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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92화 (9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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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녀를 봤을 때만큼은 아니어도 발이 바닥에 붙은 듯 꼼짝없이 굳어서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주인을 보고 왜 그렇게 도망치는 거니, 미라엘. 조금 섭섭하구나.”

세레나는 싸늘하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가 한 발씩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미엘라는 발작적으로 몸을 떨었다.

“공주님! 이곳은 사자님이 머무시는 곳입니다. 아무리 공주님이라 하셔도…!”

한발 늦게 달려와서 말리려던 루이자의 뒷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세레나가 이를 악물더니 있는 힘껏 루이자의 뺨을 올려붙였기 때문이었다.

철썩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밖에 있던 사용인들이 놀라 헉하는 숨소리가 방 안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네까짓 게 감히 날 가르치려 들어?”

세레나는 눈에서 불꽃을 일구어 냈다.

“네가 옛날부터 그이를 보는 눈이 지저분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집사? 어디서 계집 따위가 집사랍시고 내 남편 옆에서 얼쩡거려!”

뺨을 맞은 충격인지 모욕적인 언사 때문인지, 루이자는 반박도 못 하고 덜덜 떨리는 손을 볼에 가져다 댔다.

그러나 곧 반대쪽으로 고개가 확 꺾였다. 이번에는 안경까지 저만치 날아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기어이 반대쪽 뺨까지 후려친 세레나가 분노에 찬 가슴을 들썩거렸다.

“염치도 없는 늙은 계집! 제 남편 아랫도리 간수 하나 못 해서 집안에서 쫓겨났으면 수도원이나 들어갈 것이지, 어디서 같잖은 귀부인 행세야! 어디서 감히 선생질이냔 말이야!”

“지, 진정을….”

“뭐? 방 열쇠가 없으니 사원으로 모시겠다고? 감히 누굴 객식구 취급……!”

다시 한번 공중으로 치솟는 손을 보고 루이자는 차라리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항하면 할수록 거센 폭력으로 되돌아온다는 조금 전 몸으로 배운 경험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초가 더 지나도 얼굴에 가해지는 충격은 없었다.

슬그머니 눈을 뜬 그녀는 세레나의 팔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한 주임을 보고 박제된 동물처럼 굳어 버렸다.

마력도 없는 이방인이 공주를 내려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저기요, 말로 하세요.”

“…….”

세레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산양 가죽으로 만든 고급 장갑을 낀 손에서 기다란 팔로, 어깨를 지나 배꽃같이 하얀 얼굴까지 시선을 옮기자 신장 차이로 인해 고개가 저절로 올라갔다.

교양도, 예의도 없는 천박한 이방인들은 대체로 고개가 빳빳했다. 제 손목을 우악스럽게 쥐고 있는 눈앞의 이방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허공에서 붙잡힌 손목을 뿌리치려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힘을 주었다. 그러나 벗어나려 할수록 한 주임은 손아귀에 힘을 꽉 주며 더욱 단단히 옭아맸다.

루이자가 양쪽 뺨을 얻어맞은 것처럼 한 주임은 세레나가 곧장 다른 손을 들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예상과는 달리 세레나는 어깨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잠시 체면을 잃었구나. 흥분을 가라앉힐 테니 손을 놓아라.”

긴장을 놓지 않으며 서서히 한 주임이 힘을 풀자 세레나는 제 손을 빼내면서 얼얼한 팔목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사뿐사뿐 방을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흙먼지 쌓인 로브와 너덜너덜한 신발을 신고도 점잔 떠는 걸음걸이로 그녀는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루이자와 미엘라, 그리고 한 주임이 그 모습을 떨떠름하게 관망했다.

손가락 끝으로 적갈색 책상을 훑던 세레나는 매우 우아한 동작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핏대를 세우고 손찌검을 하던 모습과는 거짓말처럼 상반된 모습이었다.

“가구는 전부 마호가니인가? 못 본 새 성에 고급품들이 더 많아졌더구나. 시가지엔 건물도 많이 들어서고.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영지가 더 부유해졌나 봐.”

“자단나무입니다. 눈보라가 불기 전에 낡은 가구들은 전부 교체했지요.”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닦으며 루이자가 차분히 답했다.

마호가니보다 곱절은 비싼 것이라는 설명은 부러 생략했다. 세레나가 아는 선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것을 대령하되, 더 비싼 것이 있다는 말은 절대 금물이라는 영지 재무관의 과거 조언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처음 들어 보는 원목 종류였는지 애매하게 눈을 흐리던 세레나는 곧장 화제를 바꾸었다.

“야닉이 알아서 잘했겠지. 물건 보는 눈이 좋은 사람이니까. 지금은 잠시 입궁했다고?”

그녀의 입에서 ‘야닉’이 나오는 순간 한 주임은 허파를 쥐어 짜낸 사람처럼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세레나는 감격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이가 아직도 내 방 열쇠를 가지고 다닌다니, 무척 감동이구나.”

루이자는 이번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꿈결에 있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세레나에게 그녀의 규방을 재물을 쌓아 두는 창고로 쓰고 있다는 말을 꺼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말했으면 따귀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니.

어색하게 따라 웃으려다 아까 맞은 탓에 입술이 터졌는지 찌르르한 통증이 일어 루이자는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가해자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인자한 웃음을 흘렸다.

“수고스럽게 다른 방을 준비할 필요는 없어. 남편 침실이 있는데, 굳이 다른 곳을 쓸 이유가 있나?”

루이자는 자연스럽게 한 주임의 눈치를 봤다.

한 주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벽도, 바닥도 아닌 곳에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루이자로선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세레나는 책상 위에 있는 수첩을 마음대로 펼치더니, 볼펜까지 익숙하게 집어 들고 빈 장에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을 적고서는 종이를 북 찢더니 그것을 불쑥 내밀었다.

“이곳에 가서 사람을 찾아. 그가 율리안을 데리고 있거든.”

얼떨결에 받아 든 루이자가 입 모양으로 ‘율리안?’ 하다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정갈한 필체로 로엘 왕국의 지명과 상세위치, 그리고 ‘사미 크랩턴’이라는 남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루이자는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름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사미… 사미 크랩턴. 그래 맞아. 세레나가 시집올 당시 호위를 맡았던 델피온 왕실 기사의 이름이었다.

“저 율리안이라는 분은…….”

“내 아들이란다. 이제 곧 다섯 살이 되는 잘생긴 사내아이지. 이름이 율리안이야. 율리안 리버스.”

리버스. 성까지 들은 한 주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세레나는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눈을 흘겼다.

“야닉의 아들이야. 제국의 황손이니 아주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서 모시고 오려무나.”

말을 마친 세레나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다가 문득 멈춰서 한 주임 뒤에 숨어 있는 미엘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기울여 빙긋 웃었다.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왔더니 못 보던 아이들이 늘었더구나. 낯선 아이보다는 아는 얼굴이 좋을 듯하니, 미라엘을 내게 보내렴.”

그 다정한 음성이 미엘라에게는 꼭 칼날을 목에 갖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미 기가 꺾인 루이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미엘라에겐 미안하지만 잘 어르고 달래서 보내는 수밖에.

뒤돌아 나가려는 세레나의 뒤통수에 한 주임의 음성이 날아든 건 그때였다.

“이 애는 제 담당이라 안 될 것 같아요.”

누군가 루이자에게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이 언제냐 물어본다면, 그녀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세레나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가는 모습은 그만큼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의 청안이 서슬 퍼렇게 빛날 때면 꼭 누구 하나는 죽기 전까지 매질을 당했다. 루이자는 어쩐지 그 희생양이 자신이 될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세레나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한 주임은 그런 것 따위는 일절 상관하지 않는 사람처럼 맞섰다.

미엘라는 삽시간에 창백해져서 한 주임을 향해 격하게 도리질을 쳤다.

천사처럼 마음씨 고운 제 주인이 지금 세레나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고 있다. 누가 봐도 싸우자는 태도가 아닌가!

물론 세레나는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섭지만, 미엘라는 어느샌가 한 주임이 더 걱정이었다.

“주, 주임님, 그냥 제가 갈게요! 저는 괜찮….”

“방금… 뭐라고 했지?”

세레나는 제가 잘못 들은 것인지 확인하는 모양새로 되물었다. 그러나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는 한 주임에겐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라서 보낼 수 없다고요. 죄송한데 다른 직원분한테 부탁해 보세요.”

“부탁?”

이거 야단이 났구나. 루이자는 소리 없는 탄식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돌아가신 어머님의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묻고 싶은 심정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세레나에게는 어떤 변명도, 수작도 통하지 않는다. 딱 죽기 직전까지 매질한 다음, 정말 위험할성싶으면 교묘하게 치료까지 해 주는 위인이 아니던가.

참다 참다 야닉에게 사실을 알렸을 땐 성이 한바탕 뒤집혀졌더랬다.

온종일 악에 받친 발악이 끊이질 않다가 배 속의 아이를 인질 삼아 죽어 버리겠다고 협박까지 일삼으니, 그로서는 피해자들에게 큰돈을 배상하는 것으로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백금 촛대를 집어 던져서 황족의 눈가가 찢어지게까지 만들었던 여인이었다. 야닉이 조용히 넘어갔기에 일이 커지지 않았을 뿐.

왜 그때 그냥 넘어갔는지! 루이자는 이제 와서 주군이 원망스러웠다.

안하무인 공주에게 천민과도 다름없는 이방인의 언행은 반역 그 자체였으리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레나가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것이 공기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세레나는 한 주임을 지그시 노려보기만 하다가, 심지어 눈을 피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뜨끈해지는 감각을 억지로 끌어내리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은 되레 공포에 가까웠다.

아직도 욱신거리는 손목을 매만지는 주제에 세레나는 겉으로 여유를 보였다.

“…미라엘에게 다른 주인이 생겼다면 어쩔 수 없지. 그 뚱뚱한 부인은 아직 성에 있나? 이름이 뭐였더라, 하녀장 말이야.”

“시에나 말이시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녀를 부르지요.”

세레나의 마음이 바뀔까 루이자는 즉각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제야 한결 나아진 얼굴을 한 세레나가 재차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정말로 나가려나 했는데, 이번에도 한 주임이 한마디를 덧붙여서 기어이 그녀를 발목을 붙든다. 루이자는 그야말로 딱 죽고 싶었다.

“이 애는 ‘미엘라’예요. ‘미라엘’이 아니라요.”

로브 아래로 주먹 쥔 손이 파르르 경련하는 게 루이자의 눈에 너무나도 잘 보였다.

그래, 미엘라…. 나지막이 이름을 정정한 세레나는 마침내 퇴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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