾹 참았다.

야닉이 수건을 건네주는 것을 받아 눈을 꾹꾹 누른 뒤 그대로 머리 위로 덮어썼다. 최대한 얼굴을 가리려는 속셈이었다.

“이, 임 사장님은 좀 어떠셔?”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주전자를 다시 들고 벽난로로 가려는데, 그가 다가와 손에서 부드럽게 낚아채더니 다시 내려놓는다.

야닉은 차갑다 못해 새빨개진 그녀의 손끝을 매만지며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다리는 원래대로 붙였어. 헤르미네가 거의 기절하기 직전까지 회복마법을 써야 했지만.”

“아, 정말? 다행이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아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야닉은 잠깐 몸을 굳혔다가 그녀를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안타깝지만 발가락 두 개는 회생 불가능해서 절단하기로 했어. 조금만 더 늦었으면 발 전체를 포기해야 했을 거야. 헤르미네가 빠르게 처치한 덕에 그나마 살릴 수 있었지.”

“발가락은… 마법으로도 살릴 수 없는 거야?”

야닉은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회복마법은 만능이 아니야. 다친 부분은 고칠 수 있지만, 소실되거나 아예 죽어 버린 것을 살리진 못해.”

그렇구나. 한 주임은 떨떠름하게 고갤 끄덕였다.

마주칠 때마다 인자하게 웃으며 인사를 해 주던 임철우의 얼굴이 생각나 절로 침울해졌다.

“루는? 잘 다독여 주고 왔어?”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제 손을 꽤 집요하게 주물럭거리는 것도 모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야닉은 설핏 웃음을 삼켰다.

“잘 다독여서 병동에 데려다주고 왔지. 그 녀석,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울더니 보자마자 느닷없이 성질부터 부리던데.”

한 주임은 야닉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슬쩍 보고 또다시 명치 언저리가 따끔따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웃음이 향하는 대상이 오로지 나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은 자신임에도 그가 부족했다. 야닉을 온전하게, 오롯이 전부 가지고 싶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한 주임은 문득 그의 입술로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옮겼다.

온몸이 따끈한 남자는 입술도 뜨거울까. 낯 뜨거운 호기심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느릿하게 달싹이는 모양을 따라 손을 올리던 한 주임은 야닉의 말에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요즘 야닉을 볼 때마다 이상한 생각만 드는 게, 어쩐지 점점 변태가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당신은 왜 울고 있었지?”

그녀의 상상 속에서 거친 야수가 된 그가 머리에서 수건을 치우며 물었다.

“이건 그냥…….”

황급히 돌아가는 몸을 잡아 돌려세우는 손짓이 제법 단단했다. 채근하는 눈빛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한 주임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

저를 걱정하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엉큼한 생각을 했다는 게 민망하기도 하고, 또 운 이유를 말할 수도 없어서 그녀는 대충 둘러댔다.

“…….”

야닉은 눈 주위가 벌겋게 될 정도로 펑펑 울 일이 무엇인지 미치게 궁금했지만, 그보다 난감해하는 얼굴이 더 마음에 쓰여서 캐묻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뭐가 단단히 들어갔었나 보네.”

“응.”

눈치를 보는 것인지 붉은 눈으로 새초롬히 쳐다보는 고양이 같은 눈매가 오늘따라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야닉은 타는 목마름을 느끼며 차라리 고개를 푹 수그렸다.

조금 전까지 눈물을 쏟아 낸 여자를 보고 그런 기분이 들다니, 이건 좀…….

“…돼먹지 못한 놈…….”

들릴 듯 말듯 조용하게 웅얼거린 그가 두 손으로 한 주임의 양 볼을 감싸고 한 뼘 거리로 거리를 좁혔다.

그녀는 놀라서 숨 쉬는 것도 잊고 커다란 눈만 끔뻑거렸다.

“도저히 안 되겠어. 내일이라도 당장 델피온에 다녀와야겠어. 더는 자신이 없어.”

“…!”

인내하고 또 인내해서 이마 위에 입술을 눌렀다 떼는 것으로 참아 낸 야닉은 매우 깔끔한 동작으로 뒤로 물러났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그는 이방인에게 배웠던 말을 성서 구절처럼 가슴에 새겼다.

한 주임은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아직도 촉감이 남아 있는 이마를 만지작거리는 와중, 그가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목욕물만 데워 주고 나갈게. 더 있으면 내가 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린 야닉이 욕조에 물을 세게 틀더니 돌연 문을 쾅 닫아 버렸다.

* * *

요새에 들이닥쳤던 마물들의 흔적이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정리되고, 어느덧 시리고도 화창한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은 곳 외에는 뽀얀 눈이 소복이 쌓여 아크만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온통 흑백 세상으로 뒤덮였다.

뾰족한 전나무 잎에 쌓인 눈송이가 가지를 뒤흔드는 손길에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렛잇고오. 렛잇고. 흐응 흥흥 흐흐흥.”

“아, 공씨! 가사를 모르면 부르지를 말라고요!”

“어째 날이 갈수록 까칠해진단 말이야. 그게 또 우리 자기 매력이긴 하지만.”

아침부터 티격태격하며 본성으로 돌아가던 공 대리와 김유정이 맞은편에서 오고 있는 포라킨을 보고 크게 손을 흔들었다.

“단장님, 또 병동에 가세요?”

“네. 회복마법이 필요한 분이 계셔서…. 두 분은 대장간에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화살이 빼곡히 담긴 자루를 본 포라킨이 자연스레 화제를 바꾸었다. 자로의 존재는 널리 알려서 좋을 게 없었다.

“우리 한 주임 갖다주려고요. 오늘부터 연습한다고 그랬거든요.”

“우리 한 주임 좋아하네. 하여튼 줄 하나는 겁나 잘 서, 진짜.”

김유정이 질린다는 얼굴로 혀를 내두르자 공 대리가 들고 있던 자루를 어깨에 고쳐 메며 킬킬거렸다.

“조만간 황자비가 되실 몸인데, 무조건 잘 보여야지. 암!”

공 대리의 속내를 간파한 포라킨이 황당하다는 듯이 한쪽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러니까, 한 주임님이 황자님과 결혼할 예정이라 잘 보이려고 심부름을 자처한다는 말이군요?”

“아주 셔틀이 다 됐어요.”

“어허. 서방님한테 셔틀이라니. 난 그냥 황자님을 따라간 기사들이랑 종자들을 대신해서 대장간에 잠시 들러 준 것뿐이라고.”

벌건 코로 콧물을 훌쩍이면서 하는 소리치고는 설득력이 없어서 김유정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황자님이 수도로 떠나신 지도 일주일이 넘었는데, 지금쯤이면 궁에 도착하셨겠죠? 편지는 아직 안 왔대요?”

“곧 연통이 오겠죠. 겨울에는 비둘기들이 비행형 마물에게 잡아먹히는 일이 많아 전령이 직접 움직여야 하니, 시간이 좀 더 걸릴 겁니다.”

회백색 하늘을 바라보는 포라킨의 붉은 눈동자에 한줄기 염려가 스쳤다.

‘재취 허가를 받으러 입궁하신다고는 했지만, ‘그날’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도 세우고 오신다고 하셨지.’

포라킨은 늘 껄렁껄렁 취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2황자 시즈 오베라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뤼시크 상단이 권세를 잡게 만든 현 황제를 결코 성군이라 칭할 순 없어도, 이방인 회유정책 하나만큼은 오웬 1세나 2세에 비해 업적이라 부를 만한 것이긴 했다.

권력으로 이방인들을 찍어 누르고 노예처럼 부리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없애던 두 선대에 비하면야 오웬 3세는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황제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시즈 오베라가 앉는다? 쉽사리 상상이 가질 않는다.

제국의 1황자이자 황태자 자리에 있는 체이스 오베라는 진작 황태자비의 꼭두각시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고, 2황자에 대해 세간에 알려진 정보는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정도였다.

가끔 별궁에서 마주칠 때마다 윙크를 하고 지나가던, 황족의 권위 따위는 한 줌도 없어 보이는 의뭉스러운 사내.

그것이 제위를 노리고 있는 자에 대한 포라킨의 짤막한 감상이었다.

‘야닉 님이 주군으로 선택한 분이니, 내가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

골치 아픈 정치문제는 제 역할이 아니었다. 포라킨은 무의미한 상념을 털어 내고 의료 병동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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