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89화 (89/155)

89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작품입니다. 저자와 발행처의 허락 없이 본 저작물로 무단전재,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 시 민사 및 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단장님도 오셨네요.”

입원실 앞에서 알리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양승원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주교님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시지? 포라킨은 서둘러 달려가 예를 갖췄다. 양승원은 알리온과 나누고 있던 대화를 포라킨에게 설명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자로 할슈타드 환자분 말인데요. 처음에는 상태가 호전되나 싶었는데 급격하게 안 좋아져서요.”

“아침부터 연락을 받고 오는 길인데, 나도 도통 무슨 연유인지….”

알리온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자 포라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양실조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다니, 양승원과 알리온을 번갈아 보던 그녀는 지체 없이 입원실 문을 벌컥 열었다.

“읏…!”

포라킨은 저도 모르게 옷 소매로 코를 막았다. 문을 열자마자 살이 썩어 들어가는 고약한 악취가 밖으로 훅 끼쳤기 때문이었다.

죽은 듯 얌전히 누워 있는 자로 옆엔 한 주임이 담담히 앉아 있었다. 포라킨이 의외라는 얼굴로 다가갔다.

“주임님이 왜 여기 계십니까? 공 대리님이 화살만 한 보따리 가지고 좀 전에 본성으로 가셨는데요.”

“네? 제가 오늘 받으러 간다고 말하긴 했는데 대리님이 왜….”

더 놀란 한 주임이 벌떡 일어나자 포라킨은 뻔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어깨를 위로 세웠다.

“미래의 황자비 저하가 어쩌고저쩌고하더군요. 축하드립니다. 충실한 부하가 또 한 명 생기셨어요.”

야닉이 재혼을 위해 직접 황도로 떠났다는 소문은 이미 영지에 쫙 퍼져서,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한 주임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한 주임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야닉이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은 했지만…….’

가장 중요한 청혼을 받은 적이 없다.

청혼을 떠나서 심지어 좋아한다는 고백도 들은 적이 없었다. 야닉이 저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그러니까… 원정에서 돌아온 날부터였나.

자꾸만 안으려고 하고 만지려 들고, 다른 사람들이 있어도 없어도 야닉은 고삐가 풀린 짐승처럼 시도 때도 없이 스킨십을 하고 달콤한 말들을 쏟아부었다.

그러다가 가장 최근에는 저만 보면 다가왔다가도 금방 매몰차게 돌아서기까지 했으면서,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한 주임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고민이 많아 보인다. 이방인.”

자는 줄 알았던 자로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뜨문뜨문 말을 이었다.

“어, 정신이 드세요? 이야기 중이었는데 갑자기 잠드셔서 깜짝 놀랐어요.”

귀환석의 시동어를 물어보러 왔던 한 주임은 자로의 얼굴을 보고 제법 큰 충격을 받았다.

한 달 전보다 훨씬 더 음영이 짙어진 얼굴은 거의 미라나 다름이 없었다.

뼈 위에 얇은 거죽만 얹어 놓은 듯한 모습에 혈색이라고는 하나 없이 거무죽죽한 낯빛이 딱 봐도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이불 아래 감춰진 다리는 냄새로 짐작했을 때 괴사는 물론, 부패가 진행된 지 한참이나 지난 듯했다.

그러나 양승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어제 오후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어요. 저녁부터 못 걷겠다길래 보니까 갑자기 괴사가 오더군요. 오늘 아침부터는 썩기 시작했고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포라킨이 서둘러 지팡이를 품에서 꺼내 들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봐도 알 수 있다. 자로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것도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말이다.

그를 향해 회복마법을 걸려는 순간, 알리온이 뒤에서 바람을 일으켜 포라킨의 지팡이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주교님?”

아연해서 돌아보는 포라킨에게 알리온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대인이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네.”

자로는 포라킨의 행위가 중단된 것을 보고 한 주임을 향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짐승으로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았다. 원래의 육신이 온전할 리 없다.”

“그래도… 그래도 마법을 받으면 괜찮아지잖아요.”

순간 감정이 왈칵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한 주임은 안타깝게 말했다. 그러나 곧은 눈으로 저를 보는 눈빛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나를 살리려면 매일같이 마법을 걸어야 한다. 한두 사람의 마법으로는 겨우 생명만 유지할 뿐, 다 꺼져 가는 모닥불에 부채질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결국에는 사그라들 빛이다.”

“그래도…….”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라. 누군가의 희생으로 연명하는 삶은, 선물이 아니라 고통일 뿐이라고.”

자로는 그렇게 말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이렇게 다시 사람이 되어서 아크만의 달라진 모습도 보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한 주임은 고개를 돌려서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자로는 오히려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맞아. 귀환석. 이제 생각이 났다. 귀환석 쓰는 법을 물어봤었지. 먼저 피를 묻혀야 해. 그리고 붉은 빛이 생기면 주문을 왼다.”

“…….”

그녀가 천천히 고갤 끄덕이자 자로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주문은… ‘πάλιν’이다.”

“팔린. 팔린…….”

한 주임은 잊지 않으려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그가 맞다는 듯 찬찬히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떴다.

자로는 무언가를 주시하듯 허공을 향해 탁한 눈동자를 고정했다.

“무사히 돌아가라. 이방인이여. 그곳엔 당신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런 사람은 없어요.

한 주임은 머릿속으로 대답하고 겉으로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이제 그리운 어머니를 만나러 가야겠다. 왜 이제야 오느냐 화를 내시면… 그리하시면 그냥 혼이 나야지…….”

미미하게 웃던 자로는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창백한 코에 귀를 가져다 대고 미약한 숨소리를 확인한 한 주임이 젖은 눈을 한 번 더 훔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본성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자로의 말을 반복해서 머릿속에 되뇌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연명하는 삶은, 선물이 아니라 고통일 뿐이라고.]

그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겨울비가 음울하게 내리던 날의 오후였다.

* * *

자로의 장례식은 고대의 방식을 따라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장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어젯밤부터 부슬거리던 비는 신기하게도 장례식이 시작되자마자 뚝 그쳤다.

“원래는 고인의 가족들이 돌아가며 불씨를 던지는 것인데, 이자는 가족이 없으니 우리가 대신합시다.”

알리온이 가장 먼저 횃불을 들고 나섰다.

그는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와 넓적한 잎사귀로 장식된 관 앞에 서서 안식의 기도를 올린 후 관을 받치고 있는 다리에 불을 놓았다.

양승원, 포라킨, 한 주임, 하랑, 스캄이 뒤를 이어 불을 놓고 묵례를 한 후 돌아섰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그때 루의 부축을 받으며 임철우가 광장에 들어서자 약속이라도 한 듯 한곳으로 시선이 모였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그의 다리를 보고 있었다.

“임 사장님! 벌써 돌아다니셔도 되는 겁니까?”

포라킨이 서둘러 달려가 묻자 임철우는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조금씩 걸어 보려고요.”

“그냥 며칠 더 쉬라니까 말도 지지리도 안 들어, 진짜.”

잔뜩 불퉁한 목소리로 성을 내는 루에게 임철우는 괜찮아, 하고 딸의 팔을 다독였다.

그는 목발을 짚은 채로 뚜벅뚜벅 걸어가 사제가 건네주는 횃불을 놓고 다시 돌아왔다. 짧은 거리였음에도 한겨울에 굵은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발가락 두 개가 없을 뿐인데, 걷는 게 쉽지가 않네요. 괜히 간지럽기도 하고요.”

“양쪽 균형이 무너져서 그래요. 환상통도 그렇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예요.”

양승원은 광장에 모인 인파 가운데, 인상이 험악한 용병 하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 친구는 작년에 트롤한테 팔 한쪽을 먹혔는데 글쎄, 상처가 아물자마자 후크 선장이 돼서 나타나지 뭡니까.”

눈이 마주친 용병이 갈고리를 단 팔을 높이 들어 뽐내듯이 휘두르자 임철우는 멋쩍게 웃었다.

“지금 팔이 더 마음에 드는가 본데요.”

“익숙해지면 목발을 떼고 걸어 보시고, 몇 달 정도 경과를 보다가 정 불편하시면 보조기구를 맞추면 될 것 같아요.”

의사와 제 아비의 대화를 지척에서 듣고 있던 루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녀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한 주임을 발견하고 그리로 냅다 달려갔다.

“……저기, 저기요.”

손가락으로 콕콕 등을 찌르는 느낌에 뒤를 보자, 잔뜩 굳은 얼굴의 루가 눈을 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루는 한참이나 말을 얼버무렸다.

“전에 말했던… 브라우니의 축복 말이에요. 그거 뭐였어요…?”

“네?”

난데없이 무슨 말인가 싶어서 되묻자 루가 단박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브라우니한테 축복받았다면서요. 그거 진짜예요? 무슨 축복인데요? 그래서 정말 이뤄졌어요?”

“…나도 잘 몰라요. 그냥 길을 잃지 않게 해 준다고 그랬어요.”

제 팔을 잡고 흔드는 자그만 손을 끌어 내리며 한 주임이 난감한 어조로 답했다. 아무래도 루는 저주 때문에 임철우가 다쳤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진짜 저주였으면 다리를 살리지도 못했겠죠. 그냥 장난 같은 걸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본의 아니게 루를 위로한 한 주임은 재차 몸을 똑바로 세우고 장례식에 집중했다.

여러 사람이 불을 놓은 관은 어느샌가 활활 타올라 검은 연기를 하늘 높이 뿜어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참석하던 고대의 장례 문화에 따라 시가지 한복판에서 열린 자로의 장례식이었음에도 영지민들은 그를 몰랐다.

스캄은 마물에게 부상을 당한 신입 용병이 결국 사망했다는 내용을 공문으로 뿌려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고인의 고향 문화대로 장례식을 진행한다는 이야기는 그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기다랗게 줄지어 서서 너나 할 거 없이 화염 안으로 플라타너스 나뭇가지를 던지고 눈물을 글썽이며 애도를 표했다.

루는 자리를 뜨지 않고 그대로 한 주임 옆에 서서 한참을 쭈뼛거렸다.

“저기…….”

“뜸 안 들여도 되니까 그냥 말해요.”

한 주임은 조문하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의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끄응, 루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있었어야지. 지금 하려는 말은 그녀의 열아홉 인생에서 아마도 난생처음일지도 모른다.

“고, 고맙다고…요.”

동시에 한 주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지금 두 귀로 들은 것이 환청이 아니라 진짜인가? 아연히 돌아보자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개진 루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루는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가 힘겹게 입을 뗐다. 정말이지 큰 결심이라도 한 모양새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