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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91화 (91/155)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임철우를 저지한 이는 다름 아닌 포라킨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달려와 임철우의 팔을 붙들고 고개를 짧게 흔들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참으셔야 합니다.’

포라킨은 눈빛으로 만류한 뒤에 제가 대신 세레나를 향해 걸어갔다.

“……그쯤 하시고 제 시중이나 받으시죠. 공주님.”

“이게 누구야, 헤르미네 포라킨! 델피온의 훌륭한 변절자! 자랑스러운 매국노!”

“예, 예. 정말 변함없이 그대로시네요.”

포라킨의 손을 잡고 우아한 몸짓으로 말에서 내린 세레나는 눈을 접어 웃으며 깔깔거렸다.

“그대로라니, 설마! 나도 벌써 스물세 살이란다. 철없던 시절은 그만 잊어 주렴!”

“공주님이 스물셋이라고요?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일이군요.”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됐지 뭐니. 여전히 형편없는 얼굴을 보아하니 너는 아직도 결혼을 못 했구나!”

포라킨은 경련이 이는 입꼬리를 겨우 끌어올렸다.

일단은 인파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으므로 반박은 접어 두고, 그녀는 세레나를 이끌고 가까운 식당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본성에서 먹어도 되는데. 오랜만에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거든.”

평민들이나 드나드는 단출한 식당 내부를 빙 둘러보던 세레나가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포라킨은 직원에게 달려가 가장 빨리 나오는 식사를 주문한 뒤에 동화 한 개를 쥐여 주고 귓속말을 건넸다.

어린 직원은 밝은 얼굴로 고갤 끄덕이고는 얼른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기서 잠시 쉬고 계시면 본성으로 모실 마차를 대령하겠습니다. 공주님의 말들은 언덕을 오르기엔 너무 지쳐 보였거든요.”

임기응변이 제대로 먹혔는지 세레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좋아.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온 내 잘못도 있으니, 안주인을 맞이할 시간은 주어야겠지.”

식당의 가장 구석진 자리, 작고 좁은 테이블에 세레나를 앉혀 놓고 맞은편에 포라킨이 냅다 주저앉았다.

허락도 없이 감히 왕족과 동석을 하다니, 세레나가 인상을 구겼으나 포라킨은 개의치 않고 곧장 시선을 맞춰 왔다.

“……갑자기 돌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다신 볼 일 없을 거라면서요.”

한편, 광장에 남겨진 이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스캄이 제 머리를 크게 헝클어뜨리며 대놓고 욕설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하랑! 너 지금 당장 수도로 출발해야겠다. 대장한테 하루빨리 소식을 알려야 해.”

“예에? 또 제가요?”

낯빛이 금방 푸르죽죽해져서는 하랑이 오만상을 찌푸리자 스캄이 끓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너만큼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지체하면 델피온으로 가는 대장과 길이 엇갈릴 수도 있다.”

“하랑 혼자서는 위험하지 않을까요?”

한 주임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들어 끼어들었다.

아직 눈도 다 녹지 않은 빙판길에다가 잔뜩 굶주린 마물이 득시글할 게 분명한 길을 혼자 넘으라니, 너무 가혹한 명령이었다.

호위를 더 붙이고 그사이에 자신도 슬쩍 묻어가려는 속셈으로 한 주임은 적극적으로 하랑을 두둔했다.

“저번에 황실 기사단도 혼자 데려다주고 고생 많이 했잖아요. 또다시 혼자 가라는 건 너무 가혹해요.”

“아직 장례식이 끝나지 않았네. 자네들은 따로 성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어.”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알리온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그 역시 세레나의 등장에 처음엔 당황했다가 아무래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있는 것이 염려된 모양이었다.

이제야 자신들을 향한 수많은 눈과 귀를 의식한 스캄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가 하랑과 한 주임에게 손짓을 하려던 찰나, 인파를 뚫고 어린 사내아이가 달려왔다.

“부대장님!”

스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근처 식당에서 잔심부름 일을 하는 녀석이었다.

“마법사님이 집사장님에게 공주님이 오셨다고 전달하래요. 그리고 모실 마차를 바툼 식당 앞으로 보내라고 하셨어요.”

“……알았다.”

* * *

스캄으로부터 직접 소식을 들은 루이자는 맨 처음 다른 이들이 지었던 표정을 그대로 답습했다.

순간 현기증마저 일어 기둥을 붙잡고 비틀거리다가 정신을 차리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안경을 벗어 옷 춤에 닦아 고쳐 쓰고 겨우 목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단, 아, 알겠습니다. 곧바로 마차를 준비시키지요. 황자님께는 그럼….”

“내일 해 뜨는 대로 하랑이 수도로 출발할 거요. 대장 소식은 아직인가?”

루이자는 즉각 고개를 저었다.

“궁에 도착하면 일정을 다시 짠 뒤에 다리가 빠른 기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도착은 아마 며칠 전에 했을 테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랑드콜까지는 오지 않았을까 싶어요.”

말을 듣고 잠시간 고민하던 스캄이 옆에 있던 하랑의 어깨에 두툼한 손을 척 올렸다.

“어차피 그랑드콜에서 여기까지는 외길이니까, 네가 가서 전령을 만나 보고 대장의 족적을 따라 이동하는 게 낫겠다.”

어깨를 짓누르는 힘대로 땅으로 꺼질 듯이 목을 움츠린 하랑이 울상을 지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나설 때라고 생각한 한 주임은 적극적으로 번쩍 손을 들었다.

“저도 함께 가게 해 주세요. 걸리적거리지 않을게요. 블라산코 님이 검술은 이제 웬만한 하급 기사 실력은 된다고 그랬어요.”

그녀는 루이자가 허둥지둥 하인들을 부르러 멀어지는 것을 보며 얼른 덧붙었다.

“식사 준비도, 빨래도 다 제가 할게요. 밤에는 불침번도 설게요.”

“이봐, 신입… 아니지, 한 주임.”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허리를 짚고 선 스캄이 다른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난색을 보였다.

“하랑 이 친구가 누구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이유는 안 먹고, 안 자고, 말만 바꿔 가면서 내달리는 정신 나간 놈이라서야. 그리고 지금은 그 정신 나간 녀석이 가장 필요한 순간이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 주임님이라서가 아니라, 부대장님이 따라와도 느려져요. 그러니까 지금은 저 혼자 가는 게 나아요.”

빛바랜 붉은 머리를 긁적이던 하랑이 배시시 웃으며 첨언했다. 또다시 거절이다.

“아……. 그렇군요. 잘 알겠어요.”

한 주임은 힘없이 대답하고 가까스로 웃었다.

언제쯤이면 이 사람들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언제쯤이면 제가 이곳에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갑자기 모든 것이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희뿌옇게 아득해졌다.

야닉이 돌아올 때까지 잘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된다는 스캄의 말을 마지막으로 한 주임은 속절없이 방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오래간만에 수첩을 꺼내 마력이 어쩌고 어쩌고 제가 써 놓은 메모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긴 시간 요새를 비우게 되자 야닉은 힘을 한계까지 채워 넣은 장신구 보따리를 한 아름 쌓아 두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양으로만 보자면 두 달은 너끈히 버틸 양이었지만, 그는 최대한 서둘러서 한 달 안에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겼다.

“…….”

은연중에 그와 결혼을 하게 되면 이런 불안은 사라질 거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마음이 편해졌는지 근래 들어 살도 조금 오르고, 지난달에는 요원하던 생리까지 다시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설레는 사람이 있고, 자매처럼 살갑게 구는 사람이 있고, 친구처럼 마음이 맞는 사람도 있으니 제법, 아니 꽤 행복하다고 여기던 나날이었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실낱같던 기대는 얇은 유리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듯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언감생심. 주제에 감히 행복을 바라다니, 네 처지를 알라고 냅다 찬물을 끼얹은 것만 같다.

미엘라는 야닉이 돌아오면 곧바로 결혼식을 올릴 거라며 보석이나 드레스 따위의 이야기로 온종일 떠들어 댔는데, 세레나가 돌아온 이상 그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결혼은커녕 그와 친구 사이를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야닉이 자신을 좋아했던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토록 그리워했다던 아내가 돌아왔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 터.

세레나의 방에 온갖 보물을 쌓아 둔 것만 봐도 그랬다. 갑자기 거기 있던 금은보화가 숫제 세레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설마 세레나는 세레나대로 기쁘게 맞이하고, 저를 두 번째 부인으로 삼으려는 건 아닐까?

부정적으로만 흘러가는 사고는 근거가 제법 타당했고, 그럴 가능성 또한 농후했다.

한 주임은 기억을 더듬어 세레나의 바다처럼 깊고 푸른 눈과 코 위에 귀엽게 자리한 주근깨, 오밀조밀 작고 도톰했던 입술을 떠올렸다.

그러곤 손거울로 제 얼굴을 비췄다.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갈색 눈동자, 특색 없는 코에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밋밋한 입술.

무난하다고 여겼던 자신의 모든 것이 불현듯 평범 이하로 곤두박질친다.

작고 조그마해서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신장도 아니고, 어깨도 너무 떡 벌어진 것 같고. 최근엔 검술에 열중했더니 배에 복근까지 두 줄 슬쩍 비쳤다. 괜히 뿌듯해했나.

한 주임은 이내 세차게 고갤 흔들었다.

‘아니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야닉이 돌아오면 그때 생각해. 정신 똑바로 차려, 한송이.’

상념에 몰두한 나머지 그녀는 자신을 옛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줄도 몰랐다.

‘스캄 말마따나 나는 나대로 잘 기다리고 있으면 돼. 내일부터는 밖에 나가서 활을 쏘자.’

블라산코는 다른 신입 용병들과 함께 국경에 있는 통행로 정리를 위해 며칠 전부터 요새를 비운 참이었다.

브레고가 지휘하는 소규모 부대엔 한 주임을 제외한 운영팀 전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시기엔 검은 등 쥐나 바위 거미 같은 하급 마물만 나타난다고 해서 가능한 구성이라 들었다.

운영팀도 모두 자리를 비웠겠다,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한 주임은 약간 기운이 나는 것을 느끼며 화살 길이를 정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별안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미엘라가 뛰쳐 들어왔다.

“죄, 죄송해요! 주임님!”

노크도 없이, 허락도 구하지 않고 갑자기 안으로 들이닥친 미엘라는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미엘라? 무슨 일이에요?”

“저, 저 좀 숨겨 주세요. 제발요!”

눈물까지 펑펑 쏟아 내며 미엘라는 한 주임의 바짓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갑자기 무슨 날벼락인가 싶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리던 한 주임은 곧이어 척추까지 저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열린 문 사이로 세레나가 유유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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