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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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 다쳤을 때, 그쪽이 야닉한테 나한테 가 보라고 그랬담서요……. 솔직히 나였으면 그쪽 아빠가 다치든 말든 신경도 안 썼어요…….”
너무나도 솔직한 발언에 민망함은 오히려 한 주임 몫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고 불편하기는 한 주임도 마찬가지였다.
루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냥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야닉이 그랬어요. 그쪽이 아니었더라도 자기가 날 여자로 보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요.”
그녀의 동그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뚝뚝 떨어졌다.
“이제 진짜 끝났어요. 짝사랑 끝.”
한 주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도 위선으로 느껴질까 봐 그저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루는 훌쩍이다가 이내 엉엉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하도 서럽게 우는 탓에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안타깝게 혀를 찼다.
“루 님이 자로 님과 따로 친분이 있었나요? 엄청나게 슬퍼하네.”
하랑이 의아해서 묻는 말에 포라킨이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멀리서 광장 쪽으로 요란하게 말을 몰아 달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캄이 눈을 부릅뜨더니 전광석화처럼 검을 뽑아 이곳을 향해 내달리는 자의 앞길을 막아섰다.
급작스럽게 당겨진 고삐에 놀란 말이 공중으로 앞발을 구르다가 멈추자 비소로 숨을 헐떡이는 기수가 보였다. 외방벽에서 초소를 지키는 관문 병사 중 하나였다.
그를 막아선 스캄이 검을 내려놓고는 의아해 물었다.
“관문에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어딜 가는 길이냐.”
“로하겔 기사단장님께 보고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부대장님!”
그를 알아본 병사가 얼른 말에서 내려 바짝 굳은 얼굴로 답하자 스캄은 대번 눈살을 구겼다.
“로하겔 경이라면 저번에 황자님과 함께 수도로 떠났는데, 모르고 있었나?”
“죄, 죄송합니다! 제가 당황해서 그만 깜빡했습니다!”
“용건은 나한테 말해라, 이 한심한 녀석아.”
쯧, 혀를 크게 차며 지켜보는데 병사가 우물쭈물하는 기색이다.
스캄이 바짝 다가서자 병사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병사는 아연한 얼굴로 덜덜 떨면서 고개를 치켜세웠다.
“그게… 그분이 돌아오셨습니다.”
“뭐? 로하겔 경이 돌아왔다고?”
220㎝가 넘는 거구의 사내가 허리를 구부리며 되묻는 건 몹시도 위협적이었으나, 병사가 벌벌 떠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게 아니라…… 세레나 공주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뭐라고?”
스캄이 황당하단 얼굴로 반문했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있는 중앙 광장에서 돌연 말을 몰고 나타난 병사에게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 하나 입도 벙긋 않고 병사와 스캄을 지켜보고 있던 탓에 젊은 병사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퍼져 나갔다.
“세레나 공주님이요! 공주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동안 넋을 잃고 있는 사람은 스캄뿐만이 아니었다.
포라킨도, 루도, 심지어는 알리온마저 체면도 잊은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만 끔뻑거렸다.
한 주임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무쇠로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자 하랑이 얼른 달려와 팔을 붙들었다.
“주임님, 괜찮으세요?”
“괘, 괜찮…….”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괜찮지가 않았다.
세레나가 돌아왔다는 이야기에 한 주임은 저 밑바닥 끝까지 나락으로 추락하는 자신을 보았다.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는 자신의 이마에는 ‘죄인’이라는 낙인이 크게 박혀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은 까마득한 심정이었다.
그녀는 불길에 휩싸인 자로의 관으로 망연자실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이라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저 속에 뛰어들까. 그저 딱 죽고 싶다. 죽을까.
“잠깐만요. 공주님은 5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셨는데, 갑자기 나타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포라킨이 앞으로 나서서 의문을 제기하자 다른 사람들이 급격히 동조하고 나섰다.
“사기꾼 아니야? 예전에도 야닉이 원정 나갔을 때를 노리고 자기가 얼굴을 다친 세레나니 뭐니, 헛소리를 해 대던 미친 인간도 있었잖아.”
루의 말에 같은 인물을 떠올린 몇몇 이들이 그래! 맞아! 하고 격하게 고갤 끄덕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병사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인했다.
“제가 어릴 때 세레나 공주님을 뵌 적이 있어서 얼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윔플(wimple)을 두르고 있어서 머리카락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같은 사람이 맞습니다.”
병사에 말에 스캄이 노기 어린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이봐, 가리개고 뭐고 붉은 머리카락이 맞는지 확인 먼저 했어야지, 얼굴만 보고 장담을 해? 네 기억력이 그렇게 대단한 수준이냐?”
“기혼 여성이 외출할 때에는 윔플을 착용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스캄 님의 발언은 신에 대한 모욕입니다.”
알리온의 곁을 보좌하던 사제가 거세게 반박을 하고 나서자, 그가 있는 힘껏 가래를 끌어모아 바닥에 퉤! 뱉었다.
“5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신네가 말하던 신은 야인족이 인간의 형상을 한 마물이라며 씨를 말려야 한다고 그랬지.”
“그, 그건!”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알리온이 손을 들어 사제를 막아섰다.
그는 주름진 미간을 더욱 좁히며 지팡이 끝을 땅에 쿵 찧는 것으로 두 사람을 모두 입 다물게 했다. 정확히는 주 속성인 바람 마법을 통해 땅에 진동을 가한 것이다.
알리온은 차분하지만 제법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확인 절차가 필요하더라도, 외간 남자가 함부로 여인의 차림새를 건드릴 순 없소. 일단 안으로 들여서 정식으로 사제들이 보게 하지요.”
“만약에 공주님이 맞으면 어떡해요? 공주님은 델피온의 왕녀잖아요. 왕녀의 몸을 수색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불안해진 루마저 한마디 거드는 동안 한 주임은 입을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꼼짝없이 침묵을 지켰다. 안 그래도 벌써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스치듯이 날아드는 눈길에는 온갖 호기심들이 점철되어 있었다.
자연히 손바닥이 축축해지고, 등줄기가 빳빳해졌다.
“수색이 필요하다면 협조해야지. 자네들이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병사가 왔던 길로 묵직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목소리 하나가 돌연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따라 일제히 몸을 돌려세웠다.
세레나 아피오수스, 아니… 세레나 리버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한 주임은 그녀가 진짜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사람들의 표정이 더욱 확신을 불러일으켰다.
일순 세레나가 있는 곳만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머리와 귀, 목까지 미색 리넨으로 꽁꽁 감싼 세레나는 낡은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먼지와 흙탕물이 잔뜩 튄 회갈색 로브 아래로 드러난 부츠 역시 가죽이 죄다 해지고 색이 바랬다.
그녀가 타고 있는 말은 갈기가 엉망으로 엉켜 있고 입가에는 허연 거품이 일었던 흔적까지 있었다. 말과 이어진 줄에는 허리에 봇짐을 매고 있는 노새가 축 늘어진 혀를 밖으로 내밀고 침을 뚝뚝 흘려 댔다.
사람부터 짐승까지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초라한 행색이건만, 세레나의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빛이 났다.
그녀는 청금석을 닮은 푸른 눈으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전부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 시선이 루에게 닿았을 때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가족이라도 만난 듯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컸구나, 루. 내 기억이 맞다면 올해 열아홉이겠지?”
자못 다정한 음성이었으나 루는 사형선고를 받기라도 한 사람처럼 턱까지 덜덜 떨면서 끄덕거렸다.
“보, 봄에 생일이 지나면 스무 살이 돼요…….”
황자에게도 막무가내인 그 루가 고분고분한 태도라니! 하랑이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뜨린 건 재차 검을 세워 든 스캄이었다. 그는 눈빛만으로도 사람 하나 죽일 기세로 살벌하게 내뱉었다.
“무슨 꿍꿍이인진 모르겠다만, 대장… 아니, 황자님이 돌아오시거든 그때 다시 오든가 하쇼. 지금은 돌아가는 게 좋겠소.”
“그저 내 집으로 돌아온 것뿐인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야만족.”
뻔뻔하게 대꾸하는 세레나의 눈엔 야인에 대한 경멸이 대놓고 비치고 있었다.
젠장, 젠장할! 스캄이 욕지거리를 가까스로 삼키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세레나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온화한 얼굴로 루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오렴, 루. 말에서 내릴 참이니 손을 잡아 주려무나. 거기 병사는 이리와 바닥에 엎드리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연신 눈치만 보던 병사가 우물쭈물하면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결국 스캄이 굳은 얼굴로 고갯짓을 하는 것을 보고 그는 주춤주춤 발치로 가서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에 엎드렸다.
스캄의 암묵적인 인정에 만족한 세레나는 이번에는 루를 향해 눈짓했다.
어서 오지 않고 무얼 하느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아, 아빠!”
핏기가 사라진 얼굴의 루가 걸음을 내디디려는 찰나, 임철우가 목발을 크게 내저어 오더니 딸의 앞을 막아섰다.
“공주님은 여전하시네요. 5년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 딸은 그쪽의 시녀가 아닙니다.”
꽉 눌린 목소리로 한 자씩 힘주어 말하는 임철우의 손은 분노로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에 가만히 미소를 띠던 세레나의 얼굴이 단박에 서늘해졌다.
“시녀가 아니면 더더욱 영광으로 여길 일이지. 근본도 모르는 이계 핏줄에게는 오히려 과분한 자리가 아니더냐.”
그러더니 뭔가가 떠오른 듯 허공에 손가락을 들고 아! 하더니 짐짓 경쾌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루의 모친도 평민이었지, 아마? 루가 네 살 땐가… 그리핀에게 목을 물어 뜯겼다고 했었나? 아니면, 둥지로 붙잡혀 갔다 그랬나?”
“이봐요!”
부지불식간에 피가 거꾸로 솟구친 임철우가 참지 못하고 손바닥에 불길을 만들어 냈다.
한 주임은 늘 허허실실 웃던 임철우가 분노를 표출하는 것에 놀라기는커녕, 되레 과격할 정도로 그에게 공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게 바로 세레나 공주….’
미엘라가 불같이 성토했던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몸소 깨닫는 순간이었다.
세레나는 단순한 철부지 왕녀가 아니었다. 사람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며 자극하는 법을 알고 있는 가장 괘씸한 형태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날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비아냥거리는 꼴이 가관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참 무르시지. 어디서 무얼 하다 온 건지 알 수도 없는 외지인에게 귀족 대접이라니. 누가 알겠나, 저쪽 세계에서 빌어먹고 살던 하층민이었는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